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 차렷!
입장과 동시에 일사불란한 상차림이 시작됐다. 지난 월요일 저녁 서울 홍대 앞의 한 부대찌개 식당. 제식(制式)하듯 숙달된 동작으로 라면 사리를 투하하고, 쌀밥에 국물 야무지게 적셔가며 한입 가득 떠 넣는 식객들. 다만 하나 놀라운 점이 있었으니, 손님 13명 중 11명이 태국·중국 등에서 온 외국인 관광객이었다는 점이다. 식당 주인은 “지난해 오픈했는데 외국인과 한국인 고객 비율이 7대3 정도”라며 “맛도 맛이지만 다른 한식에 비해 적은 비용으로 푸짐하게 먹을 수 있어 가성비가 좋다 보니 아시아뿐 아니라 유럽 분들도 많이 찾는 편”이라고 말했다.
◇유튜브 달군 ‘부대찌개 리액션’
지난해 10월 독일에서 온 남성이 국내 한 타투숍에 들어섰다. 그가 요구한 문신은 한글로 된 ‘부대찌개 레시피’였다. “부대찌개: 소시지 1팩, 스팸 1캔, 고추장 2T, 고춧가루 2T, 간장 3T, 설탕 1T, 물 600mL, 다진 마늘 1T, 김치 1줌, 양파 1/2개, 고기 적당량, 파 약간, 치즈 1장, 라면 사리 1개.” 자세한 요리 비법이 왼쪽 허벅지에 새겨졌다. 앉으나 서나 부대찌개 생각이 간절했던 남자의 집념, 인스타그램에 공개되자마자 뜨거운 반응이 빗발쳤다. “얼마나 맛있길래…. 저도 이대로 요리해 먹겠습니다.”
미군 부대 잔반에서 비롯한 궁핍의 상징, 허기를 위한 궁여지책의 잡탕이던 부대찌개(Korean Army Stew)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로 맛의 국경을 넓히고 있다. 마카로니·통조림콩·스팸·소시지·치즈에 김치·사골 육수가 어우러지는, 동서양의 조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백악관 셰프’로 유명한 주한 미군 출신 요리사 안드레 러시(51)도 부대찌개 예찬론자 중 한 명. 지난해 한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같이 있으면 안 될 재료들이 잔뜩 모여 있다”며 고개를 젓던 그는 몇 번의 수저질 뒤 태도를 바꾼다. “치즈의 풍미와 양념의 매콤함, 스팸 고기의 짠맛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네요.”
의아한 비주얼, 의외의 맛. ‘부대찌개 리액션’ 영상이 유튜브에서 크게 흥행한 이유다. 값싼 재료, 그것도 계통 없이 중구난방 섞인 겉모습에 표정을 구기던 외국인들이 이윽고 “와우”를 연발하는 순간이 웃음 포인트. ‘국뽕’의 환희가 차오르는 지점이기도 하다. 유튜버 ‘대한미국놈’으로 활동하는 울프 슈뢰더(35) 등의 열렬한 홍보도 한몫했다. 아예 부대찌개 프랜차이즈 브랜드와 손잡고 신메뉴 개발까지 나섰을 정도. 최근 서울 한남동·이태원 일대 유명 부대찌개 식당마다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메뉴판이 준비되고, 가게마다 긴 대기 줄이 형성된 배경이다.
◇‘부대찌개 라면’이 판매 1위?
부대찌개의 인기는 홍대 앞 관광객 특화 편의점 CU ‘라면 라이브러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라면 120여 종으로 외국인 고객의 입맛을 파악하는 테스트베드(testbed) 역할을 하는 이 매장의 압도적 판매 1위가 바로 ‘농심 보글보글 부대찌개면’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1월부터 올해 10월까지 줄곧 독보적 1위에, 매출 비율(6.5%)이 2위 제품보다 두 배 가까이 높다. 한국 소비자에게는 별 반응이 없어 편의점에서 퇴출됐다가 외국인 파워를 등에 업고 지난해 재입점했다. 이곳에서 만난 태국인 은추리 로자나룬(46)씨는 “태국 한식당에서 부대찌개를 처음 접한 뒤 집에서도 먹고 싶어 찾아 헤맸다”며 “라면에 마카로니를 넣을 생각을 하다니 정말 놀랍다”고 말했다.
