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민주주의의 본산 영국의회의 모습. 여야가 빽빽한 공간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조선일보DB

장수(將帥)의 정위치는 앞이다. 앞에 서야 우두머리다. 알렉산더 대왕은 언제나 전장의 최전선에서 병사를 이끌며 연전연승했다. 카르타고의 맹장 한니발 역시 선두에서 코끼리를 타고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격했다. 조지 워싱턴 장군도 마찬가지. 독립전쟁 승리를 발판 삼아 막강 미국의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지도자는 전선(前線·front)에서 책임지는 자리임을 보여준다.

대한민국 국회의 리더들 모습은 어떤가. 당대표⸱원내대표⸱다선의원 등 당 지도부는 모두 본회의장 뒤편에 앉아 있다. 마치 본부석이 마땅한 자리인 양 위세를 부리며 앞쪽 초⸱재선, 비례대표들의 활동량을 체크한다. 귓속말을 주고받고, 간간이 웃음을 짓고, 후배들이 전투력을 발휘할 땐 “옳소” “잘한다” 추임새를 넣는다. 그러다 수시로 슬그머니 사라진다. 문이 가까워 나가기 쉬우니 뒤를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뒤가 권력이다. 뒤에서는 종합통제실처럼 조종과 지시를 하고 앞은 행동과 타격을 맡는 듯한 모습이다. 서열과 권위가 후미에서 드러나는 건 구리고 음습하고 비겁하다.

의회주의 본고장 영국 하원은 여야가 마주 보며 늦게 오면 서 있어야 한다. 밀도 높은 공간, 그게 전통이다. 정부⸱여당이 의장의 오른쪽, 야당이 왼쪽. 지도부는 앞에서 진두지휘한다. 상대가 바로 눈코 앞에 있으니 발언을 정교히 가다듬고 예의를 갖추게 되고 논박의 스킬을 벼리게 된다. 우리 국회가 겉돌고, 상대를 향해 비아냥거리는 게 상습화된 건 원천적으로 의사당이 넓어서다. 쓸데없이 큰 공간은 익명성⸱은닉성을 높인다. 독일은 우리와 유사한 반원형 좌석이나 집행부는 역시 앞에 착석한다. 뒤쪽은 다선⸱초선이 무작위로 섞인다. 프랑스는 평등을 강조하는 나라답게 당과 선수(選數)와 관계없이 무작위에 가깝게 좌석 배치를 한다. 미국은 차별된다. 개인⸱파벌⸱위원회 중심으로 좌석 할당이 이뤄진다. 리더가 앞에 자리해야 책임과 대표성이 분명해진다. 또한 의원들 개개인이 주체적 발언과 토론을 활발히 펼칠 수 있다. 무엇보다 국민들 눈높이에 맞게 정당의 존재 이유와 정체성을 각인시킬 수 있다.

피켓 시위 문화도 지적하고 싶다. 피켓 들기가 상식적이려면 절대적 약자가 제도적 뒷받침을 못 받거나 어디에 하소연해도 사태 해결이 난망할 때다. 절박한 심정에서 나오는 행동이어야 그 전제 조건에 걸맞는다. 거대 여당이 야당일 때의 효능감에 젖어 수시로 벌이는 피켓 시위는 보기 민망하다. 야당도 보수라는 겉옷을 걸쳤을진대 품격과 관용이 아쉽다. 영국은 의회 내에서 팻말⸱슬로건 등 모든 형태의 시위 표시를 금지한다. 독일 역시 소형 플래카드⸱확성 구호⸱집단 연출 행위는 안 된다. 프랑스에서 팻말 시위는 제명 사유다. 새삼스럽지만 국회는 말로 설득하고 치열히 토론하고 결국 타협⸱조정하는 곳이다. 날 선 구호와 거친 아우성이 일상인 이 땅의 국회는 현대 한국인에게 최대의 수치심을 안기는 현장이 된 지 오래다. 이참에 거리로 나가 도로 위에서 목 놓아 외치는 퍼포먼스도 그만했으면 한다. 국회는 노조나 시민단체가 아니다. 당을 아끼고 사랑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징표가 꼭 한 데서 목청 터지는 외침을 과시하는 것이라야 하는가? 후진적⸱퇴행적 사고회로다.

마지막으로 휴대폰 문제다. IT와 모바일 강국 코리아인지라 폰의 일상화는 좀체 벗어나기 어렵다. 그렇기에 더욱 상응하는 에티켓이 요구된다는 생각이 든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아예 ‘휴대폰 정치’를 구현하고 있다. 본회의장 곳곳이 폰들의 향연이다. 정부정책⸱민생법안을 다루는 현장에서 의원들은 단톡방을 통해 지도부의 지시를 수신한다. 지역구 행사를 체크하고 민원을 챙긴다. 몇몇은 주식매매⸱인사청탁⸱코인거래⸱축의금 관리에 여념이 없다. 동료 의원이 연단에서 열변을 토하지만, 귓등으로 듣기 일쑤다. 몸은 오프라인인데 영혼은 모바일⸱온라인이다. 영국 하원은 의원이 발언할 때 폰을 만지작거리면 의장이 바로 제지하며 상원에선 폰을 꺼두어야 한다. 독일은 의원이 스마트폰을 일정 시간 이상 보고 있으면 ‘민주주의에 대한 무례’로 간주해 의장이 경고를 준다. 비공식적이긴 해도 제재 대상이다. 미국과 프랑스도 휴대폰을 장시간 수시로 만지작거리는 걸 불허한다. 국회는 국사와 민생을 다루는 토론의 공간이라는 의식이 확고하다.

과거엔 국회의원을 선량(選良)이라고 칭했다. ‘가려 뽑힌 뛰어난 인물’이라는 뜻. ‘민의의 전당’은 국회를 가리켰다. 국민의 뜻을 모으고 결정하는 장소라는 의미. 그런데 과연 그런가? 당리당략과 특정 세력의 전유물이 되진 않았나? 한국 국회의 신뢰도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조사 대상 30국 중 28위다(2024년). 국민 4명 중 1명꼴로 국회를 불신한다는 통계도 있다. 벅찬 일을 하겠다고 덤비는 것만이 용기가 아니다. 관성(慣性)의 틀을 떨쳐내고 안 해야 할 일을 끊어내는 게 진정한 용기다. 우리 국회와 의원들에게 필요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