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한모(33)씨는 지난 주말 옷과 신발을 사느라 하루에 250만원을 썼다.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블프) 할인’을 내세운 아웃렛 쇼핑몰에 남자 친구와 함께 오픈런을 해 문 닫기 직전까지 11시간 넘게 쇼핑을 한 것. 한씨는 “이번 기회를 놓치면 이 가격엔 못 살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에 쇼핑을 멈출 수가 없었다”며 “돈을 너무 많이 써서 연말까지 ‘냉털(냉장고 음식 털어 먹기)’로 버텨야 한다”고 했다.
40대 회사원 이모씨도 최근 생활용품 온라인몰에서 ‘블프 할인’ 쿠폰을 받고 구경이나 해보자는 심산으로 들어가 봤다가 50만원대 신형 세탁기에 돈을 질렀다고 한다. 그는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데 ‘블프 하루 특가’ ‘선착순’이란 말에 이성을 잃었다”면서 “누가 블프 좀 없애줬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블프’의 계절이다. 본고장 미국에선 28일 새벽 0시(한국 28일 오후 2시)에 시작, ‘사이버 먼데이(Cyber Monday)’를 거쳐 약 일주일간 연중 최대 쇼핑 대목이 펼쳐진다. 미국 연 가계 소비의 20%가 이 기간에 집중된다.
그런 블프 대목, 이제 한국에서도 추석·설 명절 대목을 능가한다. 유통 업체 관계자는 “지난 추석엔 전 국민 민생 회복 소비 쿠폰에도 불구하고 매출이 전년보다 되레 줄었는데, 11월 블프가 올해 마지막 반전 카드가 될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비수기였던 11월이 명절 뺨치는 대목이 된 건 G2(미국·중국)의 소비 판촉 대전에 한국이 올라탔기 때문이다. 미국에선 11월 넷째 주 목요일이 추수감사절로 주말까지 통상 나흘 연휴가 생긴다. 1980년대부터 유통 업체들이 연말 재고 처분을 위해 추수감사절 다음 날인 금요일에 파격 할인을 펼쳤고, 이것이 흑자(black ink)를 내준다는 의미에서 ‘블랙 프라이데이’가 됐다.
이에 중국 알리바바는 2009년부터 11월 11일 독신자 쇼핑 축제인 ‘광군제’를 띄웠다. 한국은 2015년 메르스 사태로 소비가 침체되자 정부 주도로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를 띄웠다. 세계시장의 국경이 무너진 상징적 장면이다.
지금 한국에서 ‘블프’의 의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인터넷으로 직접 구매(직구)할 수 있는 미국 본토의 블프, 또 하나는 국내 업계의 각종 할인 행사다.
미 아마존과 손잡은 11번가, ‘쿠블프’를 내세운 쿠팡 같은 유통 업체는 물론 패션·화장품과 식·약품, 병·의원과 학원, 여행사 등도 블프 할인을 내세운다. 패션 플랫폼 무신사는 실시간 누적 판매액을 집계, 100억원 단위를 경신할 때마다 새 쿠폰을 뿌리는 식의 ‘게임형 쇼핑’으로 유명하다.
해외 직구 등 트렌드 소비에 민감한 MZ세대는 블프 기간 광분 상태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이들은 소셜미디어에서 “이번 블프에 어디서 뭘 사면 되나” “이 가격이면 진짜 할인 맞느냐”며 정보를 공유하고, 대량 구매한 화장품이나 수영복 등을 모아 놓고 사진을 찍어 올리는 ‘떼샷’으로 쇼핑 인증을 한다.
블프의 묘미이자 위험 요소는 ‘지금 사야 손해 안 본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뭐라도 집고 보는, 전형적 FOMO(Fear of Missing Out·기회 상실 우려) 심리다.
“분명히 살 게 없었는데, 왜 갑자기 모든 것이 필요한 것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밤새 눈이 충혈되도록 장바구니에 담고 쿠폰 적용하는 재미에 빠지다 보니 ‘텅장(통장이 텅 비는 것)’이 됐다” “할인 종료가 임박해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고 급히 결제했는데 잘한 건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이 넘쳐난다. 가격을 올렸다가 다시 낮추는 ‘꼼수 할인’과 소셜미디어 쇼핑 사기도 잇따른다. 블프 기간 배송 지연과 제품 파손, 오배송 등 택배 민원도 평소보다 20~30% 급증한다.
미국 블프는 트럼프 정부의 관세 인상으로 원가가 올라 대규모 할인이 어려워진 데다, 환율이 1달러당 1500원에 육박하면서 직구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직장인 남모씨는 “미국 운동복을 사려고 면세 한도인 150달러어치를 담아놨는데, 환율에 배송료를 따져보니 한국보다 나을 게 없어 포기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