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 년 전만 해도 중국 미식(美食) 지도에서 홍콩은 존재감이 미약했다. 청나라가 1842년 아편전쟁 패배 후 영국에 식민지로 내줄 만큼 하찮은 어촌에 불과했던 홍콩, 어떻게 중국을 넘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미식 도시로 자리매김했을까.

◇淸淡自然 ‘누벨 캔토니즈’

1920년대 홍콩은 음식은 물론 모든 분야에서 같은 광둥성(廣東省)에 있는 광저우(廣州)에 한참 뒤져 있었다. 청나라 말 광저우는 확고부동한 대외무역의 도시였다. 돈과 사람이 모이니 음식이 발전하는 건 당연지사. “먹을 것은 광저우에(食在廣州)”라는 말이 이때 생겨났다. 중화민국 초기 대형 식당만 200곳이 넘을 정도로 외식업이 발달했다. 당시 홍콩에서 일하는 요리사 대부분이 광저우에서 요리를 배우고 경력을 쌓은 이들이었다.

홍콩이 광저우를 뛰어넘은 계기는 중국 공산화와 문화대혁명이었다. 1920년대 국공내전과 1950년대 중국 공산화, 1960년대 문화대혁명 등 중국 대륙에 혼란기가 이어졌다. 특히 문화대혁명 이후 거대한 인구와 자본이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이주했다. 이들을 따라 요리사들도 옮겨왔다. 홍콩은 봉쇄된 중국과 세계를 연결하는 관문으로 번성했다.

홍콩에서 광둥 요리는 프랑스·일본 등 외국 식문화를 받아들이며 진화했다. 특히 1970년대 프랑스에서 새로운 요리 조류로 떠오른 ‘누벨 퀴진(Nouvelle Cuisine)’에 크게 영향받았다. 누벨 퀴진이란 ‘새로운 요리’라는 뜻으로, 과거부터 이어져 온 복잡한 요리법을 정리해 재료가 지닌 본연의 맛을 살리는 새로운 프랑스식 요리법을 말한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굶주림보다 비만을 걱정하는 시대를 맞아, 대중도 칼로리 과잉 섭취를 신경 쓰게 됐다. 기름지고 진한 전통 프랑스 요리와 달리, 칼로리가 낮고 가벼운 누벨 퀴진은 시대의 요구와 맞아떨어지며 큰 인기를 얻었다. 홍콩 요리사들은 세계적 요리 사조가 된 누벨 퀴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담백하면서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요리법은 사실 광저우 요리의 기본이기도 했다. 홍콩 요리사들이 누벨 퀴진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다.

홍콩에서 탄생한 새로운 스타일의 광둥 요리는 영어로는 ‘누벨 캔토니즈(Nouvelle Cantonese)’, 중국어로는 ‘신파이웨차이(新派粤菜)’라고 불렸다. 각각 영어와 중국어로 ‘새로운 광둥 요리’란 뜻이다. 시류에 부합하는 ‘칭단쯔란(淸淡自然)’한, 즉 ‘산뜻하고 담백하며 식재료의 맛이 살아 있는’ 홍콩식 중식은 아시아 각국과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 이후 다시 세계로 문호가 열린 중국 본토에서 고급 중식당의 표준으로 받아들여졌다. 1980~1990년대 홍콩은 중국은 물론 아시아 미식의 중심으로 여겨지게 됐다.

'더 체어맨' 대표 메뉴인 꽃게찜. 샤오싱주와 황계 기름으로 풍미를 더하고 넓은 쌀면을 곁들였다. /더 체어맨

◇끊임없는 진화 홍콩식 중식

홍콩 미식이 예전만 못하다는 이들이 있다. 중국에 반환된 1997년 발발한 아시아 금융 위기와 2000년대 초 사스(SARS), 2020년대 초 코로나를 연이어 겪으며 침체된 홍콩 경기와 사회 분위기로 인해 외식 업계도 좀처럼 활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홍콩의 한 외식·여행 전문지는 ‘2000년 이후 홍콩 외식 업계에서 개발한 신메뉴 숫자가 전성기였던 1980년대보다 적고, 많은 식당이 1980년대 개발된 요리를 답습하고 있다”는 기사를 냈다. 홍콩에서 만난 한 외식 업체 대표는 “상하이(上海)를 필두로 중국 본토 도시들이 초고속 성장하면서 미식 주도권을 가져갔다는 위기감을 느끼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홍콩 파인다이닝(finedining·고급 외식)은 여전히 굳건하다는 것을 이번 홍콩 미식 기행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홍콩 외식 업계에서 홍콩식 중식의 가치를 지키면서도, 새로운 혁신을 통해 신선함을 수혈하는 식당들이 활발하게 영업 중이다.

