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한상엽

1948년 12월 반국가 단체 조직과 활동을 처벌하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자, 형무소에는 수감자들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당시 전국 형무소 수감 능력은 1만5000명에 불과했는데 수감 인원은 무려 4만명, 그중 80%가 국가보안법 위반자였다.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면 남조선 각 지방에서 100만이 들고일어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통일할 수 있다”고 허풍을 떨었다. 남한 대공 당국이 파악한 것처럼 남로당원을 20만명으로 잡더라도, 남로당원과 그 부역자들을 모두 처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에 따라 정부는 전향한 남로당원에게 처벌 대신 ‘반공 국민’으로 거듭날 기회를 주기로 하고, 1949년 6월 5일 공안검사 오제도·선우종원, 서울시경찰국장 김태선 등 검찰과 경찰의 공안통 주도로 국민보도연맹을 출범시켰다. ‘소식을 알린다’는 ‘보도(報道)’가 아니라, ‘보호하여 지도한다’는 ‘보도(保導)’였다. 보도연맹은 한때 남로당의 꾐에 빠져 반인륜·반민족·반국가 범죄를 저지른 자라 할지라도, 과오를 시인하고 전향하면 ‘보호’하고 ‘지도’하겠다고 약속했다. ‘빨갱이’로 낙인찍혀 사회적으로 사망한 것이나 진배없었던 남로당 잔당들에게는 눈물 나도록 감격스러운 갱생 기회였다.

1950년 5월 12일 발급된 조두규의 ‘국민보도연맹 맹원증’. 1949년 10월부터 주민등록증의 전신인 ‘도민증’이 발급되기 시작했지만, 남로당 전향자에게는 도민증 대신 국민보도연맹 맹원증을 발급했다. /국가기록원

가맹 절차도 간단했다. 보도연맹 본부나 지부를 찾아 가맹 원서와 이력서, 그리고 ‘양심서’를 제출하고 대한민국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칠 것을 맹세하는 문서에 지장만 찍으면 그만이었다. 양심서에는 자신이 연루된 좌익 세포 조직 구성원의 이름을 빠짐없이 적어 내야 했다. 일반적으로 5~10명의 세포원을 자백했다. 공안 당국은 양심서를 교차 검증해 ‘위장 전향자’를 걸러 내고, 지하로 잠적한 남로당 잔당을 체포할 단서를 얻었다.

‘양심서’ 한 장 제출했다고 정부가 남로당 부역자들을 곧바로 ‘건전한 국민’으로 대우한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1949년 10월부터 주민등록증의 전신인 ‘도민증’을 발급하기 시작했는데, 보도연맹 맹원들에게는 도민증 대신 ‘보도연맹원 맹원증’을 발급했다. 맹원증은 한편으로는 ‘전향자 증명서’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요시찰인 증명서’였다.

보도연맹은 결성 직후부터 궐기대회, 강연회, 웅변대회, 문화 공연 등을 주최하며 반공·멸공 운동의 선봉에 섰다. 매주 금요일에는 형무소를 찾아, 한발 앞서 대한민국 품에 안긴 선배로서 미전향 남로당원들에게 전향하라고 설득했다. 1949년 초부터 각 신문 1면에는 “남로당원으로서 저지른 흉악무도한 살인·방화·파괴 등 범죄 행위를 반성하고, 남로당에서 탈당해 이제부터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한다”는 ‘탈당 성명서’가 줄을 이었다. 공안 검사 선우종원은 회고록 ‘사상검사’(2002)에서, 6·25전쟁 이전까지 신문 광고로 공개적으로 탈당 의사를 밝힌 남로당원이 20만명이 넘었고, 이러한 광고를 얻으려고 각 신문사 광고부 직원들이 몰려들어 검찰청은 늘 북적였다고 회고했다.

정부는 1949년 10월 25일부터 31일까지를 ‘남로당원 자수 주간’으로 선포했다. 자수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11월 말까지로 기한을 연장했다. ‘자수 주간’ 37일 동안 보도연맹 서울 본부에 1만2000여 명, 지부에 4만여 명이 자수했다. 그에 따라 보도연맹 회원 수는 30만명으로 늘어났다.

