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산 삼림열차가 숲속으로 운행하는 모습. 이 열차는 1912년, 대만을 식민 통치한 일본인들이 아리산 원시림의 삼나무와 편백나무를 수탈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었다. 인도의 다즐링 히말라야 철도, 칠레의 안데스 산맥 철도와 함께 ‘세계 3대 고산 철도’로 불리기도 한다. 대만 정부는 아리산 삼림열차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장련성 기자

대만 타이베이(臺北)에서 고속철도를 타고 남쪽으로 1시간 반쯤 달리면 자이(嘉義)역이 나온다. 아리산(阿里山), ‘대만의 지붕’이라는 별명이 있는 고산 지대로 향하는 여정이 시작되는 관문이다. 대만이 ‘국가 풍경구’로 지정한 아리산 전체 면적은 415.2㎢. 서울 면적의 70%에 이르는 광활한 지대다. 하나의 산이 아니라 동북아 최고봉 옥산(3952m) 등 18개 봉우리를 아우르는 고산 지대 전체를 일컫는다. 일출(日出), 운해(雲海), 저녁 노을(晚霞), 신목(神木), 철도(鐵道). 아리산의 다섯 가지 비경[五奇]이 여행자에게 얼굴을 드러낼 채비를 한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지난 1월 ‘2025년 꼭 가봐야 할 여행지 52곳’ 중 하나로 아리산을 선정했다.

◇아리산 혈맥 달리는 천상의 철도

아리산 여행의 서막을 가장 낭만적으로 여는 교통수단은 단연 삼림열차다. 자이역에서 버스를 타고 오르는 방법도 있지만 아리산의 심장부로 파고드는 경험은 덜컹거리는 객차 안에서 해야 제맛이다. 아리산 삼림열차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일본인들이 원시림의 삼나무와 편백나무를 수탈하고자 조성했다. 과거사를 무심하게 지나는 궤도 위에서 창밖을 보면, 아열대 식물이 가득한 평야는 어느새 서늘한 침엽수림으로 변모한다. 이내 짙은 안개로 흐려진 풍경을 감상하려 창문을 열면, 서늘한 공기와 짙은 편백 향이 밀려 들어온다.

해발 30m 평지인 자이역에서 해발 2200m가 넘는 아리산역까지, 불과 70여㎞ 구간을 오르기 위해 5시간 동안 터널 50개와 다리 77개를 지난다. 험준한 산세를 극복하고자 선로는 지그재그와 나선 형태를 반복하며 고도를 높인다. 이 독특한 구조 덕분에 인도의 다즐링 히말라야 철도, 칠레의 안데스 산맥 철도와 함께 ‘세계 3대 고산 철도’로 불린다. 대만 정부는 아리산 삼림열차의 역사적·기술적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2009년과 2015년, 두 차례 태풍으로 산사태 피해를 입으며 운행이 중단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복구 작업 끝에 지난해 7월 전 구간이 재개통되며 아리산의 혈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새로 도입한 신형 열차 ‘포르모센시스(Formosensis)’는 대만 편백나무의 학명을 따 이름을 지었다. 편백으로 장식된 아늑한 실내에서 은은한 향을 느낄 수 있다. 다른 신형 열차 ‘비비드 익스프레스(Vivid Express)’는 아리산의 다양한 생태계를 선명한 파란색·주황색·흰색·노란색으로 표현했다.

해발 고도 1000m가 넘는 고산 지대에 펼쳐진 차밭이 마치 지평선처럼 하늘과 맞닿아 있는 아리산의 풍경. /장련성 기자

◇신목의 숨결, 거대한 숲의 향기

해발 2138m. 붉은 삼림열차가 신목역(神木站)에 멈추는 순간, 여행자는 공기부터 달라졌음을 직감한다. 단순히 서늘하고 맑은 고산의 공기가 아니다. 수천 년 세월을 응축한 편백나무의 짙은 피톤치드 향이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그야말로 태고의 숨결이다. 시선을 돌리면, 선로 옆에 누운 장엄한 고목의 유해가 보인다. 아리산의 영원한 상징, 1대 신목이다.

