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서울 용산역 앞에 국민의힘 당원협의회와 강태웅 민주당 지역위원장 명의의 대형 현수막이 인접해 걸려 있다. 곳곳에 경쟁하듯 내걸린 각종 현수막이 거리를 뒤덮고 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단 10분, 600m를 걸었을 뿐인데 54개의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28일 서울 시청역 1번 출구부터 광화문역 6번 출구까지, 가로수와 신호등 기둥, 도로변 안전 펜스 등에는 갖가지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우리농민 다 죽이는 매국협상중단!” “공무원 휴대전화 포렌식! 대통령 뜻이냐?” 같은 정당 현수막과 “서소문고가 철거 공사 중” “2025 스포츠 서울 하프마라톤 교통통제 안내” “서울 교통문화를 새롭게 할 시민 제안을 받습니다!” 같은 시·구청의 현수막이 뒤섞여 있었다. “코로나 백신 국민학살범 ○○당 살인마 집단을 처단하라!”와 같은 과격한 구호가 담긴 집회 현수막도 보였다.

이런 풍경은 서울 도심만의 일이 아니다. 전국 방방곡곡 유동 인구가 좀 있다 하는 곳이라면 사정은 비슷하다. 지하철 환승역이나 대형 교차로에는 지역 정치인과 자치단체장의 현수막이 경쟁적으로 나부끼고, 상가 건물 외벽과 인근에는 할인과 행사 정보를 담은 광고 현수막이 늘어선다. “25평형 6억대 ○○동 신규 아파트” 같은 분양 광고, “조합 설립 추진위원회 승인 완료” 같은 재개발 관련 현수막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미국의 인터넷 커뮤니티 ‘레딧’에는 9월 한국의 한 학교 앞에 걸린 현수막 사진과 함께 “합법인지 궁금하다. 현수막을 아무 데나 걸어도 되느냐. 주변이 온통 쓰레기, 주로 아파트와 학원 광고로 덮여 있다”는 글이 올라왔다. 한국 여행을 다루는 유튜브·소셜미디어에는 “현수막과 간판이 너무 많다” “복잡해서 경치에 집중하기가 어렵다”는 외국인들의 댓글이 끊이지 않는다. 도시 곳곳을 채운 현수막이 어느새 ‘한국적 풍경’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24일 서울 노량진역 인근 가드레일에 구청 신청사 이전을 홍보하는 현수막과 학원 광고 현수막이 나란히 걸려 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작년 전국 폐현수막 최소 5408t

환경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에서 발생한 폐현수막은 5408t. 현수막 하나의 무게를 600g으로 계산하면 900만장이 넘는다. 이는 지자체가 수거해 처리한 현수막만 집계한 수치로, 실제 발생량은 이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수막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데는 기술적·제도적 변화가 함께 작용했다. 1990년대 들어 컴퓨터 기반 실사기와 커팅기가 보급되면서 제작 과정이 전산화됐고, 누구나 짧은 시간에 원하는 문구와 이미지를 대량 출력할 수 있게 됐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전후해 시각 디자인의 중요성이 높아지던 흐름과 맞물리며, 적은 비용으로 눈에 띄는 시각물을 만들 수 있는 현수막이 대중적 광고 매체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연구자 이충우는 “1990년대 이후 현수막이 시위·행사용에서 기업과 상점의 광고 매체로 확장됐다”며 “2000년대에는 ‘더 크고 더 강렬해야 한다’는 경쟁이 심해지면서 현수막이 우후죽순 제작·게시됐고, 불법 설치로 도시 미관을 해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고 분석했다.

시민들이 피로감을 본격적으로 호소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2022년 옥외광고물법이 개정되면서 정당 현수막은 일반 현수막과 달리 지자체의 허가나 신고 없이도 장소 제한 없이 설치할 수 있게 됐다. 사실상 상시 게시가 가능해진 것이다.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개정 이전 3개월간(2022년 9~11월) 접수된 정당 현수막 관련 민원은 6415건이었지만, 개정 후 4개월간(2022년 12월~2023년 3월)에는 1만6350건으로 급증했다. 월평균으로 비교하면 시행 전 2115건에서 시행 후 4419건으로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보행 안전사고가 늘고 도시 미관 훼손 지적이 이어지자, 지난해 법은 다시 개정됐다. 정당 현수막을 읍·면·동별 2개로 제한하고, 어린이 보호 구역 등 일부 지역에는 설치를 금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난립은 이어졌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정당 현수막에 대한 민원은 총 1만8016건이었다.

최근에는 ‘현수막 정치’를 표방하는 단체까지 나타났다. ‘애국현수막’이란 단체는 지난 7~10월 전국에 1만장 넘는 현수막을 게시했다고 주장하는데, 이 현수막들은 모두 원외 정당 ‘내일로미래로’ 명의로 게시됐다. “시진핑 장기 이식으로 150세” “선생님! 저희 반은 23명인데 왜 30표가 나와요? 응~ 우리나라 국회의원도 그렇게 뽑혔단다” 등 자극적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대부분이다. 진보당 손솔 의원은 혐오 표현이 담긴 현수막 인근에 “혐오 현수막 제발 그만”이란 문구가 담긴 ‘맞불’ 현수막을 설치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또 다른 현수막을 다는 것은 근본적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픽=송윤혜

시민들의 피로가 커지고 정치권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국회는 또 옥외광고물법 개정에 나섰다. 개정안에는 정당 현수막을 규제 대상에 다시 포함시키고, 종교·출신 국가·지역 등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이나 증오를 조장하는 광고물 게시를 금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그런데 현수막 난립이 실제 해소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경기도 구리에 사는 직장인 이모(37)씨는 “정당 현수막이라도 줄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큰 기대는 없다”며 “출근길 지하철역에는 항상 현수막이 십수 개씩 걸려 있는데, 정치 메시지가 담긴 현수막뿐만 아니라 지자체 치적 홍보와 상업 광고 현수막도 너무 많다”고 했다.

