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9.화 / 운행 12일 차 / 누적 거리 218.31㎞ / 해발고도 795m)
매일이 전쟁이다. 12일이 지났는데도 남극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침에 눈을 뜰 때 느끼는 피로는 체감상 한 달쯤은 쌓인 것 같았다. 화이트아웃(눈보라 등으로 주변이 온통 하얗게 보이는 현상)과 블리자드를 온몸으로 맞고 나니 슬슬 몸이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20년 넘게 원정을 다니며 입술이 부르튼 건 처음이다. 아직 1500㎞가 넘게 남았는데 벌써 무너지는 건가? 부르튼 입술에는 피딱지가 생겨 아침이면 입술 위아래가 들러붙어 있었다. 물을 마시려고 입을 벌리면 다시 피가 흘렀다.
밥을 먹기 힘들다. 오늘 아침에만 두 번을 토했다. 나흘 넘게 구토를 했다. 2년 전 남극점 원정 때에도 초반에 여러 날을 토했다. 2년 전과 마찬가지로 남극의 환경에 아직 몸이 적응하지 못해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좀 유난했다.
알람 소리에 눈을 뜨자마자 어제저녁 끓여 넣은 보온병의 물 한 모금을 마셨다. 물이 위에 닿자마자 속에 있는 음식물을 모두“웩웩웨~엑” 거리며 토해냈다. 피가 얼굴에 쏠렸고 안압이 올라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노란 위액까지 쏟아질 것 같았다. 남극에 갖고 간 메뉴는 소불고기와 돼지 제육볶음이다. 두 가지 메뉴로 70일 내내 같은 식사를 준비했다. 서양식 원정 식량인 파스타나 프라이드 라이스보다는 한식이 좋아 바이칼 호수 원정부터 지난 남극점 원정까지 두 차례 테스트를 거쳤다. 마장동에서 수입 냉동육을 박스로 구입해 식당에서 직접 조리했다. 동결 건조 공장에서 일주일간 급속 냉동 건조해 한 끼에 130g씩 분리해 담아 온 것들이다. 한 번도 문제없이 잘 먹었고 이번에도 같은 준비를 했다.
원래 어제저녁 메뉴가 돼지고기였지만 속이 불편해 오늘 아침에 먹을 소고기를 미리 먹었다. 아침 식사용으로 돼지고기를 끓였다. 눈뜨자마자 토한 상태라 식욕이 없었다. 15분 넘게 누워 있다가 식어버려 다시 데웠다. 다시 끓여도 돼지고기에 수분이 없어 종이를 씹는 느낌이다. 절반쯤 먹었는데 두 번째 구토가 올라왔다. 같은 가게에서 구입해 같은 과정을 거쳐 준비해 온 소고기는 멀쩡한데 돼지고기를 먹으면 계속 토했다. 며칠 전부터 설사도 시작됐다.
그냥 무심히 지나쳤던 준비 과정들이 떠올랐다. 처음 고기를 가지고 식당에 갔을 때, “돼지고기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 고깃집 사장님께 상황을 설명했다. “바람이 들어서 그렇다”고 했다. 무슨 뜻인지 물었는데 더 이상의 답이 없었다. 이 표현은 냉동실에 오래 있었거나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의미다. 바이칼과 남극점 때와 같은 정육점에서 고기를 샀다. 식당에서 조리한 고기를 다음 날 새벽 곧장 강릉의 동결 건조 공장으로 가져갔다. 이곳에서도 “돼지 제육 메뉴에서 시큼한 냄새가 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고기를 다시 사서 조리할 시간이 없었다. “설마 상했겠어?”라고 넘겼다. 그리고 재포장을 위해 푼타아레나스에서 음식을 개봉했을 때 군내가 진동했다. 냄새는 참고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푼타에서 원정용 음식을 찾기 어려워 대안도 없었다. 여러 차례 경고와 신호를 보내왔지만, 출국 직전 나는 너무 바쁘고 처리할 일이 많았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문제 될 일이 없을 것이라 믿고 넘겼다. 너무 억울한 마음이 들고 주의 깊지 못했던 나 자신도 한심스러웠다.
갑자기 구토가 쏠려 먹던 밥그릇에 일부를 토했다. 물 한 모금으로 입안의 잔여 토사물을 헹궈냈다. 밥그릇의 토사물을 걷어내고는 볶음 고추장을 비벼 남은 밥을 마저 먹었다. 오늘 걸어야 할 거리를 따라잡기 위한 ‘연료 주입’이다. 지난 시간에 연연할 에너지조차 아까웠다. 중요한 건 여기서 후회해 봤자 달라질 건 없다는 사실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 최초로 남극 대륙을 단독 횡단한 산악인 김영미의 ‘남극, 끝까지 한 걸음’을 격주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