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실존적 질문은 젊은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생활고에 시의 뮤즈마저 떠나버린 캄캄한 나날, 릴케가 간절히 필요로 한 것은 어두운 길을 비춰줄 등불이었다. “사람마다 어딘가에 스승이 있고 그 스승에게는 또 제자가 있다.” 이런 믿음 하나로 그는 기다렸다. 그리고 운명처럼 근대 조각의 거장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을 만나게 된다. 로댕과의 교류는 삶과 창작에 대한 릴케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며 괴테 이후 가장 위대한 독일어권 시인으로 평가받는 결정적 전환점이 된다.
◇움직여라, 영감을 기다리지 말라
1902년 봄, 독일의 예술가 공동체 보릅스베데에 머물던 릴케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보낸 이는 독일 출판인 리하르트 무터. 로댕 평전을 써달라는 요청이었다. 제안을 받아들인 릴케는 그해 8월 28일 파리로 향했다. 릴케의 아내이자 조각가인 클라라 베스트호프의 역할이 컸다. 결혼 전 로댕의 파리 아틀리에에서 조각을 배웠던 클라라가 옛 스승에게 남편을 소개하는 편지를 썼고, 릴케에게는 로댕의 예술 세계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출발 전 릴케가 로댕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존경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당신의 예술은 고통의 길을 걸으며 창조적 삶의 최고 목표인 영원의 빛줄기만을 갈망하는 모든 예술가에게 빵과 황금을 줄 거라는 것을 압니다.” 1902년 9월 1일 스물일곱의 릴케는 예순두 살의 로댕을 처음 마주한다. 시집 몇 권을 냈지만 이름 없는 시인이었던 릴케와 달리, 로댕은 파리 만국박람회에 개인관을 열 정도의 세계적 거장이었다. 나이·국적·분야도 달랐던 두 예술가는 그러나 서로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날 릴케의 감동은 아내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상상했던 것보다 키는 작았지만 훨씬 더 강인하고 친절하며 고결했소… 그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소.”
젊은 시인의 열정은 로댕의 마음을 움직였다. 릴케가 넉 달 동안 자신의 작업실에 자유롭게 드나들며 창작 과정을 지켜보도록 허락한 것이다. 파리 교외 뫼동의 언덕에 있는 로댕의 작업실에 첫발을 들인 릴케는 폭풍 한가운데 내던져진 듯한 충격을 받는다. 그곳은 고요한 사색의 공간이 아니라 치열한 노동의 현장이었다. 무엇보다 릴케의 눈길을 사로잡은 장면은 로댕의 작업 방식이었다. 점토를 다루는 손의 부단한 움직임, 돌을 쪼며 빛을 포착하려는 끊임없는 시도…. 로댕은 자신의 육체를 도구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영감을 기다리며 고뇌하는 천재가 아니었다. “나는 돌 깎는 장인일 뿐”이라는 자평처럼, 로댕은 반복적인 육체 노동에 온몸을 던진 일의 화신이었다.
심지어 식사 중에도 일하는 거장의 모습은 영감 고갈로 고통받던 릴케에게 큰 충격을 줬다. 그는 그동안 시적인 영감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글을 써왔다. 매일 아침 불안한 기다림 속에서 일어났고, 밤이 되면 자신의 무능력에 실망하고 패배감을 안은 채 잠자리에 들곤 했다. 그러나 창작할 수 없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로댕의 해결책은 감정 상태와 무관하게 매일 일하는 것이었다. 영감이 충만해서 작업하는 게 아니라 작업함으로써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다. 창작의 샘이 말라버렸다고 느낀 릴케는 로댕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로댕은 그 유명한 조언을 건넸다. “계속 일하시오.” 영감 없이도 창조할 수 있는 작가가 되는 법, 그것이 바로 릴케가 로댕에게서 받은 가장 위대한 선물이었다.
◇시인, 조각가의 비서가 되다
이듬해 3월 릴케는 로댕을 관찰하고 연구한 경험을 바탕으로 평론집 ‘오귀스트 로댕’을 출간했다. 이 책은 당대 예술 비평의 관행을 흔든 혁신적 시도였다. 릴케는 작가의 생애를 따라가는 전기적 일화나 도상학적 분석, 인물 중심의 서술 방식을 거부했다. 그가 창안한 비평적 태도는 비평가가 해석자가 아니라 작품을 함께 느끼는 자가 돼야 한다는 그의 미학적 신념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릴케는 로댕의 걸작 ‘생각하는 사람’을 통해 추상적 개념인 사유를 신체와 물리적 힘으로 구현해낸 방식을 조명한다. “그는 행위하는 인간의 모든 힘(이것은 행동하는 사람의 힘이다)을 기울여 생각하고 있다. 그의 몸 전체가 두개골이며 혈관에 흐르는 피는 뇌수가 됐다.” 생각이 정신적 작용이 아닌 육체적 행위임을 보여주는 글이다.
