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강 중인 대학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박정해(25)양.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4학년. 지난 학기 내 강의를 들었었다. 마침 중간고사가 다 끝났다기에 차 한잔했다. 에피소드가 있다. 성(姓)이 박씨고 우리말도 유창한데 출석부 비고란에 외국인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산둥성 칭다오(靑島) 태생. 산둥사범대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하다 3학년 때 한국어 시험 최고 등급을 받고 장학생으로 편입했다. 가족관계를 물었다. 밀양 출신 증조부가 20세기 초반에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두만강 저편 동북 3성에 남았으나 일을 찾아 남쪽으로 더 내려가 터전을 잡았다고. ‘고요한 바다’라는 뜻의 정해(靖海)라는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주셨다. 실제 모습도 차분하고 지적이다. 그런데 집에서는 중국어만 썼다고 한다. 자신이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왔고 한국인 혈통임은 별로 의식하지 않았다.
그러다 TV 속에서 한국의 모습을 자주 접했고 어떤 힘에 이끌린 듯 유학길에 올랐다. 그런데 이 땅에서 자신을 향한 조선족이란 호칭에 당황스러웠다고. 한민족계 이주민 후손으로 형성된 소수민족을 일컫는 용어인데, 막상 정해는 조선족이란 말을 중국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은근히 차별하는 시선과 분위기도 마뜩잖았고 말이다. 미국·일본 교포들에게는 동포나 한인 2·3세라는 용어를 쓰는 것과 비교하면 속상하다고.
정해는 요즘 심란하다. 반중(反中) 정서 때문이다. 최근 중국인들이 고깃집에서 침 뱉고 흡연하며 소란을 피웠다는 뉴스를 보고 부끄러워 혼났다. 중국 현지 TV에서 늘상 캠페인을 벌여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공공장소에서 소리 크게 지르고, 지저분한 옷차림과 몰상식한 행동이 다반사다. 상대적으로 한국이 공중도덕·시민의식이 높다는 방증으로 여긴다. 그러면서도, 명확한 근거 없는 ‘중국 음모론’으로 반중 정서가 커질까 봐 걱정이다. 부정선거 관여? 이런 건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심각한 사태다. 사실이 아니길 바랄 뿐.
한류(韓流)나 한한령(限韓令·한류 제한령)에 대해선 어떨까. 소학교 때 재밌는 한국 드라마를 봤다고 한다. ‘황금 무지개’. 남매 간의 사랑과 가족애, 그리고 정의감이 생생하게 그려져 감동을 받았다. 한국이 미디어 산업에서는 확실히 앞선다고 평가한다.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사태 이후 중국이 한국 대중문화를 제한하고 있는 점은 어떻게 보는지? “한국인들이 중국을 생각할 때 간과하는 점이 있어요. 보통의 중국인은 대체로 정부의 정책을 따르는 사회주의 국가 국민이에요. 최고 지도층에 반기를 드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죠. 당국은 한국 아이돌 그룹의 춤·노래·의상 등이 건전한 풍속을 해친다고 하는데, K팝 위상이 너무 높아 걱정하는 측면도 있을 거예요.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믿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관세·희토류 등 갈등에 대한 입장은? “글로벌 시장으로 나오라고 한 게 미국 아닌가요? 중국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힘이 세지니까 이젠 제재를 가하는 거잖아요.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중국 영향력이 훨씬 크다고 들었습니다. 공정하게 선의의 경쟁을 하면 되지 않을까요?”
한국에 살아 보니 중국에 비해 어떤가? “물가가 비쌉니다. 20~30% 정도. 제일 좋은 건 역시 화장품이에요. 올리브영은 최고! 음식을 빼놓을 수 없죠. 돈가스마요김밥, 참 맛있어요. 교통과 배달은 중국이 편해요. 의외죠? 중국은 휴대전화 하나만 있으면 대중교통을 탈 수 있어요. 한국에서도 휴대폰으로 지하철·버스 이용이 가능하지만 외국인은 제약이 따르거든요. 중국 배달 앱은 최소 주문 금액이 낮거나 없어 매장보다 저렴한 경우가 많은데, 한국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할까, 대형 배달 플랫폼 횡포가 심하잖아요. 배달 대신 식당을 찾게 되고 공부 시간을 뺏겨요.”
맺으며 한 말은 ‘관시(關係)’. 그냥 관계가 아니라 인맥·신뢰·네트워크를 뜻한다고. “중국인은 믿음⸱의무⸱친밀감, 이런 단어를 좋아해요. 때로 ‘인맥 중심의 결정’처럼 안 좋은 의미로도 쓰이지만요. 조심스럽지만, 한국 대학생들이 개인적⸱이기적이란 느낌을 받곤 합니다. 조별 과제에 외국인 학생이 끼면 충분히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아쉽더라고요. 학점 부담 때문이겠지만 한국은 정(情)의 나라잖아요. 나라 사이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관시 대목에서 그동안 무심코 써왔던 안미경중(安美經中)을 떠올렸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혹여 중국 입장에서는 관시는 제쳐 두고 건조한 원칙과 규약을 앞세우며 비즈니스에만 집중하는 모습으로 비치진 않았을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1년 만에 한국을 다녀갔다. 황남빵이 맛있다며 하오츠(好吃)를 연발했다고 한다. 그의 말마따나 두 나라는 ‘이사 갈 수 없는 이웃’이다. 움츠렸던 한중 우호 분위기가 되살아났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