부대찌개와 결코 떼놓을 수 없는 라면. 부대찌개 국물에 끓여 먹는 게 ‘국룰’이기 때문이다. 상품으로 활발히 개발되며 인기를 견인하는 이유다. 이 맛의 심상찮은 분위기는 이미 2019년 감지된 바 있다. 일본 최대 라면 회사 닛신이 ‘부대찌개 컵라면’(Korean Army Stew Flavour)을 싱가포르에서 출시한 것이다. 한 해외 음식 평론가는 “라면을 곁들인 한국식 찌개 같은 맛”이라며 “집에서 편안하게 한국 드라마와 함께 즐길 수 있다”고 했다. 롯데마트도 지난달 외국인 입맛을 겨냥한 ‘하림 송탄식 부대짜글면’을 출시했다. 부대찌개 명소를 찾아다니며 연구한 끝에 자작한 볶음면 스타일로 개발했다고 한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부대찌개를 선호한다는 사실에 착안해 기획했다”며 “앞으로도 외국인의 관심을 끌 수 있는 K라면을 선보이겠다”고 했다.
◇한국 덕에… 스팸의 재발견
부대찌개의 핵심 재료는 스팸(Spam)이다. 미군의 주요 보급품이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폐기물이었던 돼지 어깨살 부위를 갈아 다진 뒤 뒷다리살과 소금·전분 등을 더해 미국 호멜식품이 개발한 통조림 햄. 대량생산과 ‘정크푸드’의 상징과도 같은 식재료. 이제는 대접이 달라졌다. 부대찌개의 흥행이 큰 공을 세웠다. 영국 BBC·가디언 등에서 한국 부대찌개와 스팸의 약진에 대해 보도하고, 미국 음식 전문지 매시드 선정 ‘2024 푸드 트렌드’에도 스팸이 등장한 것이다. “식비가 치솟는 지금, 대공황 시대의 고기를 주목하는 건 당연한 일처럼 보입니다.”
한류 확장으로 ‘급’이 달라지자 스팸 제조사 호멜푸드도 한국과의 역사적 연관성을 앞세운 홍보 전략을 적극적으로 취하고 있다. “스팸이 들어간 부대찌개는 아마도 한국과 미국의 퓨전 요리를 최초로 선보인 사례일 것”이라며 ‘고추장맛 스팸’ ‘코리안 BBQ맛 스팸’ 등의 신제품을 내놨다. “6·25전쟁 이후 스팸은 한국 문화의 필수품이 됐습니다. 부대찌개 같은 전통 음식에 곁들여지고 명절 선물 세트로 특별하게 여겨지는 분위기까지, 스팸은 편안함과 회복력을 상징하는 한국의 유산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부대찌개→피자·타코·김밥으로
송탄·파주·평택 등 미군 주둔지마다 부대찌개 대표 맛집이 여럿 포진해 있지만, 의정부에서 가장 번성했다. 이 지역 원조는 1960년 ‘오뎅집’으로 불린 포장마차를 열었던 고(故) 허기숙 할머니. 당시 손님 대부분이 미군 부대 군속(軍屬)이었고, 그날그날 몰래 가져나온 햄·소시지·베이컨·칠면조 고기 등을 내밀며 안주 요리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걸 한데 볶으니 ‘부대볶음’이 됐는데, 뜨끈한 국물을 청하는 손님이 늘자 여기에 김치·고추장을 넣고 찌개로 변형한 게 바로 부대찌개의 시작이었다고.
섞고 섞이며 진화해왔다. 지난 8~9일 ‘의정부 부대찌개 축제’가 열렸다. 눈길을 끈 건 ‘신메뉴’ 요리 대회. 부대찌개의 확장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열린 행사다. 부대찌개 재료를 활용한 주먹밥을 기름에 튀긴 이탈리아 ‘아란치니’, 태국식 쌀국수 ‘팟타이’에 방문객들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부대 피자’ ‘부대 타코’도 등장했다. 음식 전문가 및 시민 투표로 선정한 최우수상은 ‘부대 우동&김밥’에 돌아갔다. 태생이 퓨전이니 진화도 끝이 없을 것이다. 부대, 앞으로 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