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전국에서 치러지는 제36회 공인중개사 자격시험에 16만5000여명이 응시한다. 최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의 공인중개사 수험서 코너./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소재 데이터 분석 업체의 팀장인 30대 최모씨는 이번 주말 공인중개사 2차(실무) 시험을 치른다. 지난해 1차 시험에 나란히 합격한 남편(40대·IT 기업 근무)과 함께다.

이 맞벌이 부부는 공인중개사로 전업할 계획은 없다고 한다. 최씨는 “수년간 오피스텔·아파트 매매 등 투자를 해왔는데, 전문 지식이 없으니 끌려다니는 느낌이 들었다”며 “부동산 관련 법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자격시험이란 수단을 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대형 병원 봉직의인 30대 백모씨는 내년 동차 합격을 목표로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억대 연봉 받는 의사가 시간 쪼개 공인중개사 수험서를 보고 있으니 주변에선 “본업이나 열심히 하지 웬 시간 낭비냐”고 했다.

하지만 그는 “요즘엔 같은 의사도 부동산을 알고 모르고에 따라 천지 차이”라며 “알면 종합병원도 세우지만, 모르면 개업해도 임차료 부담에 허덕이는 ‘부동산 호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부동산값 폭등 속에 공인중개사 자격시험 응시생이 26만여명 몰린 2022년, 서울 서대문구의 시험장에서 젊은 응시생이 시험실을 확인하고 있다. / 뉴스1 ⓒ News1

오늘(25일)은 1년에 한 번인 공인중개사 자격 시험일이다. 전국 응시생은 16만5000여 명. 지난해보다 1만여 명 늘었다.

이 시험은 주로 은퇴를 전후한 이들이 노후 대비로 도전해 ‘중년 고시’로 불렸지만, 요즘은 한창 일하는 2040이 과반을 차지한다. 의사 같은 전문직, 안정적인 대기업과 은행, 공직자도 몰린다. 그룹 세븐틴의 민규(28)도 최근 “부동산 투자할 때 용어라도 알려고 중개사 공부를 했다”고 말했다.

이는 장기 불황 속 취업난과 불안한 일자리, 무엇보다 정상적인 근로·금융 소득 증가율을 우습게 뛰어넘는 부동산 값 폭등이 낳은 현상이다.

최근 정부가 집값을 잡는다며 대출 규제와 토지거래허가제 등 고강도 규제를 잇달아 내놓으면서 전·월세난이 심화하고 내 집 마련 전망은 더 불투명해졌다. 실수요자들은 “착실히 일하며 저축이나 하다간 ‘벼락 거지’가 될 수 있다”며 부동산 공부에 몰리고 있다.

공인중개사 응시생 중 실제 중개소를 개업하려는 이는 많지 않다. 공인중개사 자격증 보유자는 전국 55만명이지만 영업 중인 중개사는 11만명이다. 80%가 ‘장롱 면허’인 셈. 장롱 면허인 걸 알면서 시험 보는 이들의 심리는 ‘어차피 해야 할 부동산 공부, 제대로 하자’는 것이다.

정부의 부동산 대출 규제와 토지거래허가구역 확대 조치로 전월세난이 가중되고 있다. 서울 아파트 평균 월세는 144만원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지난 21일 서울 시내 한 공인중개사에 게시된 월세 매물 정보. /뉴시스

대기업 과장인 이모씨는 “매달 부동산 대책이 쏟아지니 전 국민이 강제로 부동산 공부를 할 수밖에 없게 됐다”며 “동료들끼리 만났다 하면 부동산 얘기”라고 했다.

중견기업 직원인 조모씨도 “회사 근처 구축 아파트라도 사려고 임장(현장 답사) 다니고 경매 공부도 하다 보니, 중개사 시험까지 보면 성취감도 들고 장기적으로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정작 목표였던 집 구매는 값이 너무 올라 포기한 상태”라고 말했다.

은행원·공무원 등 워라밸이 좋은 직군에서 조용히 중개사 자격증을 따놓는 경우가 많다. 대형 은행 직원 나모씨는 “평일 2시간, 주말 6시간씩 반년을 집중 투자해 작년 동차 합격했다”고 했다. 부동산과 관련 없는 어느 공사에선 직원들이 스터디 그룹도 만들었다고.

영업 중인 기존 중개사들에 대한 불만도 ‘스스로 자격 갖추기’ 열풍에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직장인 커뮤니티 등에서 “받는 서비스에 비해 수수료가 비싸게 느껴진다” “전세 대출 사기 피해자들에게 중개사들이 아무 보호를 안 해주더라” “임장에도 수수료를 매기겠다던데 너무한 것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특히 ‘복비라도 아껴보자’는 심리가 크다. 10억원짜리 아파트를 사면 500만원 안팎 중개 수수료가 발생하는데, 이게 아깝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인중개사가 본인과 관련된 부동산을 직접 거래 중개하는 건 위법이다.

서울 전역과 경기 12곳을 규제 지역으로 지정한 10·15 부동산 대책 이후 내집 마련과 투자 전망이 불투명해지고 있다. 지난 19일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아파트숲. /뉴스1

다만 중개사를 거치지 않는 부동산 직거래가 폭증하는 건 사실이다. 지난해 주택 거래 5건 중 1건, 65만여 건이 매도·매수자 혹은 임대·임차인 간 직거래였다. 3년 새 124배나 늘었다.

중개사 자격을 딴 공무원 김모씨는 “모두가 아파트에 미친 나라에서 부동산은 최고의 ‘고관여 제품(구매 시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여야 하는 제품)’이 됐다. 중개사만 믿고 맡기기엔 불안하다”고 했다. 벤처기업을 운영하며 시험공부를 하는 박모씨도 “직접 권리분석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갖추는 게 목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