침잠의 계절, 추운 겨울이 다시 찾아왔다. 푸르고 무성했던 나무들이 벌거벗은 창밖을 내다보며 지난 한 해를 자꾸 되돌아보게 된다. 마치 인간에게 그런 기회를 주기 위해 하늘이 짜놓은 4계절용 각본 같다. 그러면서 보다 나은 또 한 해를 맞이하라고.
“껄·껄·껄이 뭐게?” 누군가 한 모임에서, 연말이면 출몰하는 퀴즈를 내겠단다. “그게 뭔 소리? 노인네 웃음소리야?” 여럿이 몇 가지를 답이라 내놨지만 친구는 계속 고개를 젓는다. 결국 그의 응답은 “참을걸·베풀걸·즐길걸”의 준말이란다. 한 해가 저무는 이때 누구나 겪는 ‘3대 후회’ 목록이라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중 내게 가장 후회막급인 것은 ‘베풀걸’이다. ‘베풀걸’은 상대가 있고 돌이킬 수도 없는 것이니 더 그렇다. 특히 다신 만날 수 없는 부모님에 대한 불효를 지적하는 소리로 들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최악의 후회 목록이다.
친정어머니가 가끔 혼자 말을 하셨었다. “암, 누구나 그때가 돼야 알지, 모른다 몰라!” 난 그 자조 어린 말씀을 ‘노인네 푸념’ 정도로 대충 넘겼다. 그다음에도 되풀이되길래 여쭸다. 당신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이란다. ‘90이 넘은 노인이 30년 전 돌아가신 당신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마음 아파하다니 참!’ 하고 무시했다. 당신이 말씀했던 ‘그때’가 내게 도달한 걸까? 나 역시 몇 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내 가슴속을 떠나지 않고 사무쳐온다. 또 그때 그 말씀이 남편과 사별해 24년을 홀로 사신 절박한 외로움과 딸자식의 무정함에 대한 서운함을 떨쳐버리려는 자위용이었음을 새삼 깨치게 됐다. 그 이후 어머니는 요양병원, 대학병원 응급실을 전전하다 결국 12월 31일 혼자 눈을 감으셨다. 직장 일은 이미 그만뒀지만 잡생각에 나는 여전히 초조·분주했던 것이다. 늙은 어머니의 외로움, 병든 몸은 인생사 통과의례인 양 여겨 별일이 아니었던 거다.
불과 얼마 전 돌아가신 시어머니에 대한 죄책감도 후회막급이다. 며느리라는 이유로 더 무관심했던 것. 경제적 여유가 나았던 그분은 의사·간호사가 상주하는 고가의 실버타운에서 10여 년 머무셨다. 별세 3년 전에는 당신 공간에 간병인도 두고 친구인 양 지내셨으니 더 모른 척했다. 며느리가 자주 들르면 간병인도 불편하고 말년에 시어머니 통장에 관심이 있어서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주위 조언이 그럴싸해서였다. 그러나 장례식 후 실버타운에서 대기자의 후속 입주를 위해 급히 실어 온 유품을 정리하면서 가족이 자주 찾지 않는 환자의 안위는 간병인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물증들이 속속 나왔다. 그곳에서 3끼 식사와 청소, 취미 프로그램 등 웬만한 것을 다 공급받는 어머니 방안 3면 벽장은 온갖 물건들로 넘쳤다. 상표를 떼지도 않은 옷·화장품·건강식품과 한약재 등. 어머니의 각종 통장을 정리하고 짐 속에서 나온 그분의 일기식 메모를 받아보면서 죄책감에 얼어붙었다. 자주 바뀌는 간병인들과 방문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머니가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여기저기 불필요한 물건을 구입해 그 대금을 얼마나 많이 부쳐줬는가를 알게 됐다. 간병인이 제멋대로 나들이를 하면서 낯선 이를 품앗이로 대충 들여도 내색도 못 하셨던 것이다. 어렵고 무서워서. 속죄의 마음으로 메모를 보면서 눈물이 절로 흘렀다.
이런 류의 후회는 인생의 반면교사다. 물론 또 잊고 반복하리라. 후회의 연속은 이미 수천 년간 유전돼 온 인생사 고질병이란 불길한 예감도 든다. 두 번의 막급한 아픔을 겪은 내가 이제 좀 성숙해져 내년엔 그런 자책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후회는 집착이며 지금을 놓친 마음의 결과다. 다 털어내고 지금에 감사하며 가진 걸 베푸는 자세만이 나와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힘을 길러준다”는 한 스승님의 말씀대로 애써보련다. 더 참고 베풀리라! 인간에게 모두 주어진 ‘그때’가 내게도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