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마주친 돌탑 아래 돌멩이 하나 주워 소원 하나 보탠다. 간절한 염원이 차곡차곡 쌓인 돌탑(소원탑)은 오래 전부터 인류가 남겨온 흔적이자 기복신앙의 산물이다. 단풍과 어우러진 돌탑이 이색 건축 작품처럼 포토존으로 떠오르는 시대, 곧 입시·인사 시즌이 이어지는 시기이기도 해 기도처의 명물·명소로 등극한 돌탑을 찾았다. 기도에 더해 늦단풍은 덤으로 즐길 수 있는 만추에 떠난 돌탑 순례기.
◇지리산 해발 850m에 1500여 개의 ‘솟대’
“이걸(돌탑을) 우째 사람이 쌓았을꼬?” “쌓느라고 참말로 욕봤겠데이~” “돌을 어디서 구해 이 높은 산까지 옮겼을라고?” 단풍 절정기에 접어든 지난 2일 경남 하동 청암면 묵계리 청학동 안쪽 삼성궁(三聖宮·배달성전삼성궁)으로 향하는 탐방객들 사이에선 다양한 반응이 쏟아졌다. 경이와 감탄, ‘미심쩍다’는 반응도 사투리와 함께 섞여 나왔다. 주말에 버스를 대절해 온 단체 관광객들까지 더해져 오르는 길은 시끌벅적했다.
영산(靈山)이라는 지리산 해발 850m 고지대에 자리한 삼성궁은 고조선 환인·환웅·단군 삼성인(三聖人)을 모시는 민족 성전이자 수행 도량이다. 배달민족 혼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온 하동 출신 강민주(법명 한풀선사)씨가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이치로 세상을 다스린다)를 실현하고자, 고대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옛 ‘소도’를 복원하겠다는 뜻을 품고 1983년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이 시작이다. 이후 수행원들과 함께 33만여 ㎡의 땅을 일궈오고 있다. 한동안 청학동을 찾는 이들이나 지리산 등산객들 사이에서만 조용히 알려지기 시작하다가 코로나 사태 때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SNS)에 ‘하동의 숨은 여행지’로 소개되면서 연간 30만명이 찾는 전국구 돌탑 명소로 떠올랐다.
계절마다 다양한 풍광을 자랑하는데, 탐방객이 가장 많이 찾는 시기는 역시 ‘단풍 시즌’이다. 요즘 같은 땐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삼성궁으로 향하는 주차 행렬이 길게 이어진다. 주말엔 정체가 심해 차를 두고 걸어올라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삼성궁은 지리산 능선에 요새처럼 자리 잡아 직접 올라보기 전엔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없기에 도보 탐방이 필수다. 매표소(성인 8000원)에서 시작해 1.5㎞로 삼성궁까지 탐방로를 따라 천천히 걸을 경우 편도 20~30분 정도, 전체 한 바퀴 둘러보고 하산하면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파전 향이 발걸음을 붙잡지만, 유혹을 떨치고 골짜기 옆으로 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태초의 숲과 만난다. 돌계단 주변으로 단풍이 내려 이따금 기념사진을 찍고 갈 만한 포토존이 등장하는데, 뒤이어 오는 탐방객 무리에 떠밀려 여유롭게 사진 찍기는 쉽지 않다. 연속되는 오르막길에 숨이 차오를 무렵 이윽고 에메랄드빛 연못과 마고성이 눈앞에 펼쳐진다. 오르는 동안 무릎 관절을 두드리며 “뭐 볼 게 있다꼬?” 하던 노년 탐방객들도 “와~ 기가 맥히네!” 하며 반전 감탄사를 터뜨리는 지점이다. 촘촘한 돌을 쌓아 만든 마고성은 연못 그림자와 어우러져 신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딸을 따라 삼성궁 탐방에 나섰다는 김옥련(70)씨는 “막내아들이 곧 큰 시험을 앞두고 있어 기도라도 해볼 생각에 나섰는데, 풍경 구경하느라 기도는 까맣게 잊었뿌렀다”며 웃었다. 마고성을 배경으로 사진 찍을 수 있는 연못 둘레의 바위는 “발로 찍어도(막 찍어도) 인생 사진 건진다”는 포인트. 마고성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도 절경이다.
