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온수를 마음껏 쓰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는 일주일에 한 번 대중목욕탕에 갔다. 갈 때마다 한 주간 쌓인 때를 최대한 벗기고 와야 했기에 목욕을 끝낸 내 손가락 끝은 라면처럼 쭈글쭈글했다. 가끔 손가락 끝에 라면이 보이지 않는 날엔 덜컥 걱정됐다. 목욕하고 귀가할 때면 엄마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내 손목을 문지르셨기 때문이다. 밀려나오는 게 없다면 합격. 그러지 않는다면 불합격. 부실하게 씻고 온 날이면 비공식 ‘때 감별사’인 엄마는 어김없이 말씀하셨다. “다음엔 더 ‘매매’(열심히, 빡빡) 씻고 온나.”
성인이 되고 나서는 자발적으로 대중목욕탕에 가본 적이 없다. 집에서 매일 하는 샤워로 충분했고, 가끔 시급할 때만(!) 때를 밀었다. 하지만 요 며칠, 잃어버린 가을을 애통해하다 보니 절로 온탕 생각이 났다.
안 그래도 우리 동네에는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새겨진 대중목욕탕이 있다. 하지만 어쩐지 덥석 가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인터넷 검색부터 해봤다. 아쉽게도 매장 정보는 업데이트돼 있지 않았고 이용 시간과 휴무일, 요금 정보도 없었다. 다만 방문자 후기가 두어 개 달려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예전 그대로예요.”
좋다는 얘길까, 안 좋다는 얘길까. 일단 가보는 수밖에. 주머니에 지폐 두 장을 고이 품고 속옷과 목욕용품을 챙겨 목욕탕으로 향했다. 출입문 안으로 들어서자, 안내 창구 앞에 ‘목욕 12,000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창문 너머로 계산을 하니 어르신께서 주황색 수건을 두 장 건네주셨다. 어렸을 때는 수건도 챙겨갔던 것 같은데, 두 장이나 받다니 다행이었다.
목욕탕은 낡은 외관처럼 내부도 정겹기 그지없었다. 출입문 너머에는 아코디언 같은 미닫이문이 달려 있었는데 드르륵 여니 목욕을 마친 사람들이 몸을 말리고 있었다. 욕장 입구에는 입식 스테인리스 선풍기가 서 있었고, 한쪽 벽면에 붙은 거울 아래 화장대 위에는 동전을 넣어 사용하는 헤어드라이어가 놓여 있었다. 벽에는 줄 끝에 플라스틱 고깔이 붙은 벽걸이 선풍기가 돌고 있었다. 응답하라, 그때 그 시절! 마치 시간 여행을 온 것만 같았다.
얼른 욕장으로 들어가 샤워하고, 머리를 감고, 온탕 앞에 섰다. 대중목욕탕에 와서 가장 설레는 시간.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오는 탕에 살짝 발가락을 집어넣자, 살이 데쳐질 듯 뜨거웠지만 조금만 견디면(!) 익숙해질 것 같았다. 쭈뼛쭈뼛 들어가 몸을 담그고 가장 편한 모서리를 찾았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안정적인 자세를 만들고 나니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오랜만에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온몸의 근육이 액체가 되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느낌. 곧이어 마음속 응어리까지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 이거지. 이 맛에 목욕탕 오지.
따뜻한 물은 마음도 덥힌다. 업무 중간에 호로록 마시는 차 한 잔이 그렇고 한겨울, 공중화장실 세면대에서 무심히 흐르는 온수가 그렇다. 싸늘해진 날씨에 푸석거리는 마음에는 온수가 좋다. 묵은때를 씻어 주고, 몸의 긴장을 풀어주고, 올겨울도 잘 한번 버텨 보자고 마음을 다잡게 한다.
내내 연탄을 때던 집에 처음으로 가스보일러가 들어온 날을 기억한다. 목욕할 때마다 가스레인지에서 물을 끓여서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감보다 고마움이 먼저 흘렀다. 어린 마음으로도 알았다. 따뜻한 물은 고마운 거라는 걸. 몸보다 마음을 먼저 데워준다는 걸. 그만큼 귀한 것이라는 걸. 오랜만에 찾은 대중목욕탕에서 그 시절 마음을 다시금 만났다.
목욕을 마치고 벽거울 앞에 서니 얼굴이 고구마 껍질처럼 붉었다. 아까 받아온 수건으로 몸을 닦고 머리에 물기를 털어내고, 벽에 붙은 선풍기 끈을 당겨 머리를 말렸다. 선반 위에는 목욕탕에서만 볼 수 있는 플라스틱 통에 든 스킨과 로션이 놓여 있었다. 뚜껑을 열어 열기가 남은 얼굴과 몸에 찹찹 바르니, 강한 화장품 냄새가 목욕탕 가득 퍼졌다.
가뿐한 마음으로 체중계에 올라가 보았다. 하지만 또 한 번의 인생 (최고) 몸무게를 목격하고 충격에 휩싸여 서둘러 내려왔다. 왜 나의 몸무게는 잴 때마다 최고치를 경신하는가. 찬바람을 좀 쐬야 할 것 같아 후다닥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충분히 데워진 몸은 가을 저녁 바람에 당당히 맞설 수 있었다. 무심코 두 손바닥을 펴 보니 열 손가락 끝에 착실히 라면이 붙어 있었다. 어느덧 어른인 나는 엄마 대신 스스로 합격점을 줄 수 있었다. 오랜만의 목욕탕 나들이는 성공, 그리고 합격이었다.
대중목욕탕 나들이의 백미는 역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늘 밤만큼은 안 씻어도 된다는 사실조차 만족스러웠다. 따끈한 마음을 끌어안고 어둑한 길을 걸었다. 하염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저녁으로 뭘 먹을지 궁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