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스포츠의 첫 기억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에서 치러진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키의 대결. 김일이 박치기를 할 때마다 TV 앞에 모인 동네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박치기!”라고 외쳤던 순간이다. 두 번째 강렬했던 기억은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여자 핸드볼 팀이 소련을 꺾고 구기 사상 첫 금메달을 안기던 순간이다. 캐스터가 “3초, 2초, 1초. 금메달입니다! 금메달!” 하고 외쳤을 때 우리도 모두 TV 앞에서 “금메달!” 하고 외쳤다. 2002년 월드컵은 어떤가. 한국과 이탈리아의 8강전에서 1-1로 연장전에 들어갔을 때 이영표가 올리고 안정환이 헤딩으로 마무리한 골든골의 순간이 지금도 선명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러한 국민 전체의 염원이 모이던 국가 스포츠의 시대는 저물었다. TV 한 대를 놓고 여러 사람이 모여 보는 매스미디어의 시대가 더 이상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심지어 가족들도 자신의 모바일이나 태블릿으로 각자 다른 콘텐츠를 소비하는 이른바 취향의 시대다. 스포츠라고 예외일까. 올림픽이나 월드컵 시즌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프로 스포츠를 찾아보는 팬이 급증했다. 취향별로 갈라져 그 수는 줄어들었지만, 이 팬들의 열정은 그 누구보다 뜨겁다.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그 스포츠에 빠져들고, 경기만이 아닌 경기 이면의 좀 더 디테일한 정보도 알고 싶어 한다. 이러한 변화를 정확히 짚어낸 것이 스포츠 예능이다. 스포츠 중계로는 더 이상 알 수 없는 좀 더 내밀한 스포츠의 세계를 스포츠 예능은 파고 들어간다.
최근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MBC 스포츠 예능 ‘신인감독 김연경’은 그 단적인 성공 사례다. 은퇴한 스포츠 스타의 방송 출연이 뭐 새로울까 싶지만, 김연경은 예능의 차원을 넘어서는 여자 배구에 대한 진심을 프로그램에 녹여 냈다. 2부 리그가 없어 팀에서 밀려나면 은퇴할 수밖에 없었던 선수들을 한자리에 모아 다시 뛰게 함으로써 재평가받을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이 은퇴 선수들의 목표는 그래서 방송인으로서 주목받는 게 아니다. 다시 프로팀이나 실업팀에 복귀해 선수로 뛰는 것이다. 그래서 ‘원더독스’라는 팀명은 프로 제8군단을 목표로 ‘언더’에서 ‘원더’로 거듭나겠다는 선수들의 의지를 담았다.
“나 여자 배구 좋아하네.” ‘신인감독 김연경’을 본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그렇게 말한다. 그 비법은 스포츠 중계로는 볼 수 없었던 스포츠 예능만의 촬영과 편집이 있기 때문이다. ‘신인감독 김연경’에서는 선수들이 저마다 마이크를 달고 경기를 뛰고, 카메라도 선수 한 명 한 명을 따라다닐 정도로 세분화되어 있다. 그만큼 밀착된 이들의 이야기와 디테일한 영상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김연경 감독이 경기장에서 선수들에게 작전 지시를 하고, 선수들이 그 작전대로 경기를 해 점수를 따내는 순간의 ‘타격감’은 스포츠 중계와는 차원이 다르다. 여자 배구가 ‘전략 스포츠’이고, 치열한 감독들의 두뇌 싸움에 선수들이 어떻게 잘 따라 주느냐가 경기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게 적나라하게 보인다. 물론 스포츠 예능은 실시간 중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 일련의 과정들이 마치 스포츠 소재 영화들처럼 편집되어 좀 더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마치 ‘하이큐’ 같은 배구 애니메이션 영화 같다. 경기를 보여주지만, 중간중간 어떤 한 포인트를 내는 순간에 그 점수가 나기까지의 준비 과정들을 플래시백으로 채워 넣는다. 한 점의 타격감 자체가 달라지는 이유다.
예능이 아니라 스포츠 그 자체의 리얼리티로 무장한 스포츠 예능이 만들어 낸 결과는 놀랍게도 현실도 변화시킨다. 성장을 거듭한 원더독스는 2024~2025 시즌 프로 통합 준우승팀인 레드스파크스까지 꺾으며 팀 목표였던 50% 승률을 달성했다. 또한 선수들의 목표였던 프로팀과 실업팀에 실제 복귀하는 사례도 이어졌다. 은퇴했던 이나연 선수가 핑크스파이더스에 입단했고, 김현정 선수 또한 지난 9월 수원시청 배구단에서 실업 배구 선수로 뛰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여자 배구의 팬층이 급증했다. 실제 이번 시즌 마지막 직관 경기에는 3일 만에 약 1만명이 신청해 전석 매진 사례를 기록했다.
스포츠 예능이 스포츠 자체에 영향력을 미친 사례는 이미 2019년 말에 방영된 KBS ‘씨름의 희열’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 이만기·이봉걸·강호동으로 대변되던 씨름의 황금기가 아련한 추억으로 꺼져 가던 시기에, 이 스포츠 예능은 태백·금강급 씨름 선수들의 대결로 다시 씨름에 불씨를 지폈다. 마치 서바이벌 오디션처럼 연출하고 다각도의 카메라로 박진감 있는 장면들을 보여주면서 팬층이 생겼다. 코로나로 파이널 매치는 경기 당일 아쉽게 취소됐지만, 순식간에 전석이 매진되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었다. 스포츠 예능은 이를 기점으로 팬덤 중심으로 변화했다. 김성근 감독이 출연해 프로야구의 막강한 저변을 만들어 낸 JTBC ‘최강야구’, 최용수가 감독으로 출연해 K리그 팬들을 열광케 하고 있는 쿠팡플레이 ‘슈팅스타’, 최근 새로 시작해 권투의 매력을 다시금 보여주고 있는 tvN ‘아이 엠 복서’ 등 이 스포츠 예능들은 한때 국민을 열광케 했던 스포츠의 자리에 이제는 ‘팬덤’을 끌어모으고 있다. 이제 이들의 강력한 팬덤은 스포츠 전문가로서 스포츠 중계 그 이상을 요구한다. 결국 스포츠가 관객을 위한 것이라면, 이러한 관객의 변화를 수용해야 하지 않을까. 스포츠 중계도 스포츠 예능을 통해 팬들이 무얼 원하는지 귀 기울여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