1대 신목은 수령 3000년을 헤아리던 거대한 편백나무였다. 1956년 벼락을 맞아 생물학적 생을 다했지만, 잔해는 이후 수십 년간 꼿꼿이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1997년 폭우에 나무의 절반이 무너졌고, 1998년 안전을 위해 나머지 부분을 정중히 눕히는 의식을 치렀다. 현지인들은 “1대 신목의 육신은 잠들었지만, 거목의 영혼은 여전히 이 숲을 지키고 있다”고 말한다.

2007년 투표를 통해 수령 2300년의 향림신목(香林神木)을 2대 신목으로 지정했다. 신목은 대만의 젊은이들이 결혼식을 올리는 명소로 최근 주목받고 있다. 거목숲길(巨木群棧道)을 따라 걸으면 천 년 넘은 세월을 견뎌온 노송나무와 편백나무 군락이 펼쳐진다. 자연의 영원함, 인간의 유한성을 동시에 일깨우는 대성당 같다. 문득 안개가 숲을 감싸 신비로운 정적을 만들다가도, 이내 구름이 걷히며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경이로운 순간이 교차한다.

아리산의 한 티하우스에서 찻집 주인이 둥글게 말린 찻잎을 다기(茶器)에 넣고 있다. /장련성 기자

◇구름의 이슬, 전통의 향기 ‘차’를 만나다

신들의 정원에서 피어나는 향기는 숲에만 머물지 않는다. 아리산의 또 다른 정수는 바로 차(茶)에 있다. 아리산 고산 우롱차(烏龍茶)는 대만을 넘어 세계 최고급 차로 인정받는다. 우롱차의 본고장인 중국 푸젠성·광둥성 제품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비결은 아리산만의 독특한 기후에 있다.

해발 1000m 이상의 고지대, 낮에는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고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지는 극심한 일교차, 그리고 산허리를 언제나 감싸고 도는 풍부한 운무. 이 가혹한 환경 속에서 찻잎은 성장을 늦추고, 양분을 천천히, 그리고 깊숙이 응축한다. 이렇게 자란 찻잎은 아리산 차 특유의 달콤한 꽃향기와 부드러운 목 넘김, 그리고 입안에 오래도록 남는 청량한 뒷맛, 즉 ‘회감(回甘)’을 만들어낸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길을 오르면, 능선을 따라 펼쳐지는 초록 물결이 시야를 채운다. 차밭이다. 비탈에 자리한 아담한 다실(茶室)에 들어섰다. 장인이 직접 만든 찻잔이 편백나무 탁자 위에 정갈하게 놓였다. 아리산의 다실은 보통 숙박 업소를 겸한다. 주인들은 찻잎을 손수 덖고 말리는 생활인이자, 따뜻한 미소로 여행자를 맞는 안내자다.

가느다란 향 한 대를 피워 올리자 차(茶)의 의례가 시작된다. 뜨거운 물에 찻잔을 데우고, 차통에서 찻잎을 꺼내 다관에 담는다. 찻잎을 매만지고 물을 따르는 동작 하나하나가 정갈하다. 이윽고 아리산 차의 대표 주자인 우롱차의 향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꽃이 피어오르듯 화사하고 다채로운 향기. 맑은 단맛의 파장을 은은한 쓴맛이 이어받는다.

아리산 우롱차 특유의 화려한 향은 기후 조건에 더해 찻잎을 흔들어 부분적(20~80%)으로 산화시키는 제조 과정에서 나온다. 찻잎을 덖어 산화를 막는 한국의 녹차가 맑고 신선한 풀잎 향과 쌉쌀한 끝 맛을 지닌 것과는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아리산에선 찻잎을 완전히 산화시켜 꿀처럼 달콤하고 깊은 풍미를 지닌 홍차(紅茶), 솜털이 보송한 어린잎을 그대로 건조, 약하게 발효시켜 순수한 맛이 특징인 백차(白茶)도 생산한다.

아리산 원주민인 초우족의 고대 사슴 사냥터에서 풀을 뜯는 꽃사슴. /장련성 기자

◇초우족의 터전 아리산

이 땅을 수천 년 동안 지켜온 주인이 16개 대만 원주민 중 한 갈래다. 아리산이라는 이름 자체가 초우족의 영웅 아바리(阿巴里)에서 왔다. 이민족과의 싸움에서 백전백승을 거둔 추장인 아바리의 후손들이 지금도 조상을 기억하며 아리산 협곡 곳곳에서 터전을 일구고 있다. 해발 1300m에 있는 유유바스(優遊吧斯) 민속촌은 초우족 말로 ‘넉넉하고 건강하다’라는 뜻이다. 차밭 사이로 전통 양식의 티하우스가 보인다.