◇거리에서, 일상에서… 범람하는 현수막

지난해 옥외광고업 등록 사업체는 1만7471곳이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현수막 제작·설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한국은 현수막 수요가 세계적 수준”이라는 말도 나온다. 현수막은 누구나 바로 주문해 만들 수 있을 만큼 대중화됐다. 크기와 마감 방식에 따라 가격 차이는 있지만, 5m×90㎝짜리 현수막 한 장을 1만~2만원대에 제작할 수 있다. 서울 마포구의 한 현수막 제작업체 대표는 “문구만 있으면 바로 출력하기 때문에 웬만한 현수막은 30분이면 만든다”며 “고객이 원하면 설치·수거도 대행하는데, (단속을 피하려고) 금요일 저녁에 붙였다가 월요일 새벽에 치우는 이른바 ‘게릴라 현수막’ 의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 6월 화제가 된 불륜 폭로 현수막. 왼쪽 사진은 서울 강남 개포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 오른쪽은 역삼동 회사 건물 앞에 걸린 현수막의 모습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제작이 쉽고 비용이 낮다 보니 현수막은 어디에서나 쓰인다. 전통적인 광고·안내 현수막은 물론이고, 동호회 회원 모집, 반려동물 실종 알림, 노인정 김장 행사 같은 생활 밀착형 현수막도 흔하다. 재건축·재개발 과정에서는 조합 설립 등 단계마다 현수막을 거는 관행이 자리 잡았고, 단체·기관의 수상 소식이나 학원과 학교의 입시 결과 홍보, 명문대·고시 합격을 알리는 현수막도 꾸준히 걸린다. 고발 수단으로 쓰이는 경우도 잦아졌다. 지난 6월 서울 강남구 한 아파트 단지 앞에는 불륜 의혹을 공개 비난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애 둘 유부남 꼬셔 두 집 살림 차린 ○○동 ○○호” “남의 가정 파탄 낸 상간녀 조심” 등이 적힌 이 현수막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회자됐다. 프로야구 선수 김혜성의 부친에게 채무 변제를 요구해 온 남성은 “김혜성아 느그 아부지한테 김씨 돈 갚으라고 전해라”라는 문구의 현수막을 경기장과 도심 곳곳에 걸었고, 최근에는 현수막을 들고 김 선수를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현수막이 거리에서 흔한 표현 수단으로 자리 잡으면서, 사용 범위는 사적 공간과 개인 이벤트까지 확장되고 있다. 최근 몇 년 새 돌잔치·결혼·환갑 같은 가족 행사부터 입학·졸업·승진을 기념하는 축하 모임, 여행이나 지인들과의 만남 등 개인적 이벤트에 현수막을 제작하는 일이 유행처럼 번졌다. 소셜미디어에 올릴 사진을 꾸미기 위한 용도로 현수막을 주문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 행사 때마다 현수막을 주문한다는 직장인 최모(43)씨는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데, 현수막만큼 좋은 소품이 없다”고 말했다.

최근 가족 행사, 지인 모임 등에서 현수막을 사용하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왼쪽부터 환갑 기념 현수막, 전역 축하 현수막, 가족여행 기념 현수막. /인터넷 커뮤니티·인스타그램

◇‘저비용 고효율’… 효율 중시 문화와 결합

우리나라는 왜 ‘현수막 공화국’이 됐을까. 전문가들은 그 배경으로 저비용 구조와 즉시성을 꼽는다. 제작 단가가 낮고 대량 출력이 가능해 누구나 쉽게 주문할 수 있고, 설치하는 순간부터 많은 사람에게 메시지를 노출할 수 있다. 금세 붙였다 떼는 현수막의 특성은 즉각적 처리와 속도를 중시하는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와 잘 맞는다는 분석도 나온다.

심성욱 한양대 교수(광고홍보학)는 “현수막은 비용 대비 효과가 가장 큰 광고 수단으로, 오늘날 선진국보다 개발도상국에서 많이 쓰이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현수막을 많이 사용해 왔는데 그 관성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라며 “도시 경관과는 점점 어울리지 않게 됐지만, 손쉽게 광고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계속 유지돼 온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공적 논의를 위한 제도적·물리적 공간이 부족하다 보니, 거리 현수막이 의사 표시 수단으로 기능한다는 분석도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사회학)는 “온라인에서 의견 표출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일부 기성세대는 여전히 현수막을 가장 효율적인 의견 표출 수단이라고 여긴다”며 “집단주의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현수막이 조직이나 단체의 결속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해온 면도 있다”고 했다.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모습. 각종 현수막이 어지럽게 걸려 있다. /이옥진 기자

시민들은 지나친 현수막 노출이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우려한다. 인천에 사는 주부 김모(39)씨는 “최근 아이들 학원가에 유흥업소 광고 현수막이 걸려 맘카페가 한동안 시끄러웠다”며 “가짜 뉴스와 혐오 문구가 적힌 정치 현수막을 보면 아이들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데 설명하기도 난감하고, 환경오염도 걱정된다”고 말했다. 구정우 교수는 “현수막이 갈등을 부추기는 매개체가 되고 있기 때문에 규제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다”며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시각이 반영된 세밀한 규제안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