1905년 여름, 릴케가 쓴 평론집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읽은 로댕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최고의 해석이라고 극찬했다. 릴케에게 편지를 보내 비서직을 제안했고, 릴케는 급여와 숙소를 제공받으며 로댕 곁에서 일하게 됐다. 하루 2시간 근무라는 초반의 합의는 현실과 거리가 멀었고 불완전한 프랑스어 실력은 릴케에게 큰 부담이 됐다. 그러나 로댕의 일상과 창작 현장을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릴케는 로댕 조각의 핵심이 해부학적 묘사를 넘어 신체 언어를 통해 내면의 삶을 형상화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로댕은 인간의 형태를 조형한 게 아니라 인간의 제스처를 조형했다”고 썼다. 로댕도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게 목표였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런 로댕의 예술 철학은 그의 초기작 ‘코가 깨진 사내’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이상화된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너무 사실적이라는 이유로 당시 파리 살롱에서 탈락한 작품. 릴케는 오히려 그런 비난이 작품의 혁신성과 진실성을 증명한다고 봤다. “이 얼굴은 삶에 어루만져진 적이 없고, 오히려 삶에 의해 수없이 얻어맞은 얼굴이었다. 무자비한 손길이 휩쓸고 물어뜯는 소용돌이 속에 처박힌 듯한 이 얼굴은 운명 속에 가둬진 듯 보였다.” 릴케는 비서로 일하며 로댕의 조각 안에서 삶의 실체와 인간 존재의 본질을 꿰뚫는 안목을 길렀다. 두 사람은 예술과 삶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눴다. 로댕은 릴케에게 “잘 자게”라는 인사 대신 “힘내게”라고 용기를 불어넣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토록 가까웠던 두 사람의 관계는 1년 만에 뜻밖의 사건으로 급작스레 무너졌다.
◇이별, 그리고 재회
릴케가 로댕의 허락 없이 그의 지인 중 한 명인 후원자에게 짧은 편지 한 통을 보낸 일이 문제가 됐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로댕은 이를 신뢰 위반으로 판단하고 릴케를 해고한다. 릴케는 그날로 뫼동의 저택에서 쫓겨났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08년을 기점으로 극적으로 회복된다. 계기는 파리 중심가에 위치한 버려진 고택 비롱(Hotel de Biron)의 발견이었다. 1907년 릴케의 아내는 저택의 한 공간을 작업실로 쓰기 시작했고, 이듬해 릴케도 그곳의 방 하나를 빌려 지내게 됐다. 로댕이 이 고택을 마음에 들어할 거라고 생각한 릴케는 곧바로 로댕에게 편지를 썼다. 릴케의 다정한 초대는 로댕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해 가을 로댕은 릴케가 머무는 비롱을 방문했고, 한눈에 건물에 매료된 로댕은 1908년 10월 비롱 1층의 방 4개를 임차해 자신의 작업실로 꾸몄다.
이 과정에서 릴케가 보여준 세심한 배려에 로댕은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릴케는 참으로 충직한 제자”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1917년 11월 17일 릴케는 베를린에서 로댕이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로댕의 죽음에 따른 충격과 슬픔을 이렇게 적었다. “당신도 나처럼 추억과 슬픔에 잠겨 파리와 그 안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과 함께 최종적인 상실을 겪어내야 할 것이오.”
릴케는 로댕의 예술 세계를 가장 깊이 이해한 비평가로 남았다. 특히 독일어권에서 그의 저술과 강연은 로댕을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로댕은 릴케에게 ‘보는 법’과 ‘일하는 법’이라는 예술의 두 기둥을 가르쳤다. 릴케는 로댕을 “단 하루의 노동과도 같은 삶을 산 고독하고 근원적인 힘”이라고 기록했다. 예술적 통찰과 엄격한 작업 정신은 릴케의 작품 전반에 스며들어 그를 20세기 대표 시인 중 하나로 성장시켰다. 내년에는 릴케 작고 100주년을 맞아 스위스에서 ‘릴케가 본 로댕’ 전시회가 열린다. 릴케와 시각 예술의 생산적 관계를 재평가하는 자리다.
훗날 비롱 고택은 ‘로댕 미술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912년 철거 위기 속에서 로댕은 이 건물을 미술관으로 보존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작품 전부를 국가에 기증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렇게 1919년 문을 연 국립 로댕 미술관은 세계에서 로댕의 조각품을 가장 많이 소장(약 6600점)한 장소, 동시에 두 예술가의 이야기를 담은 살아 있는 공간이 됐다. 건물 한쪽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로댕에게 이 저택을 소개했고, 1908년부터 1911년까지 이곳에 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