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와 어우러진 유럽풍 건축물이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내는 경기도 가평의 '청리움'. 보리산 해발 500m 지점에 자리 잡은 청리움은 맑은 정기를 오롯이 만끽할 수 있는 반전 풍경을 품고 있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낙엽이 쌓이는 계절엔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 소음으로 가득 찬 도심을 떠나 고독을 씹으며 ‘생각하는 갈대’가 되어보기에 좋은 계절. 때마침 ‘침묵 여행’이 대세다. 침묵 여행은 잠시 모든 것을 꺼두고 잊고 지냈던 자연, 자연의 일부인 자신과 만나는 여행법이자 적극적인 명상과 사색, 사유를 통해 치유에 이르는 여행이다. 고요한 곳에서 내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침묵의 시간은 금과 같다. 명산·명당에 자리 잡은 비밀의 정원부터 건축 거장의 영감이 담긴 명상관, 그리고 묵상의 성지(聖地)까지, 명상과 사유로 안내하는 지름길을 따라갔다.

◇보리산 맑은 정기 만끽하는 정원, ‘청리움’

무료지만, 날이면 날마다 즐길 수 있는 열린 정원은 아니다. “예약제인 데다 예약 페이지 오픈과 동시에 선착순 마감이 되다 보니 ‘그림의 떡’이다” “취소 표 겨우 예약해서 다녀왔다”는 후기도 보인다. 경기도 가평 설악면에 자리한 힐링 정원이자 복합 문화 공간인 ‘청리움’ 얘기다. ‘예약제 비밀의 정원’이라는 건 한편으론 여느 관광 명소처럼 방문 인파에 치이지 않고, 여유로운 탐방이 보장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청리움은 하루에 일정 인원만 허락하는, 그야말로 ‘프라이빗 정원’이다. ‘한글과 컴퓨터’(한컴) 그룹의 연수원으로 지어져 관공서와 기업체의 연수 장소, 대관 시설로 운영해 오다가 지난 5월부터 예약제로 일반 개방을 시작하면서 가평의 명소로 떠올랐다. 청리움이란 이름은 맑을 청(淸)과 장소를 뜻하는 접미사 ‘-rium’을 조합한 것으로 ‘맑은 정기가 모이는 공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예약객의 경우 청리움 입구에서 안내를 받은 후 가평의 명산인 보리산(해발 627m) 해발 500m 지점에 있는 청리움까지, 잘 닦인 길을 따라 드라이브하며 입장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잔잔한 호수와 유럽풍 건물이다. 어디서 본 듯 낯익다 했더니 드라마 ‘신사와 아가씨’에서 극 중 ‘신사’, 회장님(지현우분)의 별장으로 등장했던 곳이란다. 호수엔 나룻배와 청둥오리 무리가 풍경에 그림이 되어준다. 호숫가 둘레길에는 벤치가 드문드문 놓여 홀로 생각에 잠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청리움 관계자는 “연수원이 들어서던 초창기에는 호수에 오리가 두 마리뿐이었지만, 이후 어디선가 날아온 청둥오리가 새끼까지 쳐 어엿한 무리를 이루게 됐다. 청리움이 풍수지리상 명당 터여서인지 오리뿐 아니라 청리움에 깃들여 사는 동식물 모두 ‘자손이 번창’하더라”며 웃었다.

◇풍수지리에 기반해 생태계 복원 중

청리움이 자리한 설악면은 현대의 풍수지리 학자들이 말하는 서울 근교의 승지(勝地)로 꼽힌다. 설악면에서도 보리산의 배산임수 명당터에 자리 잡았다는 청리움은 김진명의 소설 ‘풍수전쟁’(이타북스)에 영감을 주어 소설 속 무대로 등장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보리산과 장락산, ‘오하산방’, 구룡혈(九龍穴)터, ‘오하산인’ 등이 청리움 안팎에 실재한다. 등장인물 중 오하산방의 주인으로 나오는 ‘오하산인’은 청리움을 가꾸어 오고 있는 한컴 그룹 김상철 회장과 연결된다. 소설로만 치부하기엔 풍수지리적으로 의미가 깊다. 청리움 산책로 주변에는 다수의 풍수지리 전문가와 학자들이 명당터라고 해석한 안내판이 눈에 띈다.