사람이 직접 쌓아올렸다는 삼성궁 내 3333여 개의 돌탑과 함께 1500여 개의 돌탑을 이곳에선 ‘원력 솟대’라 부른다. 솟대는 소도의 상징. 원력 솟대를 쌓아 옛 소도를 복원하고 있다고. 견고하고 촘촘하게 쌓은 데다 규모가 상당해 사람이 쌓았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라는 반응도 있다. 이에 대해 삼성궁 측은 “자연석 돌탑은 사람이 직접 쌓지 않으면 결코 견고하게 쌓을 수가 없다”며 “기단 역할을 하는 초석(礎石)을 제외하곤 한풀선사와 수행원들이 직접 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건국전’은 배달민족의 시조로 추앙받는 삼성인 환인·환웅·단군을 모신 곳이다. 마을의 수호신처럼 장승과 십이지신상이 서 있다. 해가 잘 드는 건국전과 ‘거북못’ 일대는 11월 초 현재 단풍이 절정을 향해 내달리는 중. 한쪽 대숲에선 알싸한 바람까지 불어와 계절의 맛이 느껴진다. 잠시 고행하듯 돌계단을 따라 오른 상행길과 달리, 순탄한 내리막길이 이어지는 하산길의 종착점엔 ‘카페 마고’와 기념품 매장, 막걸리에 파전·도토리묵 등을 맛볼 수 있는 주막이 기다린다. 삼성궁은 동절기 오전 8시 30분부터 문 열어 오후 4시 40분까지 입장 가능하며 탐방 시 운동화나 등산화 착용 필수다.
삼성궁을 오가다 보면 반드시 청학동을 거치게 된다. 반나절 삼성궁을 돌아봤다면, 하산길에 농가 맛집에서 식사를 해결하거나 주변 여행지를 들러볼 일이다. 트로트 가수로 유명해진 이곳 청학동 출신 국악 소녀 김다현양의 이름을 딴 ‘김다현길’이 눈에 들어온다. 김다현양이 유명세를 타자 ‘도인촌’ 입구부터 트레킹 명소인 ‘회남재’ 정상까지 8㎞를 이은 길을 김다현길이라 이름 붙였다.
삼성궁에서 차로 1시간 10여 분 거리에 있지만, ‘스타웨이 하동’(입장료 3000원)은 간 김에 들러볼 만하다. 가는 길에 오일장이 서는 횡천시장(매월 5·10일로 끝나는 날이 장날)을 지나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면, 시골장 구경하며 식사도 할 겸 코스에 추가해 볼 만하다. 스타웨이 하동은 섬진강 수면을 기준으로 150m 정도 높이에 설치된 스카이워크 전망대다. 카페, 미생물 족욕 체험장도 들어서 있다. 전망대 방향에 따라 추수를 마친 악양 평사리 들판과 섬진강의 유려한 물줄기, 소백산맥 능선이 겹겹이 눈앞에 펼쳐진다. 단, 바람이 휘몰아칠 땐 스릴을 넘어 아찔한 경험을 하게 될 수 있으니 주의할 것!
◇마이산 기인의 전설 품은 ‘탑사’
하동 삼성궁과 함께 전북 진안 마이산의 ‘탑사’(입장료 3000원)도 돌탑 명소로 꼽힌다. 이름처럼 탑(塔)이 주인공인 사찰에선 천지탑·오방탑·일광탑·월광탑·고행탑·중생탑·만불탑 등 이름을 붙인 돌탑무리가 볼거리다. 돌탑무리에 대해 소도의 상징이었던 ‘솟대’로 보거나 풍수지리적으로 쌓은 ‘비보탑’으로 보기도 하는 등 그 내력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나 탑사가 전하는 내력은 이렇다.
1800년대 후반 전북 임실 출신 이갑룡 처사가 25세 때 마이산에 입산해 구국 기도를 올리며 수행한 것이 시작이다. 이후 9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행의 한 방법으로 돌을 주워 와 팔진도법에 맞춰 돌탑을 쌓았다고 알려졌다. 처음엔 수행을 위한 도량이었다가 치성을 위해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자연스럽게 삼신상과 불상이 안치되면서 민간 사찰이 됐다고.
마주한 두 봉우리의 모양이 ‘말의 귀[馬耳]’를 닮은 마이산 자락 ‘마이산도립공원’ 남부 입구에서 출발해 20~30분 걸어 탑사에 닿으면 80여 개의 돌탑 무리가 마중나온다. 암마이봉 아래 하늘을 찌르듯 세워져 있는 이 공 든 탑은 폭풍우가 몰아치면 흔들릴지언정 쓰러지거나 무너지지는 않는다고. 돌탑 중 천지탑은 ‘기도발’이 가장 좋다는 탑이다. 마이산과 어우러진 탑사는 미국 CNN 선정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 33곳’에 꼽히기도 했다. 단, 세워져 있는 돌탑이 훼손될 우려가 있어 소원 돌을 따로 올릴 순 없다. 탑사 아래쪽에 돌탑 쌓기 체험을 해볼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다.