‘더 체어맨(The Chairman·大班樓)’은 2021년 중식당으로는 처음으로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50(A50B)’에서 1위를 차지하고, 지난해에는 미쉐린 가이드에서 별 1개를 받았다. 이 식당을 운영하는 대니 입 대표는 셰프에서 IT 사업가로, 다시 식당 주인으로 변신한 이색 경력의 소유자다. “10여 년간 호주 캔버라에서 식당 여럿을 열어 운영하다가 1997년 홍콩에 돌아왔어요. 식당이라면 지긋지긋했어요. 다시는 식당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죠.”

인터넷 회사를 창업해 성공한 입 대표가 외식업으로 돌아온 건 “내가 먹고 싶은 광둥 음식점이 홍콩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광둥 요리의 핵심은 재료 자체를 중시하고 맛을 살려내는 요리법이죠. 재료 자체가 신선하고 최상의 품질이면 많은 양념과 조리가 필요하지 않지요.”

더 체어맨에서 최고의 재료를 구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은 상상 이상이다. 입 대표는 오로지 해산물 재료 구입만을 담당하는 직원만 2명을 고용했다. 이들이 하는 일은 매일 이른 새벽 홍콩섬 남단 애버딘항(港)에 나가 더 체어맨에서 쓸 해산물을 고르는 게 전부다. “어부가 잡아온 꽃게를 손으로 집어서 들어보고 골라냅니다. 오랜 경력을 쌓았기에 들어만 보고도 살이 꽉 찼는지 알 수 있죠. 이들이 고른 꽃게가 아니면 우리 대표 메뉴인 꽃게찜은 절대 그 맛을 낼 수가 없어요.”

재료 수급에 혼신의 힘을 쏟는 대신, 조리는 최소한으로 자제한다. 15년 숙성한 진피(귤껍질)로 맛을 낸 사자두(소고기 완자), 연한 새끼 비둘기 훈제 구이, 샤오싱주(酒)와 닭기름을 곁들인 꽃게찜, 20년 숙성 레몬 절임과 다진 돼지고기로 맛을 낸 머드크랩(청게) 등 모든 요리에서 재료의 힘이 느껴졌다. 특히 ‘맑은 전복 수프(abalone broth)’가 압도적이었다.

흰 찻잔에 건더기도 없이 뽀얀 국물만 절반쯤 담겨 나왔을 땐 ‘이게 뭐지?’ 싶었지만, 한 모금 마시자 진한 전복 풍미가 입과 코를 가득 채웠다. “최상품 전복을 냄비 가득 담아 물만 붓고 약한 불에서 사흘에서 닷새가량 천천히 끓입니다. 조미료는 소금조차 들어가지 않아요. 전복의 형태는 사라지고 오직 맛만이 남죠. 전복 그 자체의 맛이 농축된 한 모금이죠.”

'윙'의 해삼 춘권. /김성윤 기자, 윙

‘윙(Wing·永)’은 홍콩 태생으로 캐나다에서 자랐고 미국 뉴욕의 유명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일한 빅키 쳉 셰프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광둥식을 내는 레스토랑이다. 올해 A50B 3위에 올랐고 미쉐린 1스타를 받았다. 2015년 홍콩에 돌아온 쳉 셰프가 처음 연 식당은 ‘베아(VEA)’. 생선 부레, 해삼 등 중국 전통 식재료를 프랑스식 테크닉과 플레이팅으로 선보인 베아는 문 열자마자 화제를 일으키며 미쉐린 1스타를 땄다.

