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이 끝나도 공부는 끝나지 않는다. 공부에는 침묵이 요구된다. 때로 갑갑할 것이다.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 서울 대치동 학원가를 지난 1일 찾았다. 걸으면서도 책을 보며 웅얼웅얼 뭔가를 외는 학생이 즐비한 이곳 길거리에 희한한 ‘방’ 하나가 놓여 있다. 이름하여 ‘스크리밍 존’(Screaming Zone). 1평 남짓한 방음 부스인데, 누구나 마음껏 괴성을 질러댈 수 있도록 조성된 공간이다. 오후 5시쯤 인근 중동고 학생 넷이 들어섰다. 한창 기운 뻗칠 나이, 작심한 듯 “꽥!” 사자후를 내지르자 실내 전광판 데시벨(㏈) 수치가 115까지 치솟았다. 비행기 이륙 시 발생하는 굉음 수준. 김모(17)군은 “학교 마치고 독서실 가던 길에 잠깐 들렀다”며 “내년이면 고3인데 종종 스트레스 풀러 와야겠다”고 말했다.

◇대치동 학원가 ‘비명의 방’

지난 1일 대치동 학원가 ‘스크리밍 존’에서 학생들이 목청껏 소리 지르고 있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저녁 시간이 되자 길거리에 학생들이 더 늘었다. 삼삼오오 밥 먹으러 가다가, 혹은 추위를 피해 이들은 스크리밍 존으로 향했다. “이게 뭐지?” 사실 이 공간은 주민 의견에서 탄생했다. 강남구청 관계자는 “카페 혹은 스터디 카페를 제외하면 주변에 아이들이 쉬어갈 수 있는 장소가 별로 없다는 학부모들의 목소리가 높았다”며 “비용 걱정 없이 머무는 동안 조금이라도 힐링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해 2년 전 설치했다”고 말했다. 아침 10시부터 밤 11시까지, 별도 등록 절차를 없애 접근성을 높이면서 하루 평균 10팀 정도는 꾸준히 들르는 명소가 됐다. 물론 공짜다.

고교생이 대다수지만, 어리다고 고뇌가 없을 리 없다. 곧 중학생이 되는 정모(12)양도 이날의 방문자 중 한 명. 저녁 6시, 근처 영어학원에 가는 길이었다. 동갑내기 친구 둘과 함께 부스에 입장해 천천히 복압을 끌어올리더니 이윽고 “꺅!” 돌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지친 기색도 없이 5분 넘게 고음을 방출하고 나니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가끔 공부하느라 힘들 때도 있는데 막 소리 지르니까 신나요.”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휴대용 ‘고함 항아리’까지

‘고함 항아리’를 사용하고 있는 가수 태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점이 좋다"고 말했다. /틱톡

누구나 내면에 거대한 고함을 품고 있다. 묵히면 병 된다. 그래서 독특한 ‘병(甁)’이 탄생했다. 입을 대고 소리 지르면 이를 흡수하는 호리병 형태의 플라스틱 ‘고함 항아리’. 아마존 등 온라인 마켓의 스테디셀러로, 국내 쇼핑몰에도 “힘든 세상 살아가는데 요긴하다” 같은 리뷰가 수백 건이다. 선물 받아 써봤다는 한 한국인 여성은 “소리를 크게 질러봤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 바로 뒤에서도 잘 안 들릴 정도”라며 “스트레스는 풀고 싶은데 층간소음 걱정되는 분들에게 추천한다”고 했다. 국내 우울증 관련 카페에도 후기가 올라와 있다. “산에 올라가서 소리 지르기 귀찮아서 아침에 한 번씩 사용하는데 효과 좋네요.”

때로 사무실 전화 부스는 괴성을 터뜨릴 훌륭한 공간이 된다. /틱톡

전방에 함성 발사, 원초적 치료법(primal therapy)으로도 불린다. 트라우마를 회상하며 자발적이고 억제되지 않은 비명을 통해 억눌린 감정을 해소하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주장. 1970년대 미국 심리학자 아서 야노프가 주창했는데, 가수 존 레논 등이 열렬한 옹호자였다. 학계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정설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 확실한 유행이 돼가고 있다. 틱톡 등 소셜미디어에 ‘Scream Booth at Work’ 쇼츠 영상이 잇따라 올라오는 배경이다. 회사 업무 스트레스를 풀려면 어떻게 할까? 음주(×), 흡연(×), 뒷담화(×). 조용히 사무실 내 방음 전화 부스에 들어가 문을 닫고는 양껏 소리 지른다(O).

