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중심가 가르니에 극장(Palais Garnier)은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맞는 화려한 계단과 황금빛 찬란한 장식으로 가득한 휴게실, 거대한 샹들리에가 트레이드마크다. 1896년 11월 이곳을 찾은 개화파 지식인 윤치호도 압도당한 듯하다. ‘거울처럼 빛나는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기둥, 네 군데에 알제리 양식의 손잡이가 있는 웅장한 계단. 기하학적 도형과 기호로 된 우아한 장식, 여러 가지 색채에다 총체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 황금빛과 자주색깔을 풍부하게 드리운 이 모든 것은 환희와 함께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구노 오페라 ‘파우스트’를 본 그는 ‘과학과 예술의 접목으로 만들어낸 경이로움’이라고 일기에 썼다.
2745석 현대식 바스티유 극장
올해 개관 150주년을 맞은 가르니에 극장으로 파리 여행을 시작했다. 바스티유 극장과 함께 파리 국립오페라발레단이 주무대로 쓴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오페라, 발레를 이곳에서 올린다. 몇 해 전 미국 소프라노 나딘 시에라가 여주인공 노리나를 맡은 도니체티 오페라 ‘돈 파스콸레’를 이곳에서 봤다. 고전적 분위기의 극장 안 현대적 무대가 아슬아슬한 조화를 이뤘다.
올봄엔 마침 동양인 최초 에투알(수석 무용수)인 박세은이 발레 ‘실비아’ 주역으로 나섰다. 맨 앞자리인 1열 가운데 좌석을 확보했다. 지휘자 바로 뒷자리였다. 파리발레단 에투알 출신으로 라 스칼라 극장 발레감독을 지낸 마누엘 레그리가 안무한 이 작품은 올 공연 19번 모두 일찌감치 매진됐다. 세 차례 주연을 맡은 박세은은 커튼콜 때 기립 박수를 받을 만큼 존재감이 돋보였다.
1989년 개관한 바스티유 극장은 2745석 초현대식 극장이다. 모두가 평등한 극장을 내세우며 박스석을 없앴다. 비좁은 공간에 객석을 늘이다 보니, 좌석 간격이 좁고 불편한 게 흠이다. 리투아니아 소프라노 아스믹 그리고리안이 ‘잔니 스키키’ ‘외투’ ‘수녀 안젤리카’ 주역 셋을 도맡은 푸치니 3부작 ‘일 트리티코’를 봤다. 2022년 잘츠부르크 여름축제 때 독일 출신 연출가 크리스토프 로이가 초연한 작품으로 파리오페라와 공동 제작했다.
잘츠부르크에 이어 두 번째로 보는 작품인데도 그리고리안의 연기는 압도적이었다. 특히 마지막 단막 ‘수녀 안젤리카’가 그랬다. 사생아를 낳은 후 반강제로 수녀원에 들어온 안젤리카는 아들의 죽음을 뒤늦게 전해 듣고 절망한다. 스스로 자기 눈을 찌른 후 환상 속에서 죽은 아들과 재회하는 피날레에서 울컥했다. 인기 정상을 달리던 러시아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의 공백을 메우는 최고의 소프라노다웠다.
나딘 시에라가 출연하기로 했다가 취소한 마스네 ‘마농’은 ‘패션의 나라’ 프랑스를 자랑할 만큼 무대와 의상이 돋보였다. 마농보다 프랑스 테너 벵자맹 베른하임의 데 그리외가 수준급이었다.
파리 음악여행 성지 중 하나는 2015년 1월 외곽에 들어선 필하모니 드 파리다. 프리츠커상 수상작가인 장 누벨이 설계한 이 콘서트홀은 조개껍데기 같은 느낌을 주는 은빛 외관이 조각품 같다. 2400석짜리 주공연장 피에르 불레즈홀은 20대 지휘자 메켈레가 이끄는 파리 오케스트라 상주홀이다. 정명훈이 음악감독으로 있던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를 비롯, 베를린 필하모닉과 뮌헨 필 등 유럽의 손꼽히는 오케스트라와 스타 연주자들이 앞다퉈 찾는 곳이다.
파리 음악 무대는 이 밖에도 여럿이다. 가르니에 극장에서 걸어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오페라 코믹 극장은 비제 ‘카르멘’(1875)과 오펜바흐의 ‘호프만 이야기’(1881), 마스네 ‘마농’(1884)이 초연된 프랑스 오페라의 본산 같은 곳이다. 1901년 6월 주불 공사로 온 김만수는 이범진 러시아 공사 등 20명과 함께 이곳에서 공연을 봤다. 그는 ‘사람들의 귀와 눈을 현혹시켜서 요괴 등의 이야기를 꾸미는 데 불과하다’고 기록했다. 이 오페라 코믹 극장과 살 플레옐 극장은 개성 있는 오페라와 콘서트를 앞다퉈 연다.
‘파르지팔’ 서곡 크게 틀고 도로 질주
파리가 첫 번째 여행이 아니라면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 말고도 가볼 만한 곳이 많다. 파리 현대미술관의 마티스 특별전과 칸딘스키 연인이던 가브리엘레 뮌터전도 좀처럼 보기 힘든 전시였지만 루이비통재단 미술관이 전관(全館)을 할애한 데이비드 호크니전(4월 9일~9월 1일)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호크니는 작품값이 가장 비싼 생존작가로 거론된다. 이 여든여덟 살 화가가 코로나 기간에 아이패드로 그린 프랑스 노르망디와 고향 영국 요크셔의 풍경화, 그리고 인물화는 평범한 소재이면서도 보는 이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 만큼 강력했다. 꼭대기층에서 만난 호크니의 오페라 영상은 충격적이었다.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푸치니 ‘투란도트’, 모차르트 ‘마술피리’, 슈트라우스 ‘그림자 없는 여인’ 같은 작품은 붉고 푸른 원색을 주로 쓰는 그의 화폭을 3차원 무대에 옮긴 듯했다.
호크니는 바그너 ‘파르지팔’ 서곡을 커다랗게 틀어놓고 드라이브를 즐길 만큼 오페라를 좋아했다. 1970년대 중반~1990년대 초반 영국 글라인본 오페라 페스티벌과 런던 로열오페라, 시카고 리릭 오페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무대 디자인을 맡았다.
코로나 사태 이후 부쩍 오른 숙박비는 부담스럽다. 하지만 영감 한 스푼이 필요할 때, 파리는 갈증을 풀어주는 오아시스 같은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