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달에 걸친 서울 강북구청의 ‘내 생애 첫 자서전’ 프로그램으로 지난달 출간된 어르신 17명의 자서전. /강북구청

서울 강북구에 사는 김순덕(82)씨는 지난달 84쪽 분량의 자서전을 냈다. 제목은 ‘가족과 함께하는 순덕의 삶’. 김씨는 “시골에서 농사짓던 사람이 무슨 자서전이냐 싶었지만 쓰다 보니 삶이 그냥 흘러간 게 아니더라”라며 “참 고생도 많이 했고 그래도 잘 살았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는 지난 6월 각별히 사이가 좋던 남편과 사별한 뒤, 딸의 권유로 강북구청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을 신청해 7~8월 여섯 차례 강의를 들었다. 글쓰기 기본기와 퇴고를 익혀 원고를 묶었다. 중매로 스물두 살에 결혼해 서울로 올라와 일군 살림살이, 자녀를 키운 시간들이 책 한 권에 담겼다.

학습지 형태로 채워 가는 구독형 자서전, 질문이 적힌 책에 답을 써 내려가는 문답 자서전까지 출시되는 시대. 자서전이 유명인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바뀌는 흐름 속에서 ‘자서전 쓰기’가 새로운 노인복지 프로그램의 형태로 주목받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와 복지 기관이 특히 적극적이다. 50세 이상 시민을 대상으로 지난 14일 모집을 시작해 12월까지 ‘인생 자서전 출판 사업’을 진행한다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관계자는 “지원자 폭을 넓히기 위해 그간 지역 복지관에서 실시하던 사업을 구청 차원으로 확대했다”며 “주로 60~70대 신청자가 많다”고 했다. 경기도 광명시는 지난달부터 자서전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광주광역시 북구는 내달 출판 기념식을 앞두고 있다. 주로 한 프로그램에 20명 안팎이 참여한다.

최근 서울 강북구청의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으로 자서전을 낸 어르신들의 책. /강북구청

실제로 전문가들은 “자서전 쓰기가 심리 치료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은퇴 이후 사회적 역할이 줄거나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나서 상실감에 시달릴 때 삶의 흔적을 ‘스토리(이야기)’로 엮으며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한 구청 관계자는 “집단 창작의 과정을 통해 사회적 연결망을 회복시켜 고립감 완화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고 했다. “집단 미술 치료 형식으로 진행된 자서전 만들기가 요양 병원 노인의 행복감과 삶의 질 향상에 효과가 있었다”는 내용의 논문이 2022년 한국미술치료학회에 실리기도 했다.

퇴고·감수 등 인공지능(AI) 활용 폭이 넓어진 것도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이 확산하는 이유 중 하나다. 강북구청은 참여자 17명에게 챗GPT 사용법을 알려주며 퇴고 과정을 진행했는데, “두서 없이 쓴 글을 정리해 주니 신기하면서도 쓸 맛이 났다”는 평이 많았다. 노년층의 디지털 격차를 줄여 주는 효과도 있다고 한다. 지난달 충청남도 스마트돌봄사업단은 지역 어르신이 AI를 활용해 직접 쓴 ‘AI 동화 자서전’ 전시를 열었다. 한국디지털포용협회는 AI와 대화하며 자서전을 완성하는 시니어 대상 교육과정을 지난달 25일 내놓기도 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는 “인생을 회고하면서 자기 위안이나 지지, 자존감 향상 등 여러 심리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며 “나 역시 주변인에게 단 500자만으로라도 자신의 인생을 정리해보라는 조언을 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한 번 펜(혹은 자판)을 들어보는 건 어떨지. 참고로 김순덕씨의 자서전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청등 부락에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