1949년 2월 일간지에 실린 남로당 탈당성명서 광고. 내용은 이렇다. “해방 후 사상의 혼란과 천학(淺學) 혹은 무식한 소치로 좌익계열의 기만 선전에 승용(乘用)되어 남로당에 입당하여 맹종하였음은 실로 비(非)국가·민족적임을 각성 회오하며 더욱이 남로당이 흉악무도한 모략과 수단을 취해 살인·방화·파괴 등 경향 각지에 동족이 생명 재산을 약탈함을 볼 때 천인 공히 용사(容赦)치 못할 죄악이며 비분을 금치 못하는 동시에 오등(吾等)은 금후 남로당을 탈퇴하며 그 말살에 적극 협력하고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함. 논산군 은진면 남산리 이석산 외 174명.”

‘자수 주간’을 계기로, 김일성이 직파한 ‘거물 간첩’ 정백이 자수해 보도연맹 명예간사장에 임명됐다.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됐던 원장길(강릉), 김영기(안성), 김익노(영일) 등 현직 국회의원 3명도 자수했다. 11월 6일 보도연맹원 3000여 명이 세종로 광장에서 도열했을 때, 김익노 의원은 맨 앞줄에서 행진했고, 맹원 대표로 연단에 올라 연설했다. 정부는 ‘전향하면 대한민국 국민으로 품겠다’는 약속을 지켜, 1952년 김영기를 경기도 지사에 임명했다. 김익노는 자유당에 입당해 경북 영일(포항)에서 내리 4선했다.

국문학자 양주동이 이끌던 보도연맹 문화실에도 거물급 예술가들이 속속 합류했다. 모더니즘 시인 정지용은 오랜 문우(文友) 임화의 요청으로 해방 후 남로당 계열 문학 단체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해 시 부문 위원과 아동문학 위원장을 역임했다. 좌익 단체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1949년 9월 그의 작품이 중등 교과서에서 모두 삭제되자, 정지용은 전향 성명을 발표하고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나는 소위 야간 도주하여 38선을 넘었다는 시인 정지용이다. 월북했다는 소문에 내가 동네 사람에게 빨갱이란 칭호를 받게 되었다. 앞으로는 국가에 도움 되는 일을 해볼까 한다.”

약속대로 정지용은 6·25전쟁 이후 납북될 때까지 보도연맹 문화실장으로 반공 선전 활동에 앞장섰다. 평남 대동군 지주 집안 출신으로 1946년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월남한 신진 소설가 황순원은 작품 발표 지면을 얻기 위해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과오’를 씻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훗날 시사만화 ‘코주부’로 ‘국민 만화가’ 반열에 오르는 김용환도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했던 좌익 경력을 지우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1950년 6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맹원 2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국민보도연맹 창립 1주년 기념식 및 탈맹식’이 거행됐다. 오제도 검사는 “1년 동안 많은 맹원들이 완전히 사상 전향을 했고, 보도연맹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을 만큼 완전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다”며 그간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공산당 타도’에 공을 세운 맹원 6928명은 탈맹해 완전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이렇듯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불과 20일 후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정반대로 돌변했다. 보도연맹 회원 명부는 그 자체가 완벽히 정리된 ‘반국가 세력 명부’, ‘빨갱이 명부’였다. 인민군에 쫓겨 피란길에 오르면서 각 지역 군경 책임자들은 ‘좌익 전향자’의 처리를 놓고 고심에 빠졌고, 전국에서 이들을 향한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 일부 역사학자는 ‘보도연맹 학살 사건’에서 적어도 10만~20만명, 많게는 30만명까지 학살됐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전체 희생자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단서를 단 채, 진상 규명 신청자 중 총 4934명을 희생자로 확인했다.

<참고 문헌>

김경미, ‘단정 수립 후 전향 장치와 전향자들의 내러티브’, 반교어문학 제34집, 2013

선우종원, 사상검사, 계명사, 2002

이순욱, ‘국민보도연맹 시기 정지용 시 연구’, 한국문학논총 제41호, 2005

정병준, ‘한국전쟁 초기 국민보도연맹원 예비검속·학살 사건의 배경과 구조’, 역사와 현실 제54집, 2004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 사건’,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