기와지붕 위로 와송이 자라는 오하산방. 내부는 대관 용도로 활용하고 마당에선 이따금 소규모 행사들이 열린다. 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에서 해숙(김혜자 분)이 시어머니와의 사연을 풀어갈 때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오하산방' 기와지붕 위로 자라는 와송.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주변 감나무의 감을 따 말리는 풍경도 정겹다. 물론 장식용이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호수와 유럽풍 건물로 인해 첫인상은 유럽의 어느 소도시처럼 느껴지지만, 청리움은 한국적인 정서가 가득한 정원이다. 강당동 위쪽에 있는 금정당과 오하산방부터 시작이다. 순금으로 만든 솥이 있어 ‘금정당’이라 불리는 부엌, 정주(鼎廚)를 곁에 두고 안쪽에 자리한 오하산방은 기와집 형태의 아담한 한옥이다. 볕이 잘 드는 툇마루, 감이 대롱대롱 매달린 처마 등 소박미 넘치는 풍경에 보는 이마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기와 지붕 위로 자라는 와송(瓦松)도 볼거리다. 오하산방 역시 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의 배경으로 등장한 바 있다. 마당에선 이따금 전통 공연이나 다도 체험, 소규모 전통 혼례 등이 열린다. 오하산방 내부는 대관 위주로 운영하고 있다.

동굴 형태의 '대은당'은 담금주 박물관이다. 진귀한 담금주 100여 가지를 볼 수 있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산자락 길을 살린 산책로를 따라 위쪽으로 가면 ‘대은당’과 만난다. 동굴 형태의 담금주 박물관이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면 용 장생 도라지, 동충하초, 독활 등 귀한 약재를 담아 만든 담금주 100여 가지가 전시돼 있다. 청의 6대 황제인 건륭제 때의 술도 진귀한 볼거리다. “아담한 뜰 한쪽엔 3대째 내려오는 장 맛집의 장독을 통째로 옮겨 놓았다”는 장독대도 깨알같이 숨어 있다.

장독대의 장독마다 장이 담겨 있다. 청리움 관계자는 "한국 전통 가옥의 원형을 최대한 재현하기 위해 3대째 이어지는 장맛집의 장독을 그대로 옮겨다 놓았다"고 했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산책로는 두 개의 특별한 ‘밭’으로 이어지는데, 다음 계절을 기약하는 포도밭 위쪽의 녹차밭은 지리산 하동 어디쯤으로 순간 이동한 듯한 풍경을 선사한다. 해발고도 500m에서 쌀쌀한 날씨 속에 핀 하얀 차꽃이 반긴다. 북쪽 지역에서 녹차 꽃은 보기가 쉽지 않은데, 청리움에선 잘하면 11월 말까지도 차꽃을 볼 수 있다고. 사상체질 이제마 약초원도 지나칠 수 없다. 이제마가 쓴 사상체질의학 원전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바탕으로 국내 자생 약초 150여 종을 목·화·토·금·수 오행별로 분류해 꾸민 동산이다. 철이 지난 게 아쉽긴 하지만, 안내도에 나온 정보를 확인하고 나만의 약초를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세족탕 안쪽으로는 황톳길 맨발 걷기 체험 산책로가 나온다. 요가 등 프로그램 진행 공간으로 활용하는 산속 나무 덱이 명상하기 좋은 명당이다. 벤치에 앉으면 숲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머리 위, 나뭇가지에 매달린 윈드차임(풍경 종) 소리가 어우러져 무거웠던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다.

