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익을 위해 일본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대국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인물’을 통해 그 나라를 들여다보는 것 아닐까요. 일본의 주요 인물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일을 했는지, 평소 공부하고 생각한 것을 엮었습니다.”

호암재단 이사장 사무실에서 만난 김황식 전 국무총리는 최근 출간한 ‘일본인 88인의 이야기’에 ‘인물을 통해 알아보는 일본’이라는 부제를 붙인 이유를 명쾌하게 밝혔다. 야마토 시대의 쇼토쿠 태자부터 야구 선수 오타니 쇼헤이에 이르기까지, 그는 일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인물들을 시대의 맥락 속에서 차근차근 짚었다. 마치 ‘도장(道場) 깨기’처럼 시대를 타고 내려오며 인물을 통해 일본 사회를 탐색한 것이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는 호암재단 이사장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상대국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인 물’을 통해 그 나라를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총리는 호암재단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김 전 총리는 퇴임 직후 독일 연구에 몰두해 ‘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 1·2권’을 펴낸 데 이어, 이번에는 일본을 망원경과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책을 내놓았다. 그는 “대한민국에 가장 중요한 미국은 우리 국민이 잘 알고 있고 이미 많은 분이 다루고 있으니, 나는 상대적으로 더 소개할 필요가 있는 독일과 일본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웃었다.

― 왜 지금 일본을 다룬 책을 쓰셨습니까.

“일본은 애증이 교차하는 이웃입니다. 때로는 경쟁하고 갈등하면서도, 결국 협력하고 교류해야 하는 나라죠. 그래서 일본을 단편적, 감정적, 피상적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깊이 있고 냉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대로 알고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 일본의 전 역사에 걸쳐서 88명을 선정하신 기준은 무엇인가요.

“시대별로 일본의 역사·문화·생활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을 골랐습니다. 천황과 총리 같은 정치 지도자뿐 아니라 개혁 사상가, 문화 예술인, 기업가, 그리고 자기 분야를 개척한 시민까지 포함했습니다. 엄격한 원칙이 있다기보다, 오랫동안 공부하며 중요하다고 느낀 인물들을 중심으로 선정했습니다. 생존 인물은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야구 선수 오타니 쇼헤이, 두 사람입니다.”

― 오타니를 선택한 이유는.

“책에 장검과 단검을 양손에 들고 싸우는 ‘이도류(二刀流)’의 창시자 미야모토 무사시를 다뤘는데, 투타 겸업의 ‘이도류’ 오타니는 거기서 유래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실력뿐 아니라 인성으로 일본의 국위를 선양하고 있는데, 대단하지 않은가요? 지난달 선발투수 겸 1번 타자로 출전해 홈런 3개, 6이닝 무실점, 10탈삼진을 기록했을 때 ‘오타니를 마지막 인물로 택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에 흐뭇했습니다.”

―오쿠보 도시미치에 대해선 ‘새로운 일본을 설계한 유신 정부의 핵심’이라고 한 줄로 평가했습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메이지 유신을 이끈 인물입니다만, 정한론 문제로 갈라졌지요. 일본인들은 사이고를 더 좋아하는데, 서양식 제도를 도입하고 일본의 근대화를 실질적으로 이끈 사람은 오쿠보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일본을 이렇게 발전하게 만든 데는 오쿠보의 공이 더 큰데, 자결한 사이고보다는 사랑받지 못하고 관심도 적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이지요.”

― 백제의 구원 요청을 받고 파병한 덴지(天智) 천황을 비롯, 한국과 인연이 있는 인물들이 눈에 띕니다.

“한일 양국 국민은 역사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전범으로 몰려 교도소에서 숨진 도고 시게노리 외상은 한국계였고, ‘경영의 신’으로 불린 교세라 창업자 이나모리 가즈오의 장인이 우장춘 박사였습니다. 가능한 한 이런 인연이 있는 인물들을 소개하려 했습니다.”

― 일본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들에도 주목하셨더군요.

“일본은 다양한 분야의 인물을 화폐에 담습니다. 과학자, 작가, 여성 문인 등 분야를 가리지 않죠. 예를 들어, 젊은 여류 작가 히구치 이치요는 단편 14편을 남기고 25세에 요절했는데, 5000엔권 인물이 됐습니다. 그런 인물들을 찾아서 책에 포함했습니다. 우리도 이제 조선 시대의 세종대왕·신사임당을 넘어 시대의 다양성을 반영한 인물을 화폐에 담을 때가 됐습니다.”