탑사를 마주하고 오른쪽 길을 따라 5분 정도 올라가 만나는 ‘은수사’를 지나칠 수 없다. ‘부부봉’이라고도 불리는 마이산(해발 686m)의 두 봉우리(암마이봉·수마이봉)와 어우러져 독특한 풍광을 연출하는 절이다. 조선 초엔 상원사라 불리다 숙종 때 없어져 한동안 터로만 존재했다. 이후 세워진 암자에 중창되면서 은수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태조 이성계가 씨앗을 심어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하는 은수사 경내의 청실배나무는 650년 이상의 수령을 자랑한다. 탑사와 은수사를 껴안은 마이산은 바위에 구멍이 난 듯한 타포니 지형이 발달된 국가 지질 명소다. 무량광전 옆으로 난 계단 따라 올라가면 마이산의 지질 특성을 보다 가까이에서 관찰하며 천왕문까지 올라가거나 북부 쪽으로 하산해 ‘마이산 지오 트레일’ 탐방을 이어가 볼 수 있다. 차량에 구애받지 않을 경우 남부 입구로 들어가 탑사, 은수사를 둘러보고 북부 입구로 하산하면 보다 알차게 둘러볼 수 있다. 탑사로 하산할 경우 입장권을 소지하고 있어야 탑사로 재입장 가능하다.
도립공원 초입엔 으레 산채비빔밥 등을 내세운 식당가가 모여 있다. 쌀쌀해져 하산 후 따끈한 국밥 한 그릇이 생각난다면 ‘진안고원시장’으로 향해볼 일이다. 오일장(매월 4·9일로 끝나는 날)이 서지 않아도 흑돼지를 주재료로 한 맛집과 피순대 국밥 맛집들이 숨어 있다. 순대 국밥은 50년 전통을 내세우는 ‘제일순대(제일식당)’와 방송을 탄 ‘시골순대’ 등이 유명하다.
마이산과 함께 진안엔 사진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가을 풍경 명소가 여럿 있다. 홀로 고독을 씹으며 걸어야 할 것만 같은 ‘부귀메타세쿼이아길’은 마이산에서 북서쪽으로 차로 20~30분,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나 만추에 특히 운치 있는 ‘주천생태공원’은 마이산에서 북쪽으로 차로 40~50분 거리에 있으니 오가는 길에 추가해 볼만하다.
◇‘한국의 앙코르와트’ 대전 돌탑, 강릉엔 ‘모정탑’
전국 곳곳에 돌탑이 어디 이 둘뿐일까. 대전에선 시민의 건강을 기원하며 노옹이 쌓은 돌탑이 전국 명소가 됐다. 만인산과 식장산 사이 ‘상소동 산림욕장’ 내에 있는 400여 개의 돌탑 중 17개는 동남아 사원을 연상케 하는 모양을 해 ‘한국의 앙코르와트’ ‘대전의 앙코르와트’란 별칭으로 불린다. 이 돌탑은 2003년 대전시 동구청이 ‘1000개 돌탑 쌓기’ 캠페인을 할 때 참여한 시민 이덕상 선생이 4년간 쌓은 것이다. ‘돌탑 할아버지’가 쌓은 이색 돌탑 덕분에 상소동 산림욕장은 대전 여행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한쪽엔 나만의 돌탑을 쌓아볼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다. 산림욕장 내 메타세쿼이아 숲, 사방댐 둘레길까지 이어 걷기 좋다.
경남 합천 가회면 황매산 자락 허굴산에 있는 ‘천불천탑’은 소원 성지로 알려졌다. 사찰이 따로 없는 야외 기도처로 수백 개의 돌탑이 산 중턱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풍경이 색다르다. 이곳 용탑스님이 ‘용바위’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쌓기 시작했다는 불탑에 계절마다 눈과 꽃, 단풍이 더해져 그 자체로 명상길, 포토존이다. 첫 방문 시 입장료 포함 한 가지 소원을 적을 수 있는 리본(1만원·1년 기도)을 구매하면 1년 간 무료 입장할 수 있다.
강원도 강릉 ‘노추산 모정탑’도 돌탑 여행지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 지역 살던 고 차순옥씨가 집안에 우환이 끊이질 않아 1986년부터 돌탑을 쌓기 시작해 68세로 세상을 떠난 2011년까지 무려 26년간 자식들의 평안을 기도하며 쌓아 올렸다는 3000개의 모정탑은 이야기만으로도 뭉근한 감동을 선사한다. 하산하는 길목에서 마주친 돌탑 하나가 속삭인다. 돌멩이 무게만큼의 마음 속 이야기 하나 내려두고 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