인근 ‘주루 부락 예술촌’은 초우족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테마파크다. 고대 초우족의 사슴 사냥터였던 이곳에선 여전히 꽃사슴들이 평화로이 풀을 뜯고 있다. 관광객들이 다가가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먹이를 달라고 보챈다. 원주민 전통의 염색 공예, 한국의 국궁과도 닮은 전통 활쏘기 체험을 할 수 있다.

주루 부락 예술촌에서 초우족 공연진이 전통 의상을 입고 방문자를 환영하는 춤을 추고 있다. /장련성 기자

화려한 전통 의상을 입은 초우족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박력 넘치는 함성으로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폴리네시아계 원주민들의 전통춤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실제 이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하와이키(마오리)’ ‘하와이(하와이)’ ‘사바이(사모아)’라고 부르는데 문화인류학자들은 하와이키가 바로 대만 섬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한다. 오래전 대만의 원주민들이 먼 바다를 건너 태평양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는 것이다.

‘아장의 집 23 카페(阿將的家23咖啡館)’는 소셜미디어 시대 젊은이들의 명소가 됐다. 가공하지 않은 천연 암석과 나무, 철근을 조합한 독특한 양식으로 건물을 지었다. 마치 동화 속 요정들이 사는 듯한 마을에서 커피 볶는 향기와 짚불이 타는 냄새가 연신 피어올라 신비로움을 더한다.

초우족 출신인 아장과 그의 아내가 어린 시절 전통 부락의 모습을 관광객들에게 알리겠다는 취지로 20여 년 조성했다. 쌀가루로 만든 와플 미쑹빙(米鬆餅)은 담백하고 부드러운 데다 인위적인 단맛도 거의 없어 질리지 않는다. 여기에 커피 가루와 설탕을 얹은 레몬 조각인 ‘연애의 맛(戀愛的滋味)’을 곁들인다. 아장은 “달콤 쌉싸름한 청춘의 사랑을 형상화한 맛”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아리산 타이핑 마을의 타이핑 구름다리. 해발 1000m 높이에 있는, 대만에서 가장 높은 곳에 조성된 가장 긴 현수교다. /장련성 기자

◇아리산의 여정, 끝나지 않은 이야기

해발 1400m 펀치후(奮起湖) 마을은 아리산 삼림철도의 옛 중간 기착지였다. 고산 기슭에 미로처럼 자리한 골목과 빼곡한 상점이 마치 타이베이 인근 명소 주펀(九份)을 연상시키는 까닭에 ‘남부의 주펀’으로 불린다. 이곳의 명물은 단연 100년 전 철도 노동자들이 먹었다는 철도 도시락(鐵路便當). 뚜껑을 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 위에 얹힌 돼지갈비(排骨)가 모습을 드러낸다. 두툼하게 튀겨낸 뒤 간장 소스에 조려내 달고 짜다. 제육볶음이나 돈가스 맛과도 비슷하다. 함께 곁들인 절임 채소와 두부·달걀 조림과의 조합도 괜찮다.

타이핑(太平) 마을의 타이핑 구름다리(太平雲梯)는 해발 1000m 높이에 있는 대만 최장(最長)·최고(最高) 현수교다. 다리 위에 서면 발아래로 흐르는 구름의 바다[雲海]. 하늘 위를 걷는다는 말이 실감된다. 저녁엔 이 운해 위로 노을이 번진다. 하늘과 구름이 서로에게 물들어 빚어내는 황홀한 색의 향연.

주산(祝山) 전망대에서 맞이한 일출, 츠윈사(慈雲寺)에서 기도하듯 바라본 저녁노을. 이 모든 순간을 평생의 보물로 간직하고 싶다면 해발 2200m, ‘천상의 우체국’이라 불리는 아리산 우체국(阿里山郵局)에 들르자. 사랑하는 이에게 엽서 한 장을 띄우는 순간, 아리산 나무와 차의 향기, 눈부신 모든 풍경이 가슴속에 봉인돼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