윙은 2021년 오픈했다. “베아에서 낼 요리를 창작하기 위해 중식을 책 보면서 공부했어요. 어머니가 해주는 광둥 음식을 먹고 자랐지만 중식 주방에서는 한 번도 일하지 않았죠. 그렇게 공부한 중식을 하나씩 만들어보는 과정에서 수많은 요리를 개발했어요. 베아에서 내기엔 너무 전통적인 요리도 많았죠. 묻어버리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윙은 겉보기엔 기존 광둥 요리와 같지만, 쳉만의 혁신이 녹아들어 있다. 예를 들면 광둥식 닭구이. 껍질은 얇고 바삭하고 살은 육즙이 촉촉한 전형적인 광둥식 닭구이지만, 찍어 먹을 소금을 내지 않는다. “왜 굳이 닭을 싱겁게 굽는지 의문을 가졌어요. 닭을 굽기 전 소금물에 재워 맛이 배게 했죠.”

또 다른 혁신은 쳉 셰프 스타일의 베이징 오리 구이. “굽는 과정에서 오리 뱃속에 육즙이 차오릅니다. 전통적으로 버려지는 육즙을 맛보니 기가 막히더군요. ‘이 맛있는 육즙을 왜 버리지?’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육즙으로 만든 소스를 오리 구이와 함께 내고 있습니다.”

포시즌스 호텔 홍콩 ‘카프리스’의 호화로운 실내.
홍콩의 미쉐린 3스타 프랑스 레스토랑 '카프리스'의 루비 소스를 곁들인 프랑스 브르타뉴산 바닷가재./포시즌스 홍콩 호텔

◇노골적으로 사치스런 ‘세계의 식탁’

홍콩은 중식뿐 아니라 프랑스·이탈리아·남아메리카 등 세계 어느 지역, 국가 음식이든 맛볼 수 있는 글로벌 미식 도시. 포시즌스 호텔 ‘카프리스(Caprice)’는 미쉐린 가이드가 홍콩에 처음 진출한 2009년부터 최고 등급인 3스타를 받은 정통 프랑스 레스토랑이다. 잠시 2스타로 내려서기도 했지만 기욤 갈리오(Galliot) 셰프가 2019년 주방을 맡자마자 3스타를 회복해 지금껏 유지하고 있다. 올해 A50B에서는 18위에 올랐다.

저녁 식사에 맞춰 식당에 들어서니 높은 층고와 화려한 샹들리에, 샹들리에보다 더 번쩍이는 홍콩 야경에 압도됐다. 테이블에는 호화로움과 럭셔리가 넘쳐흘렀다. 알래스카산 대게와 프랑스 브르타뉴산 바닷가재·비둘기, 호주산 와규, 일본 홋카이도산 관자 등 세계 곳곳에서 비행기로 당일 배송받은 최상급 식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해 프랑스에서도 맛보기 힘든 프랑스 요리의 정수를 선보였다.

갓 구운 따뜻한 식전 빵부터 전채, 메인, 치즈, 디저트까지 흠잡을 코스가 하나도 없었다. 손님들은 빵을 더 달라고 주문해 접시에 남은 소스까지 싹싹 먹음으로써 갈리오 셰프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노골적으로 호화롭고 부끄러움 없이 사치스러운 미식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도시인 홍콩을 하나의 식탁으로 구현한다면 여기 카프리스의 식탁 같지 않을까.

홍콩 '네이버후드' 대표 메뉴인 솔트-베이크 라이스 치킨. /홍콩관광청

‘네이버후드(Neighborhood)’는 홍콩 섬 중턱 복잡한 소호(Soho) 지역의 좁은 골목에 숨어 있는 비스트로(bistrot) 스타일 식당이다. 비스트로는 본래 음식과 곁들여 와인을 마시기 좋은 프랑스식 선술집이지만, 이 식당에서는 위스키·고량주 등 주종을 가리지 않고 맛있게 먹고 마실 수 있다. 미쉐린 1스타에 이어 A50B에 매년 빠지지 않고 오를 만큼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에게 두루 사랑받는다.

