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와 같은 중요한 시기에 정치인들은 경쟁하듯 전통시장에 달려가 어묵·호떡 같은 시장표 음식들을 사먹는다. 서민적 이미지를 연출하려는 행보로 풀이되지만, 일각에선 ‘구태’라는 비판이 나온다. /김영근 기자

정치인들이 쉽게 입에 올리지만 자주 논란을 부르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서민’이다. 가장 최근의 논란 유발자는 더불어민주당 복기왕 의원. 그는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두둔하며 “15억 정도 아파트면 ‘서민들이 사는 아파트’라는 인식이 좀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해 역풍을 맞았다. “15억원 아파트가 서민 아파트면 나는 거지”라는 자조와 “민주당이 생각하는 ‘서민’은 대체 누구냐”는 비판이 잇따랐다.

이런 논란은 새삼스럽지 않다. 서민을 생각한다면서 현실과 동떨어진 발언을 하고, 서민을 자처하지만 실제 삶은 그와 거리가 먼 이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 정치권에서 ‘서민’은 표를 얻기 위한 마케팅의 언어이자 레토릭(수사)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염불 외듯… “서민, 서민, 서민”

표준국어대사전은 ‘서민(庶民)’을 ‘아무 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일반 사람’ ‘경제적으로 중류 이하의 넉넉지 못한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정치권에서 ‘서민’이 전면에 부상한 것은 2002년 16대 대선 때부터다. 서민 표를 의식하고, 서민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대선 후보의 덕목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서민 대통령’ 이미지를 표방한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정치권에선 ‘서민’이 정치 언어의 상수가 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 TV 광고물에 전통시장에서 국밥을 먹는 장면을 넣었고, 문재인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 “저는 서민의 삶을 살았고, 서민과 함께 살아왔다. 누가 서민을 위한 민생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지 판단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종명 충남대 교수는 정치권의 ‘서민’ 담론에 관한 연구에서 “2000년대 후반부터 정치권에서는 지속적으로 서민을 호명하는데, 이는 서민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동적 대상으로 만듦과 동시에 지지 기반으로 삼는 의미를 지닌다”고 분석했다.

‘서민’ 활용의 클라이맥스는 선거철이다. 선거 때만 되면 정치인들은 전통시장을 찾고, 지하철을 타고, 점퍼를 입는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대선 출마 전 “시장에서 오뎅(어묵) 먹는 것 같은 쇼 정치는 안 하겠다”고 했지만, 어묵은 물론 떡볶이·튀김·호떡 등 수많은 음식을 먹었다. 초반에는 “인간적이다”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갈수록 “서민을 우롱한다”는 비판이 커졌다. 특히 2023년 12월 재벌 총수들을 대동해 부산 깡통시장에서 떡볶이를 먹는 장면을 연출했을 때는 부산·울산·경남(PK) 지역의 대통령 지지율이 5%포인트가량 빠졌다.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2017년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 청문회 때 들고 나와 화제가 됐던 낡은 가방. /조선DB

‘서민 코스프레’ 논란도 적지 않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2011년 보궐선거 때 해진 구두로,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2017년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 청문회 때 낡은 가방으로 화제가 됐다. 그런데 박 전 시장은 당시 강남 60평대 아파트에 월세를 살며 자녀를 유학 보냈고, 김 전 실장은 3년 뒤 임대차 3법 시행 직전 본인 소유 청담동 아파트 전세 보증금을 대폭 올리는 계약을 했다. “매일 라면만 먹는다”던 김남국 대통령실 비서관은 수십억 원대 코인을 갖고 있었고, 조국 조국혁신당 비대위원장은 고급 한우집에서 식사해 놓고 된장찌개 사진만 소셜미디어에 올려 비판을 받았다.

◇진정성 없다면? 역풍 맞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시장에서 족발을 가리키며 차분한 말투로 “이게 서민 음식이에요”라고 말해 냉소를 샀다. “서민 음식 체험 나왔느냐” “그 서민 음식, 비싸서 못 먹는 사람이 부지기수” 등의 반응이 이어졌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해 스타벅스를 두고 “서민들이 오고 그런 곳은 아니다”라고 한 발언도 논란이 됐다. “언제적 얘기를 하느냐” “서민은 캔커피나 먹으라는 얘기냐” 등 현실과 괴리된 발언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번번이 역풍을 맞으면서도 정치인들이 ‘서민’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 이미지가 강력한 정치적 신호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사회과학연구에 실린 연구자 이슬아의 20대 대선 분석 관련 연구에 따르면, 유권자가 후보나 정당을 ‘가난한 사람들 편’으로 인식할수록 호감도가 커졌지만, ‘부자들 편’이라 느낄 때는 부정적 평가로 이어졌다. 특히 자신이 서민이라 여길수록, 민주당이 ‘서민의 편’이라는 기대가 어긋날 때 호감도가 더 크게 하락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서민이라는 말에는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 누구를 서민이라 부를 것인가는 매우 예민한 문제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은 이를 종종 간과한다. 결국 정치인에게 ‘서민’이란 단어는 양날의 검이다. 진정성이 담기면 정치적 자산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불신을 부른다.

한 전직 국회 보좌관은 “서민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만원 버스와 지하철을 타지만, 정치인들은 세금으로 남이 운전해 주는 고급차를 탄다”며 “정치인 대다수가 상위 5% 부유층이다 보니 서민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권력의 중심에 머무르다 보면 서민이었던 이들도 서민의 삶을 잊게 되고, 현실을 모른 채 자기 논리에 갇히게 된다”며 “이런 태도가 특권 의식으로 이어지고, 민심과 동떨어진 말을 낳는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