'청리움'의 설악녹차. 수확량이 많지는 않아 워크숍 프로그램의 하나인 찻잎 따기 체험이나 다도 체험 용도로 쓰인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11월 13일 하얀 차꽃을 피운 설악녹차밭. 날씨에따라 11월 말까지도 꽃을 볼 수 있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기도를 위한다면 풍수 명당 혈터를 찾아가 볼 일이다. 청리움 3대 명당 기도터 중 백색의 혈(穴)토가 나온다는 혈터엔 많은 이들이 다녀간 듯 소원지(무료)가 빼곡하게 걸려 있다. 이를 시작으로 숨은 명당 기도터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기도터마다 쌍둥 거북이상, 삼족 두꺼비상이 놓여 있어 찾기 어렵지 않다. 이어지는 동물의 숲에선 희귀한 사슴인 ‘백록’ 가족과 공작, 금계 등을 관찰할 수 있다. 청리움 측은 “산책로의 꽃마저도 김상철 회장이 직접 골랐을 만큼 각별한 애정을 담아 꾸며가는 곳”이라며 “보리산의 맑은 정기를 품은 공간에서 한국 전통 정원의 생태계를 복원해 가고 있다”고 했다.

'동물의 숲'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자운당'. 한국 정자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건축물이다. 연못의 비단잉어 무리가 그림 같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청리움 '동물의 숲'에서 볼 수 있는 백록.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일반 탐방의 경우 2시간 정도 둘러볼 수 있으며 일부 구역은 현재 시설 추가 조성 중으로 때때로 공사 소음이 발생할 수 있다. 탐방 외 ‘보리산 등산’ 선택지도 있다. 청리움 내 표지판을 따라 1시간 30분~2시간 올라가면 보리산 정상에 닿는다. 단체 대상 연수나 워크숍 프로그램 외에 절기나 계절에 맞춘 특화 프로그램도 별도로 신청받아 운영한다. 설악녹차 제다, 다도 체험, 기 체험과 명상 등을 비롯해 12월엔 김장 체험(홈페이지 별도 공지)이 기다린다. 일반 탐방은 방문일 전달 셋째 주 월요일 오전 10시에 네이버 예약을 통해 진행하며 예약 마감 후 취소가 있을 경우 순발력을 발휘한다면 탐방 신청이 가능하다.

◇싱잉볼, 음악 세러피 체험하는 ‘명상관’

한 줄기 빛이 스며드는 어두운 돔 안. 동그랗게 둘러앉은 이들이 요가 매트 위에 가부좌를 틀고 있다.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은 가방에 넣어두고, ‘치유 큐레이터’라 불리는 명상 전문가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집중하며 천천히 명상을 시작한다. “온몸에 긴장을 풀고,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가…. 천천히 몸을 땅에 내려두듯이 힘을 천천히 뺍니다.” 명상 시작 전, 손바닥에 떨어뜨려 준 에센셜 오일의 향 때문일까. 돔 안의 공기는 온통 상쾌하고, 머릿속은 시원하다. 뻣뻣했던 승모근이 말랑말랑해지는 듯하더니 주름질까 봐 잔뜩 추켜올리고 있던 눈꼬리도 축 처지는 기분이다. 치유 큐레이터의 안내에 따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모든 긴장이 풀리는 순간. 티베트 전통 명상 악기인 ‘싱잉볼(singing bowl)’ 소리가 돔 안에 은은하게 퍼진다. 소리의 파장에 집중하니 근심은 저 멀리 파장과 함께 소멸된다.

