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권과 경인권 의대에 지원하려면 285점 이상을, 지방권 의대는 275점 이상.”
대학수학능력시험 다음 날인 14일, 각 언론사는 종로학원이 분석한 예상 합격선을 보도했다. 고득점자 대부분이 의대로 몰리는 추세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의사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 만큼 의대에 인재가 필요한 것은 맞지만, 고득점자가 의대로만 몰리는 작금의 상황은 우려스럽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공계에 진학하고 싶어질 만큼의 당근을 국가가 제공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더 근본적인 처방은 중·고교 과정을 통해 이공계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리라. 후자의 방법이 너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분이 계실까 봐 경험담을 이야기해본다.
단국대에서 의예과 학과장을 하던 시절, 학부모 한 분이 찾아왔다. “제 아들이 이번에 단국대 의대에 합격했는데, 자퇴한답니다. 어떻게 좀, 말려 주실 수 있을까요?” 어렵사리 의대에 들어왔다 해도, 스스로 그만두는 학생이 가끔씩 나온다. 단국대 의대가 지방에 위치해 있어 재수를 통해 수도권 의대로 옮기겠다는 게 그 이유. 그렇기에 난 학생 아버지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 아이가 재수해서 수학과에 간답니다!” 그분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아들이 둘 있는데, 큰아들은 수학을 좋아해 2년 전 서울대 수학과에 합격해서 잘 다니고 있다. 작은아들도 수학을 좋아해 단국대 의대와 연세대 수학과에 동시 합격했지만, 의사가 한 명 있었으면 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단국대를 택했단다. 그런데 의예과를 다니는 와중에도 수학에 대한 열정이 꺼지지 않아, 자퇴하고 다시 수능을 봐서 수학과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운다는 것.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애원했다. “작은아들이 의사가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수학을 좋아하는 아이의 꿈을 꺾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싶었지만, 결국 그 학생을 설득하기로 한 것은 의학에도 수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학생을 불러 말했다. “수학은 답을 찾아가는 방법을 고민하는 학문이지. 의학 역시 마찬가지야. 게다가 의학 과목 중에는 의공학이란 것도 있는데, 여기서 다루는 게 재활공학·생체역학·뇌신경공학 같은 거야. 수학자도 좋지만 훌륭한 의공학자로 이름을 날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내 설득이 먹혀서인지 그 학생은 자퇴하지 않았다. 그 학생이 졸업 후 어떤 진로를 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나눴던 얘기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학생 대부분이 싫어하는 수학을 평생 전공하겠다니 그 비결이 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으니까. “제가 상산고 나왔거든요. 형도 그렇고요.” 상산고는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에 있는 자율형 사립고. 그 학교가 수학의 요람이 된 건 학교 설립자가 ‘수학의 정석’을 쓴 홍성대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상산고 설립 계기도 ‘책으로 번 돈을 학생들에게 되돌려줘야 한다’는 책무감 때문이라는데, 그 포부에 걸맞게 홍 선생은 상산고가 자사고로 지정된 2002년 이후에만 700억원의 사재를 학교에 투자했다. 재학생의 90%가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수학과 과학에 관심 있는 학생을 위한 심화 과정은 방과 후 학생 자율로 선택할 수 있어 사교육은 별반 필요가 없다. ‘단지 수학이 좋아서 수학과에 가는 학생’은 이런 환경에서 만들어진다. 일전에 만난 상산고 재학생에 따르면 그 학교 학생들은 쉬는 시간에 서로 어려운 수학 문제를 내서 누가 잘 푸는지 배틀을 벌인다니, 놀라울 뿐이다. 물론 상산고도 시대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기에 성적 우수자 상당수가 의·치대로 진학하고 있지만, 학교 측은 명사 특강에 서울대 생명과학부 김빛내리 교수와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이석영 교수 같은 분을 초청해 의사 이외에도 다른 길이 있다는 걸 꾸준히 알리고 있다.
여기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자사고의 인재를 이공계로 유도할 방법을 모색하고, 자사고의 교육 시스템을 어떻게 하면 일반고에도 적용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좌파들이 장악한 대한민국의 선택은 어처구니없게도 상산고 죽이기였다.
시작은 2014년. 지방선거에서 자사고 폐지를 공동 공약으로 내건 진보 교육감이 우르르 당선됐다. 다음은 상산고가 속한 전북교육청 김승환 교육감의 말이다. “자사고 등 특권 교육을 폐지하고, 전북 교육 혁신 미래 교육을 구체화하는 데 힘쓰겠습니다.” 전국의 자사고는 5년마다 자사고 지위 유지 여부를 교육청의 평가에 맡겨야 했다. 2014년 첫 평가 당시 재지정 기준은 70점. 심의가 진행되는 동안 전교조와 좌파 시민단체는 ‘상산고를 지역으로 돌려달라’ ‘귀족 학교 폐지하라’ 등의 팻말을 들고 교육청에서 시위를 벌였다. 상산고는 80.1점을 획득해 자사고로 재지정됐지만, 2017년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자사고를 일반고로 전환시키겠다는 ‘고교 서열화 해소 정책’을 발표한다. 상산고의 2차 평가가 있던 2019년, 재선된 김승환 교육감은 재지정 점수를 자사고 중 유일하게 80점으로 올린다. 형평성 논란이 제기되자 교육평론가 이범은 라디오에서 “교육감의 고유 권한”이라며 이를 일축했고, “낙후된 전북에서 상산고가 자존심을 세우는 역할을 한다”는 앵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저는 전북이 그렇게 낙후된 지역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바람에 상산고는 79.61점으로 자사고 중 가장 높은 점수를 얻고도 0.39점 차이로 자사고 지정이 취소될 위기에 처한다. 재학생과 학부모가 분노했고, 세간의 여론이 들끓었다. 여론의 눈치를 본 여야 의원 151명이 지정 취소에 반대한다며 교육부를 압박해준 덕분에 상산고의 자사고 지위는 가까스로 유지됐지만, 이런 비교육적인 행태가 교육 현장에서 버젓이 자행되는 광경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아직 이재명 정부는 자사고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이 없지만, 평소 성향으로 봐 우려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에게 홍성대 선생의 다음 말을 전해 드린다. “국가 주도 획일적 교육은 획일적 사회를 낳는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도 경쟁력을 갖춘 다양한 인재 육성에 힘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