음식은 딱히 어디 식이라 규정하기 힘들다. 주인 겸 요리사인 데이비드 라이는 “제철 현지 식재료를 최대한 활용한 맛있는 음식”이라며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요리하고 손님에게 낸다”고 했다. 어느 하나를 꼽기 힘들 정도로 두루 맛있지만, 소금을 두껍게 발라 구운 닭의 살과 내장, 프랑스 모렐 버섯을 듬뿍 올린 ‘솔트-베이크 라이스 치킨’이 대표 메뉴로 꼽힌다. 배가 터질 지경인데도 계속해서 손을 끄는 마력을 지녔다.

‘모노’의 이베리코 돼지고기와 멕시코 몰레 소스 토르티야. /김성윤 기자

술집과 식당이 밀집한 홍콩 란콰이펑에 있는 ‘모노(Mono)’는 콜롬비아·아르헨티나·이탈리아 혈통의 베네수엘라 태생 리카르도 차네톤 셰프가 스페인 ‘키케 다코스타’와 프랑스 ‘미라주르’ 등 세계 최고 레스토랑에서 일한 경력을 바탕으로 고향인 남아메리카 음식을 파인다이닝으로 해석해 선보이는 식당이다. 미쉐린 1스타, 올해 A50B 24위에 올랐다.

‘유일한’이라는 뜻의 이름답게, 남아메리카 음식에 기반하지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차네톤 셰프만의 음식을 선보인다. 베네수엘라에서 즐겨 먹는 옥수수 빵 아레파에 성게알과 해조류로 동양의 풍미를 더했고, 덴마크에서 공수한 바닷가재는 에콰도르산 카카오로 악센트를 줬다. 남아메리카에서 가져온 카카오 열매로 만든 초콜릿을 제조 전 과정을 보며 맛보니 맛이 더 특별했다.

'에스트로'의 나폴리 라구 파파르델레. /김성윤 기자

‘에스트로(Estro)’에서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 안티모 마리아 메로네 셰프가 평범한 피자나 파스타를 냈다면 미쉐린 1스타나 A50B 32위는 얻지 못했을 것이다. 메로네 셰프는 극도로 정제해 뽑아낸 나폴리 맛의 정수를 마치 미니멀리즘 예술 작품처럼 단순하면서도 우아하게 낸다.

7개 코스로 이어진 점심에서 다섯 번째로 나온 ‘파파르델레’가 메로네 셰프의 솜씨를 극단적으로 드러냈다. 나폴리탄 라구(ragu)는 양·돼지 등 각종 육류를 토마토·와인·향신료와 함께 푹 끓인, 건더기가 푸짐한 소스. 하지만 메로네 셰프는 나폴리탄 라구를 체에 내린 다음 진하게 농축해 파파르델레 파스타를 버무렸다. 그리고 붉은 장미 한 송이처럼 접시에 담아냈다. 작은 만두처럼 생긴 ‘보토니’는 그때그때 제철 재료로 채우는데, 이날은 페코리노 치즈·아티초크·돼지 비계를 소금에 절인 라르도(lardo)로 가득 차 있었다.

'모노' 아구스틴 발비 셰프의 요리에서는 남미와 일본의 영향이 동시에 느껴진다. /안도

아구스틴 발비 셰프는 유럽에서 경력을 쌓는 다른 아르헨티나 출신 요리사들과 달리 일본으로 갔다. “내가 아는 식문화 전통과 완전히 다른 곳에서 새로운 영향을 받고 싶었습니다. 미국에서 잠시 일할 기회가 있었을 때 일식을 접했고, 더 알고 싶었죠.”

도쿄에서 6년간 일하며 일식 맛과 전통을 흡수한 발비 셰프는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여름 홍콩에서 ‘안도(Ando)’를 열었다. “홍콩은 세계 어느 구석에 있는 식재료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데다, 음식과 외식에 대해 누구보다 열정적인 사람들이 사는 도시이기 때문이죠.”

소고기 등 육류 중심인 아르헨티나 식문화와 생선 등 해물 중심인 일본 식문화가 오묘하게 조화로운 음식을 낸다. 미쉐린 1스타를 받았고, 올해 A50B 41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