― 이 책을 통해 1982년 일본 중의원의 하타노 아키라 의원이 “한국에서 안중근이 영웅인 것은 당연하고, 일본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위대한 정치가인 것도 당연하다. 이것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저는 하타노 의원의 말에 공감합니다. 안 의사는 일본을 배척한 분이 아닙니다. 한·중·일 세 나라가 협력해 서양의 침략에 대응해야 한다는 평화 사상을 가졌죠. 이토를 제거한 것도 일본에 대한 적대감 때문이 아니라 일본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안중근의사 숭모회 이사장을 2017년부터 맡고 있는데, 안 의사는 한일 관계의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디딤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이 한일 양국이 서로를 객관적으로 보고, 균형 잡힌 이해를 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길 바랍니다.”

― 책에 기독교 관련 이야기도 자주 등장합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일찍 천주교가 전래됐지만, ‘기리시탄(크리스천)’ 인구는 1% 남짓입니다. 그럼에도 일본 역사 곳곳에는 기독교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파랗습니다’라고 한 ‘침묵’의 작가 엔도 슈사쿠를 다뤘습니다. 또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벌하고자 할 때 그 사람 마음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빼앗아 버린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감사하며 사는 것이 복된 삶이라고 믿기에 가끔 결혼식 주례할 때마다 꼭 인용합니다.”

― 젊은 시절 ‘문청(文靑)’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일본 작가가 책에 많이 등장하고, 특히 ‘은하철도의 밤’ 작가 미야자와 겐지의 시 ‘비에도 지지 않고’를 책에 실으셨더군요.

“한일이 교류하는데, 일본 문학이 한국에 미친 영향이 큽니다. 영혼이 맑은 겐지의 수첩에 적힌 그 시는 마치 윤동주의 ‘서시’를 떠올리게 합니다. ‘모든 일에 내 잇속을 챙기지 않고, 잘 보고 듣고 깨달아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오두막에 살며, 동쪽에 아픈 아이가 있으면 가서 돌보아 주고….’ 요즘 이 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 88인 중 특히 강조하고 싶은 인물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이케다 하야토 전 총리입니다. 1960년대 ‘소득 배증(所得倍增)’ 운동을 추진하고, 격렬한 사회 갈등 속에서도 ‘관용과 인내’를 정치 슬로건으로 내세웠죠. 그는 반대파를 포용하며 낮은 자세를 취했고, 총리직도 평생의 정치적 라이벌인 사토 에이사쿠에게 넘겼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필요한 정치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 일본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였나요.

“1974년 판사가 되면서 일본어를 독학했습니다. 당시 우리 법학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에 일본 판례와 문헌을 직접 읽어야 했죠. 이후 법원행정처 근무 시절 전산화 업무로 일본을 자주 방문했는데, 그때부터 일본 서점에서 한나절씩 책을 살피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서점에 가면 일본 사회가 지금 무엇을 고민하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 책 출간 직전에 ‘여자 아베’라는 별명을 가진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취임한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도 국내에 있습니다.

“다카이치 총리는 과거 극우 성향의 발언이 있었지만, 이제는 총리로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시대 상황이 엄중한 만큼 예전처럼 행동하긴 어렵지 않을까요. 보다 신중하고 균형 잡힌 태도를 보이리라 기대합니다.”

― ‘극우는 추하고, 극좌는 철이 없다’는 촌철살인 같은 말을 하고, 자신을 ‘중도저(低)파’라고 규정했는데, 요즘 시국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극우는 자기 생각과 이익만을 내세우고, 극좌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고려하지 않고 현실을 무시한 이상만 추구합니다. 우리 사회는 합리적인 중도에 의해 대화와 타협을 통해 발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더불어 잘 살려면 어렵고 힘이 약한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의 ‘중도저파’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지금도 갖고 있습니다.”

― 여당의 소위 ‘4심제’ 주장과 대법원장 사퇴 요구에 대해서도 안 물어볼 수 없는 듯합니다.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사법 개혁은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일입니다. 지금 논의되는 방식은 성급해 보입니다. 4심제 발상은 헌법적 논란이 있을 뿐 아니라 국민에게 실익보다 피해가 클 수 있습니다. 대법원장 사퇴 요구 역시 권력분립 원칙에 맞지 않습니다. (단호한 목소리로) 법과 제도는 냉정하고 신중하게 다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