◇호텔, 공원서… “비명으로 회복”

지난 여름 미국 시카고 ‘스크림 클럽’ 참가자들이 함성을 발사하고 있다. 등록이나 비용은 필요치 않다. /인스타그램

영국 아마스웨이트 홀 호텔은 ‘비명 테라피’ 서비스로 유명해졌다. 투숙객들이 요청할 경우, 호텔 직원이 호숫가 숲 속으로 안내해 원하는 만큼 소리 지르고 울부짖을 수 있도록 자리를 깔아주는 것이다. “호텔이 보유한 약 48만평 규모의 광활한 자연 속에 짓눌려 있던 심신을 풀어내고 원래의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안식처를 마련했다”며 “스트레스 완화를 위해 제공되는 여러 트리트먼트가 있지만 때로 색다른 접근이 필요하다”는 설명. 영국 매체 스파 비즈니스 핸드북은 지난해 보고서 ‘스파 전망 트렌드’에서 이 같은 비명 치료의 대중화 가능성을 예측했다.

목청 해방 운동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 지난 9월에는 미국 시카고, 10월에는 영국 런던에서 ‘소리 지르기 클럽’(Scream Club) 행사가 열렸다. 공원에 모인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고충을 고백하고, 다 같이 숨을 고르고, 구령에 맞춰 소리를 지르는 이벤트. 이 집단 행동의 예상치 못한 효과는 ‘웃음’이다. 다 같이 한참 소리 지르고 나면 종국에는 자연스레 깔깔 폭소를 터뜨리게 되는 것이다. 웃고 소리 치기를 반복하던 한 여성 참가자는 “소리 지르기 클럽은 (혼자 우울해하는 대신) 집 밖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연대감을 느낄 수 있는 마음 챙김의 재시작”이라고 인스타그램 영상을 통해 말했다. 토해 내듯 그토록 목에 핏대를 세웠던 이유는 훌훌 털고 ‘재시작’(reset)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괴로워도, 끝내 이기리라

텔레그램방 '약세장 비명 치료 그룹'에서 음성 파일로 울부짖고 있는 투자자들. "나만 잃은 게 아니구나"라는 묘한 위안을 얻게 된다. /텔레그램

꾸며낼 수 없는 가장 날것의 목소리, 잊고 있던 야성에서 터져 나오는 카타르시스. 유명 호러 영화 제작사 블룸하우스는 최근 미국 축제 ‘SXSW 2025’ 행사장에 ‘스크림 박스’(Scream Box)를 설치했다. 방음 부스에 들어가 비명을 내질러 가장 높은 데시벨을 기록한 참가자의 랭킹을 외부 모니터에 실시간 중계하고, 순위에 따라 상품을 제공하는 행사였다. 함께할 때, 고성방가도 엔터테인먼트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온라인에서도 소리 지를 수 있다. 텔레그램에 개설된 ‘약세장 비명 치료 그룹’(Bear Market Screaming Therapy Group) 채팅방에는 하락장에 돈을 잃은 전 세계 가상화폐 투자자 7000여 명이 모여 있다. 독특한 점은 이 채팅방에서는 문자 전송이 불가능하다는 것. 오로지 ‘음성 파일’만 업로드할 수 있다. 길면 10초, 짧으면 1~2초짜리 절규가 매일 올라온다. 클릭하면 연속으로 자동 재생되는데, 영어·아랍어·독일어 등 다채로운 국적의 절규를 감상할 수 있다. 계속 듣다 보면 돌림노래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개중에는 실제 음악에 맞춰 높낮이를 바꿔가며 비명을 지르는 ‘샤우팅 뮤지션’도 있다.

익숙한 한국어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이곳에서 가장 자주 귀에 꽂히는 한국인들의 단말마는 다시 초심을 다지려는 의지의 “시발(始發)”이다. 아, 인생의 괴로움이여. 그러나 견디면 결국엔 이기리라. 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