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위를 걷기 위해 스키에 부착한 ‘스킨(스키 바닥에 탈부착하는 미끄럼 방지용 테이프)’이 4번이나 떨어졌다. 이제 시작인데 남은 67일이 걱정된다. /김영미 제공

“하루 동안 스킨(스키 바닥에 탈부착하는 미끄럼 방지용 테이프)이 네 번이나 떨어졌다. 접어서 겨드랑이와 배꼽에 넣어 해동한 후 스키에 밀착하고 꼭 끌어안았다. 사랑해! 떨어지지 말자.”(2024년 11월 10일 / 운행 3일 차)

하루에 한 번씩 한 줄의 메시지를 비상 연락망에 보냈다. 내 위치와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GPS 장치인 ‘인리치’의 애플리케이션을 휴대폰에 설치해 왔다. 인리치는 한 시간마다 내 이동 거리를 온라인 지도에서 실시간 확인할 수 있도록 자동 업데이트해 줬다. 몇 km를 걸었는지, 날씨는 어떤지 누구나 확인 가능했다. 남극은 인터넷도 안 되고 위성 전화만 소통이 가능하다. 세상과 단절된 지구 반대편에서 오늘도 무사히 정상 속도로 걷고 있다는 일종의 생존 신고를 위한 장치였다. 매일 보내는 한 문장에서 내 안부를 짐작할 거라 여겼다. 짧은 인사에 힘든 넋두리를 늘어놓아 지켜보는 이들이 괜한 걱정을 하게 할 수는 없었다. 남극은 세상과 멀리 떨어진 고립의 공간이지만 이 작은 장비 하나로 나는 세상과 여전히 연결되어 있었다.

운행 3일째가 되니 젖산이 쌓이기 시작한 다리가 무겁다. 2일 차인 어제는 2022년 남극점까지의 초반 이틀 치 거리를 하루에 걸었다. 과거가 아닌 내일을 향해 에너지를 쏟고 있는데 2년 전의 나와 자꾸만 비교하게 된다. 아침에 출발하고 3시간 만에 스키에서 스킨이 떨어졌다. 몸이 피곤했는지 지난밤 꿈자리가 유난히 생생하고 사나웠다. 남극과 관련한 어떤 남자에게 억울함을 따지며 싸우는 꿈을 꾸다 새벽에 잠이 깼다. 스키에 생긴 문제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데 나는 뒤숭숭한 꿈 탓을 했다. 어쩌면 여기 있지도 않은 꿈속의 남자를 탓했는지도 모른다. 남극에 혼자 있는데 다른 이유를 찾으며 남 탓을 하고 있다. 누가 같이 왔다면 옆에 있는 사람 탓을 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싸우더라도 누군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 싶다. 이 상황을 다 이해하는 존재 하나만으로도 위로가 될 것 같다.

스킨 때문에 원정이 망할 수도 있다. 계획에 없던 옵션이고 내가 가장 두렵게 생각하는 불안이다. 2022년 남극점 때는 51일 동안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시작인데 남은 67일이 걱정된다. 물론 여분의 스킨이 있다. 하지만 지금 하나를 아예 못 쓰게 된다면 결국 하나만 남는다.

스킨과 스키가 빈틈없이 잘 붙어 있는 게 아주 중요하다. 이 스키는 크로스컨트리 스키의 남극 전용 모델이다. 스킨의 털이 뾰족하게 눈 속에 박히면 그 마찰로 스키가 미끄러지지 않고 오르막길도 걸을 수 있다. 스키가 무거워도 스키를 신으면 걷는 것보다 체력 소모가 적다. 떨어진 스킨을 접어 겨드랑이 사이에 넣었다가 가슴까지 오는 방풍 바지와 배 사이로 옮겼다. 냉기를 체온으로 녹여 스킨에 붙은 본드의 점성이 살아나게 하려는 것이다.

너무 낮은 온도 때문일까? 스키와 밀착되는 부분의 본드에 끈적임이 없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다리가 무거웠는데 걸음걸이에 계속 스킨이 신경 쓰인다. 2024년 봄, 노르웨이에서 다녀와 스키 플레이트가 녹슬지 않게 왁스를 입혀놨다. 아마도 왁스의 온도가 남극 환경과 맞지 않아서라고 의심했다. 걷다가 스킨이 떨어지면 스키를 벗어 가슴에 파묻고 꼭 끌어안았다. “사랑해! 떨어지지 말자!” 마법의 주문처럼 사랑을 담아 스키에 대고 속삭였다.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저녁에 텐트를 치고 스키를 텐트 안에 들였다. 우선 스키에 붙은 왁스를 긁어내 보기로 했다. 눈을 녹여 물 만드는 것도 바쁜데 큰 일거리가 추가되었다. 다음 날도 문제는 완벽히 해결되지 않았다.

※한국인 최초로 남극 대륙을 단독 횡단한 산악인 김영미의 ‘남극, 끝까지 한 걸음’을 격주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