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이 높이 13m 초대형 크리스마스 트리 주변에 흩날렸다. 하루 다섯 차례 인공 눈을 분사하는 ‘스노 샤워’. 관람객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눈사람과 산타로 분장한 아이들이 눈 쌓인 트리 앞에서 포즈를 취했고, 부모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인증샷을 눌러댔다.
트리 뒤로는 한 번에 30명이 동시 탑승할 수 있는 2층 회전목마에 길게 대기 줄이 늘어서 있었다. 크리스마스 트리와 회전목마를 중심으로 각종 먹거리와 기념품, 굿즈를 파는 부스 51개가 들어서 유럽 ‘크리스마스 마켓’에 들어선 듯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온 관광객들은 “한국에서 유럽의 크리스마스 마켓도 경험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며 즐거워했다.
지난 1일 찾은 서울 잠실 ‘롯데타운 크리스마스 마켓’은 평일 오후임에도 인파로 북적댔다. 롯데백화점이 ‘유럽 정통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잠실에 재현한다’는 목표로 2023년 시작한 크리스마스 마켓은 첫해 방문객 24만명이 몰렸고, 지난해에는 40만명을 모았다. 지난달 10일 판매된 1차 패스트 패스 입장권은 10분, 지난 1일 2차 사전 예약 입장권은 9분 만에 매진됐다.
크리스마스 마켓은 잠실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겨울을 대표하는 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 서울과 부산·대구부터 제주까지 20개가 넘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연말을 맞아 운영되고 있거나 열릴 예정이다.<표 참조>
◇13세기 말 독일어권 ‘12월 시장’이 시초
크리스마스 마켓의 ‘원조’는 중세 독일이다. 더 정확하게는 현대 독일과 오스트리아, 프랑스 동부 일부 등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독일어권 지역. 날이 추워지면 이 지역에서는 겨울을 대비하기 위한 시장이 도시마다 열렸다.
당시 명칭은 ‘겨울 시장’ 또는 ‘12월 시장’. 햄·소시지 등 염장하거나 훈연해 장기 보존 처리된 육류나 땔감, 옷가지 등 겨울을 나기 위한 품목을 마련하는 장터였다. 이러한 시장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3세기 말~14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트리아 공작 알베르트 1세가 빈 상인들에게 지역 주민을 위한 12월 시장 개설을 1296년 허용했다는 기록이, 독일 뮌헨에서는 겨울 시장이 1310년 열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월동 대비 시장은 차츰 확대됐다. 유럽권 최대 명절 성탄절이 코앞이었기에 크리스마스 트리 등 집을 꾸밀 장식과 아이들에게 선물할 장난감, 가족이 모여 나눠 먹을 달콤한 빵과 과자 등 디저트류가 특히 인기가 높았다. 이때부터 현대 크리스마스 마켓의 형태를 갖춰나갔다. 1434년부터 독일 드레스덴에서 열리는 ‘드레스너 슈트리첼마르크트(Dresdner Striezelmarkt)’는 오늘날 전 세계 크리스마스 마켓의 전형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크리스마스 마켓은 19세기 중반 백화점이 등장하면서 잠시 쇠락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들어 전통문화 보존과 소비 활성화의 구심점으로 다시 각광받기 시작했다. 특히 해외 관광객 유치에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이 확인되면서 활력을 되찾았다. 매년 200만명이 찾는 독일 뉘른베르크 크리스마스 마켓이 대표적이다.
20세기 후반부터 크리스마스 마켓은 독일어권을 넘어 유럽과 전 세계에 들어섰다. 독일계 이민자가 다수 거주하거나, 독일 도시와 자매결연한 도시에 우선적으로 열렸다. 북미 대륙에서는 미국 시카고에 1990년대 후반 들어섰고, 뉴욕과 캐나다 토론토 등으로 확산했다. 프랑크푸르트의 자매 도시인 영국 버밍엄은 독일어권 ‘원조’에 가장 근접했다고 평가받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2001년부터 열린다. 일본 삿포로에서는 뮌헨시와 자매 도시 체결 30주년을 기념해 2002년부터 ‘뮌헨 크리스마스 마켓’을 열고 있다.
◇한국형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진화
크리스마스 마켓이 국내에 도입된 건 2010년대로 추정되지만, 본격적으로 유행한 건 2020년대에 들어서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광화문마켓’은 2022년 시작해 올해로 4회째를 맞았다. 지난해 164만명 이상이 방문하고 소상공인 업체 141곳이 참여해 매출액 7억원을 올리며 서울 대표 겨울 축제로 자리 잡았다. 같은 해 현대백화점은 여의도 ‘더현대 서울’ 5층 사운드 포레스트 공간을 완성도 높은 유럽풍 크리스마스 마을로 연출하며 화제를 모았다.
롯데백화점은 2023년 잠실 롯데월드 몰 앞 월드파크 잔디광장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을 선보였다. 유통업계 관계자 A씨는 “백화점 내에서 크리스마스 관련 상품을 판매하는 행사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정통 유럽식 야외 마켓 형태를 선보인 건 롯데가 처음”이라며 “여기를 기점으로 크리스마스 마켓이 국내에서 본격 확산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신세계백화점은 지난해 강남점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을 팝업으로 운영한 데 이어, 올해 본격적으로 ‘신세계 원더랜드 크리스마스 마켓’을 본관과 강남점에 연다. 특히 강남점 지하 공간을 크리스마스 트리와 장식으로 가득한 ‘트리 로드’로 꾸몄다. 백화점 업계 관계자 B씨는 “‘국내 크리스마스 장식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고 평가받는 본점 외벽 미디어 파사드에 대한 자부심이 큰 신세계도 트렌드로 떠오른 크리스마스 마켓을 외면할 수 없었던 모양”이라고 했다. 미디어 파사드가 명소가 됐지만 길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시각적 2D 경험’에 그치는 반면, 크리스마스 마켓은 시각적 경험에 더해 물건을 사고 음식을 맛보는 ‘체험형 3D 경험’이 가능하다는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형 크리스마스 마켓은 사진을 찍으면 구분이 힘들 만큼 유럽의 원조 크리스마스 마켓을 정교하게 재현했다. 와인에 계피·정향 등 향신료와 사과·오렌지 등 과일을 더해 뜨겁게 끓인 ‘글뤼바인’과 소시지 등 유럽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판매하는 먹거리도 다양하게 갖춰 마치 유럽에 여행 온 듯한 체험이 가능하도록 운영한다.
하지만 뜯어보면 한국적 요소가 곳곳에 섞여 있다. 롯데타운 크리스마스 마켓에는 ‘주신당 비밀점집’이 입점해 있고, 많은 방문객이 이곳에서 사주와 운세를 본다. 26개 F&B(식음료) 부스에는 글뤼바인·소시지·초콜릿 등 유럽 간식과 함께 떡볶이·닭강정·닭꼬치·떡갈비 등 한국 간식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장혜빈 롯데백화점 시그니처 이벤트팀장은 “아무리 이국적이고 새로운 간식이 많아도 매출 1위는 떡볶이·닭꼬치 등 전통 먹거리”라고 했다. 점집 앞에서 만난 독일인 관광객 레나(27)씨는 “우리나라 크리스마스 마켓과 같은 듯하면서도 한국만의 특색이 있어서 재밌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