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15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 행사장 앞에 위고비 모형이 전시됐다. /뉴스1

의지보다 강한 약이 식탁 질서를 흔들고 있다. 신약이 수많은 다이어트 비법을 제치고 식욕을 직접 낮춘다. 위고비와 마운자로, 이른바 ‘기적의 비만약’이다. 우리 주변에도 위고비로 다이어트 중인 사람이 늘고 있다.

위고비는 GLP-1 호르몬을 모방해 소화를 늦추고 뇌에 포만감을 전달해 체중을 줄인다. 국내 출시 시점은 위고비가 작년 10월, 마운자로는 올해 8월. 감량 효과는 위고비 14~15%, 마운자로 최고 22%. 기존 비만 치료제가 넘지 못했던 체중 감량 10% 벽을 가볍게 넘어섰다. 체중 감량에만 그치지 않는다. 혈당과 혈중 지질을 낮추고 심혈관 질환 위험을 줄이는 효과가 확인됐다. 일부 연구에서는 사망 위험을 낮추고 노화를 늦출 가능성도 나타났다.

한국은 아직 GLP-1 열풍이 본격화하지 않았지만, 미국 사례를 보면 그 여파가 결코 가볍지 않다. 현재 미국 성인의 6%가 비만 치료제 신약을 쓰는데, 모건스탠리는 2035년까지 2400만명까지 늘 것으로 본다. 여기에 먹는 알약 형태의 GLP-1 계열 약까지 나오면 사용자 수와 파급력은 더 커진다. 이제 시작된 비만 신약 시대, 우리 식탁은 어떻게 달라질까?

줄어든 양, 높아진 눈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양에 있다. 이런 약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식욕이 줄어들어 자연스럽게 덜 먹게 된다. 칼로리를 더 소비해서가 아니라 적게 먹어도 만족하기 때문에 살이 빠지는 것이다. 1인 가구의 증가, 소비 여력 감소로 이미 강해지고 있던 소포장 선호 트렌드는 GLP-1 신약 확산으로 강해질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최근 미국에서는 과자류가 예전만큼 팔리지 않는다. 간식 부류는 기세가 꺾이고 있다. 도리토스와 레이스로 유명한 프리토레이는 작년 북미 간식 부문에서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처음으로 연간 매출이 감소했다. 크래프트 하인즈와 제너럴 밀스 등 대형 식품 기업들의 주가도 최근 1년 사이 줄줄이 하락했다. 같은 기간 S&P 500지수는 상승세였다.

월가에서는 단순한 경기 요인이 아니라 아예 식생활 구조가 바뀌는 신호일 수 있다고 본다. 위고비 같은 체중 감량 약물의 확산, 고단백 저당식에 대한 관심 증가, 배고파서 먹는 것이 아니라 필요해서 먹는 쪽으로 바뀌는 현상이 배경이다.

입맛도 뇌도 달라진다

올해 미국 아칸소 대학 연구에 따르면, GLP-1 사용자 중 가공식품을 덜 섭취한다고 답한 비율은 더 먹는다는 쪽보다 약 70% 높았고, 탄산음료, 정제 곡물, 소고기를 덜 먹는다고 응답한 비율도 더 먹는다는 응답보다 약 50% 높았다. 전분이 많은 채소·돼지고기·과일주스·우유 섭취도 전반적으로 감소했다. 과일·잎채소·물 섭취는 늘었다.

이런 변화는 약물 부작용과도 관련이 있다. GLP-1 계열 비만 약은 일부 사용자에게 일시적인 메스꺼움을 유발할 수 있다. 이는 위에서 장으로 내용물 배출을 늦추는 효과와 관련돼 있는데, 소화가 느려져 포만감 지속 시간이 길어지면 다이어트에는 유리하지만 불쾌감도 커질 수 있다. 고지방 스낵을 먹고 불편함을 겪은 사람들은 점차 과일이나 채소처럼 덜 자극적인 음식을 찾게 되고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입맛이 아예 바뀐다. 실제 사용자들에게 기름진 음식이 부담스럽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게다가 위고비는 단순히 위와 장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서울대 최형진 교수팀은 지난해 사이언스에 발표한 연구에서 이 약물들이 뇌의 시상하부에 작용해 음식을 보기만 해도 배부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쥐 실험과 임상 시험으로 입증했다. 눈으로 보기만 하는 단계에서 포만감이 생긴다면 당연히 음식 소비와 구매 행동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더 흥미로운 건, 약 때문에 음식 선호와 취향이 아예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셀러리나 당근과 같은 채소 본연의 맛을 더 즐기게 되거나, 예전에 좋아하던 케이크나 과자 맛이 더는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GLP-1 약물은 단순히 포만감에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 뇌 시상하부와 도파민 보상 시스템에 있는 수용체를 조절해 쾌감을 조절한다는 게 과학자들의 추측이다. 실제로 GLP-1 약물은 식욕뿐 아니라 코카인·알코올·담배와 같은 중독성 물질에 대한 갈망도 줄여주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 비만 신약들로 중독을 치료하거나 예방할 수 있는지 연구가 이어지는 이유다.

적게 먹는 시대의 음식

단백질 열풍은 비만 신약 유행으로 더욱 거세질 가능성이 높다. 음식을 적게 먹으니까 영양에 더 주의해야 하고, 살이 빠지면서 근육까지 줄어들까 하는 걱정도 늘기 때문이다. 적게 먹는 만큼, 간편하면서도 영양이 높은 식품을 찾게 된다. 실제로 위고비·마운자로가 대중화된 나라에서는 장바구니에서 군것질거리가 사라지고, 1인분 고단백 냉동식품이 새로운 주력 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다. 모건스탠리 설문조사 결과, 비만 신약 사용자들은 과일·야채·가금류·생선뿐 아니라 프로틴바·셰이크와 같은 체중 관리 제품을 더 많이 먹었다.

한편 약 대신 음식으로 GLP-1 호르몬 수치를 높이고 싶은 사람들은 식품으로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녹차·섬유질 등을 함유한 기능성 식품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식품으로 얻는 효과는 약에 비해 매우 미미해 체중 감량에 크게 도움이 되진 않는다. 그러나 체중 관리에 도움이 되는 식품·식단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늘어날 것이 확실하다. 역설적이게도 비만 신약의 등장이 약물 없는 건강한 식습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비만 신약의 시대, 건강과 영양을 중시하는 것이 식품 트렌드의 대세가 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먹는 쾌락이 완전히 사라질 거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앞서 소개한 아칸소 대학 연구에 따르면 GLP-1 사용자들은 가공식품 소비를 줄였지만 맛에 대한 욕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탄산음료, 정제 곡물, 소고기를 덜 먹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 맛을 원했다. 약이 식욕을 조절해 줄 수는 있지만 맛있는 음식으로 즐거움을 얻으려는 인간의 본능까지 없애기는 어렵다. 결국, 영양을 챙기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욕망, 이 딜레마는 약물 사용자에게도 유효하다. 맛과 건강을 동시에 설계하는 음식이 미래 식탁의 최종 승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