돔 천장에 스며드는 한 줄기 빛이 신성하게 느껴지는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의 명상관은 안도 다다오의 작품이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한솔문화재단이 운영하는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SAN)’의 명상관은 2019년 1월 뮤지엄 개관 5주년을 맞아 선보인 명상 체험 전용관이다. 힐링 여행지로 주목받으며 주말 체험의 경우 매회 선착순 마감을 알린다. 건축 거장 안도 다다오의 영감이 녹아 있는 돔 형태의 명상관은 명상의 밀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공간 내부 천장에는 중앙을 가르는 아치형 유리창이 있는데, 132㎡(40평) 돔 안으로 스며드는 한 줄기 빛에 의지해 명상에 빠져드는 색다른 체험을 해볼 수 있다. 유리창을 통해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을 감상하는 재미는 덤. 일반 명상 체험은 오전 10시 25분부터 40분 단위로 운영한다. 한 타임당 최대 25명 당일 매표소에서 선착순으로 발권 가능하다. 명상관에선 이 외 계절과 월별 주제에 맞춰 자연 소리 명상, 쉼 명상, 평온 명상, 음악 세러피 명상, 라이브 음악 등의 테마를 제공한다. 특히 라이브 음악의 경우 음원이 아닌 싱잉볼 연주가 곁들여진다. 일반 명상권은 기본권 2만3000원 포함, 대인 3만9000원.

이달 말까지 안토리 곰리의 '드로잉 온 스페이스'전이 열리는 '뮤지엄 산'의 '그라운드'. 사람 형상의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도 작품이 된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뮤지엄 산'의 '그라운드'에서 이달 말까지 열리는 안토니 곰리의 '드로잉 온 스페이스'전.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명상관에서 명상 체험 후 나서면 신라 고분을 모티브로 한 ‘스톤가든’이 기다린다. 지난 6월에 새롭게 선보인 상설 전시관 ‘그라운드(GROUND)’도 지나칠 수 없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에 현대 조각가 안토니 곰리의 작품이 함께하는 전시관은 건축과 예술, 자연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예술의 성소라 불린다. 돔 형태의 전시관은 커다란 동굴을 떠올리게 한다. 11월 말까지 열리는 안토니 곰리의 ‘드로잉 온 스페이스(Drawing on Space)’전은 우두커니 서 있거나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포함해 사람 형태를 한 조각의 여백 사이를 거닐며 사유하고 명상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 높이 8m 돔 안의 발걸음 소리가 크게 울려 때로 심장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고, 안토니 곰리의 의도처럼 조각 사이에 선 관람객이 작품의 일부가 되기도 하는 등 색다른 관람의 재미를 경험할 수 있다. 그라운드 역시 회차당 제한 인원이 있어 매표할 때 예약 필수다. 뮤지엄산 측에 따르면 안토니 곰리 전시가 끝나면 소장품전을 열 예정이다. 기본권에 명상관, 안토니 곰리관(그라운드)을 관람할 수 있는 ‘스페셜2’ 패키지 요금은 대인 4만9000원.

◇묵상의 성지 된 천주교 성지도

천주교 성지, 사찰 등 종교 시설도 명상과 사유, 묵상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다. 그중 경기도 화성 남양성모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무명의 교인이 순교한 성지이자 1991년에 한국 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 순례 성지로 선포된 곳이다. 건축 거장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웅장한 대성당은 건축 투어 코스로도 이미 널리 알려졌다. 전국 단위 신도와 성지 순례객 외 사색과 명상, 산책을 위해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건축 거장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대성당을 볼 수 있는 경기도 화성 '남양성모성지'는 천주교 순례 성지, 건축 투어 성지일뿐 아니라 묵상의 성지로도 인기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1991년에 한국 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 순례성지로 선포된 '남양성모성지'. 조용히 묵상하기 좋은 공간들이 속속 숨어 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소나무 아래 낙엽이 소복하게 깔린 '남양성모성지'.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단풍 절정기 때 소셜미디어에서 단풍 명소로도 큰 인기를 끌었던 남양성모성지엔 이제 낙엽 카펫이 기다린다. 미사가 열리는 주말보단 평일 늦은 오후쯤 찾아 조용히 거닐기를 추천한다. 대성당을 한 바퀴 돌아 ‘십자가의 길’에 접어들면 명상으로 향하는 지름길이 펼쳐진다. 낙엽 밟는 소리에 취해 걷다 보면 어느새 해 질 녘이다. 정각에 맞춰 대성당의 청명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생각의 숲에서 나와 잠시 꺼 두었던 일상의 알람을 다시 켤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