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인 엔비디아가 지난달 31일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린 영상 ‘한국의 다음 산업혁명(Korea’s Next Industrial Revolution)’은 이틀 만에 조회 수 50만회를 넘겼다. 3분 16초 분량인 이 영상의 내레이션은 “대한민국,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나라”로 시작해 “기적이 계속되는 바로 이곳, 한국에서”로 끝난다. 이뿐만 아니다. APEC 참석차 방한한 백악관 대변인은 인스타그램에 한국 화장품 쇼핑 인증샷을 올렸고,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서울에서 ‘치맥’과 ‘소맥’을 즐기며 “한국 치킨은 세계 최고”란 말을 남겼다.
소셜미디어와 인터넷 커뮤니티는 들썩였다. “이왜진(이게 왜 진짜?)” “하루아침에 강대국이 된 기분”…. 특히 “국뽕이 차오른다” “국뽕이 치사량”과 같은 표현들도 적잖이 눈에 띄었는데, 본래 비아냥의 표현이었던 ‘국뽕’이 최근엔 긍정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조롱 표현이 놀이 코드로
2010년대 초반 등장한 신조어 ‘국뽕’은 ‘국가’와 ‘필로폰’의 합성어로, 국가에 대한 자긍심에 과하게 도취한 상태를 비꼬는 표현이었다. 억지 감동을 강요하는 애국 영화나, 외국의 작은 관심과 칭찬에도 호들갑을 떠는 이들에겐 어김없이 ‘국뽕’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용례가 달라졌다. 한국 관련 영상을 올리는 인스타그램 계정 운영자 20대 김모씨는 “손흥민 선수, BTS, 봉준호 감독 등의 영상을 올리면 댓글이 수십, 수백 개씩 달리는데, 상당수가 ‘국뽕에 취한다’고 한다”며 “그냥 한국인이라서 벅차고 뿌듯할 때 쓰는 유머러스한 표현”이라고 말했다.
많은 이가 이를 놀이처럼 즐기고 있다. ‘국뽕’을 주제로 하는 한 오픈채팅방(익명 채팅 서비스)에서는 “요즘 우리나라 폼 미쳤다” “오늘도 국뽕 한 사발 했다”는 감탄부터 “독일에 있는데 여기서 스트레이키즈(아이돌 그룹)는 신” “외국인들이 나보다 한국 문화를 더 잘 알더라”는 경험담이 매일 이어진다. 외국인들이 K콘텐츠를 즐기는 장면을 담은 이른바 ‘해외 리액션’ 영상도 인기다. K팝 무대를 보는 한 해외 리액션 영상에는 “외국인도 똑같이 느낀다니 뭔가 기쁘다” “빛나는 대한민국 인재들 사랑합니다” 등의 댓글이 달렸다. 높은 수준의 치안, 편리한 교통, 빠른 인터넷, 깨끗한 거리 등도 흔히 언급되는 소재. ‘김구 선생님, 보고 계시죠?’ 밈(meme)도 유행이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란 말을 남긴 김구 선생을 소환해, ‘케이팝 데몬 헌터스’ 흥행이나 한강 작가 노벨상 수상, K팝의 세계적 인기 등 최근 한국 문화의 성취를 자랑하는 식이다.
가벼운 놀이처럼 보이지만, 이면에는 달라진 정서가 있다. 외국계 회사를 다니는 황모(33)씨는 “외국인 동료들이 한국을 ‘힙한 나라’로 생각하는 게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지금은 뿌듯하다”며 “예전엔 ‘우리나라가 좋다’고 말하는 게 민망하고 촌스럽게 느껴졌는데, 요즘은 당당히 말해도 괜찮다는 분위기가 생긴 것 같다”고 했다. 자영업자 신모(62)씨는 “지인들과의 단체 채팅방에 엔비디아 영상을 올렸더니 ‘요즘 뉴스 볼 맛 난다’, ‘살면서 이런 장면을 보게 될 줄 몰랐다’는 반응이 쏟아졌다”며 “한국이 잘하고 있다는 기사나 영상을 찾아서 공유하는 친구들이 최근 눈에 띄게 늘었다”고 말했다.
◇눈에 보이는 성취가 변화 낳았다
과거엔 외국인에게 “두 유 노(Do you know) ○○?”라고 묻는 장면이 조롱의 대상이 되곤 했다. 한국인이 외국 유명인에게 “두 유 노 김치” “두 유 노 강남스타일”을 질문하는 모습이 반복되자 “인정을 구걸하는 것 같다” “민망하다”는 반응이 뒤따랐다. 지금은 다르다. 한국 문화가 세계적 인기를 얻고 여러 분야에서 한국인들이 두각을 보이자, 굳이 “두 유 노?”를 외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른바 ‘두 유 노 클럽’은 이제 한국을 빛낸 인물과 콘텐츠를 묶어 회자하는 유머로 소비된다.
실제 개인이 국가에 대해 갖는 긍정적 감정인 ‘국가 자부심’ 지표도 높아지는 추세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사회 통합 실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인 것이 자랑스럽다’는 응답은 2014년 72.9%에서 지난해 84.48%로 상승했다. 국무조정실이 7월 발표한 국민 인식 조사에서도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인식하는 국민 비율이 27.8%로, 10년 전(8.2%)보다 크게 늘었다. ‘우리 역사가 자랑스럽다’는 응답도 90.6%였다.
전문가들은 최근의 ‘국뽕’ 현상이 실제 성취에서 비롯된 자부심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K콘텐츠 흥행, 글로벌 기업들의 관심, 외국인 관광객 증가 등 가시적인 성과가 쌓이면서,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라며 “다만 과도해져 국수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경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