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이모(28)씨는 요즘 저녁 식사를 오후 4~5시에 한다. 1년 전 시작한 습관이다. “일찍 먹어야 속도 편하고 살도 덜 찌다 보니 주위 친구들도 많이들 그렇게 하더라”며 “번잡한 시간대를 피해 좀 더 조용한 환경에서 안정감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Z세대인 이씨는 퇴근 이후에는 집에서 운동을 하거나 TV를 보다가 오후 10시쯤 취침한다. “밖에서 뭘 하든 돈이 무섭게 빠져나가니 데이트는 필수 소비를 해결할 수 있는 집 근처 대형 마트에서 하는 편”이라며 “예전에는 외출도 잦고 귀가가 늦다 보니 피곤한 경우가 많았는데 주변 분위기도 많이 차분해졌다”고 말했다.

◇‘이른 저녁’이라는 뉴노멀

지난해 JW 앤더슨 패션쇼 당시 할머니 스타일로 런웨이에 오른 여성 모델. /게티이미지코리아

2030세대의 ‘얼리 디너(Early Dinner·이른 저녁 식사)’는 세계적 현상이 돼가고 있다. 미국 식당 예약 플랫폼 오픈테이블에 따르면, 올해 오후 5시 저녁 예약 비율(1~8월)은 전년보다 11% 늘었다. 오후 6시(8%)와 7시(6%) 예약 증가율을 상회한다. 얼리 디너는 적은 양으로도 포만감이 크고 잠들기 전까지 소화 시간이 충분해 혈당과 수면 안정에 도움을 주지만, 주로 노년의 식습관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시장조사 기관 퓨어스펙트럼이 미국 소비자 15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외식 트렌드 조사에서 얼리 디너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인 건 Z세대(53%)와 밀레니얼세대(51%), 즉 MZ였다. X세대와 베이비붐 세대(37%)를 앞섰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양로원에서나 볼 수 있던 ‘5시 석식’은 2025년 가장 놀라운 복고 트렌드 중 하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원격·탄력 근무 확산으로 식사 시간을 조절할 수 있게 된 환경적 요인도 있지만, 젊은 층의 건강 염려가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직장인 한모(38)씨는 “지금부터 챙겨야 노후에 신체적으로나 재정적으로 고생을 덜 할 것 같다”며 “최근 소셜미디어에 관련 콘텐츠가 많이 떠 저녁 식사도 일찍 하고 자극적인 환경은 되도록 피하려 한다”고 말했다. 입맛도 변하고 있다. 이를테면 쌀밥에서 잡곡밥으로. 지난 7월 발표된 하나로마트 소비 통계를 보면 지난해 백미 즉석밥 판매는 전년보다 9.1%, 잡곡밥은 22.1% 늘었는데, 이 중 30대 이하(39%)에서 증가율이 가장 높았다. 50대(22%), 60대(18%), 70대 이상(10%)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다. NH농협은행 관계자는 “간편함에 영양까지 챙기려는 움직임이 젊은 세대에 더 빨리 퍼지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처럼 평온하게

한 젊은 남성이 집에서 뜨개질을 하며 자신의 ‘그랜마 에라’를 드러내고 있다. /틱톡

불확실성의 시대, 심신의 안정을 갈구하는 움직임이 신세대 사이에서 거세지며 가장 안온한 삶의 방식을 일컫는 ‘Grandma Era’(할머니 시대)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할머니처럼 혼자 난로 옆에서 십자수를 놓거나 화초를 가꾸고 빵을 굽는, 혹은 “친구가 밖에 나가 놀자고 할 때”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등의 영상을 찍어 ‘Grandma Era’ 태그를 붙이는 게 광범위한 유행이 됐다. 외출을 삼가고 집에서 휴식에 집중하는 스스로를 ‘할머니’에 빗대는 것이다. 틱톡에서만 ‘Grandma Era’ 해시태그가 2000만회 이상 사용됐다. 한 젊은 남성이 집에서 뜨개질에 몰두하는 영상 말미에 자막이 뜬다. “어느새 뜨개질을 멈출 수 없게 됐다면 당신은 이미 그랜마 에라에 진입한 것입니다.”

KB경영연구소가 지난해 처음 내놓은 건강관리 리포트 ‘2024 웰니스 보고서’에 따르면, 성인 남녀 2000명의 정신 건강 자가 진단에서 ‘건강하지 못한 편’이라고 답한 비율은 20대(26.1%), 30대(26%) 순으로 가장 높았다. 정신 건강 문제 경험률 역시 20대(71.6%), 30대(69.8%) 순으로 최다였다. 사회 초년생의 ‘스트레스’(57%)가 주 이유. 연결의 피로함, 무해함에 대한 갈구가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격언의 실천으로 이어진 것이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관광청 조사에 따르면, Z세대가 야외에서 보내는 시간은 하루 49분에 불과했고 그중 24%는 출퇴근 시간이었다.

◇포근한 멋이 좋아요

‘그랜마 코어’ 옷차림으로 할머니풍 자개장 앞에 선 소녀시대 멤버 수영. /인스타그램

패션계는 최근 수년간 ‘할머니 스타일’에 비상한 관심을 보여왔다. 예스러움이 주는 정서적 포근함 때문이다. 할머니 옷장을 뒤지면 반드시 한 벌은 나올 법한 스웨터, 꽃무늬 누빔 조끼, 머리에 두르는 스카프 등의 복고풍 의상. ‘그래니 시크(Granny Chic)’ ‘그랜마 코어(Grandma Core)’로 불리는 트렌드가 등장한 배경이다. 빈티지 활용이 용이해 경제적이고, 꾸준히 지속 가능하다는 장점이 크다. 가수 제니(29)·지드래곤(37) 등이 대열에 앞장섰고, 여전히 유효하다. 핀터레스트가 ‘2025 가을 유행 보고서’에서 꼽은 강력한 유행 예감은 할머니가 으레 그러하듯 여러 옷감을 덧대 기운 패치워크(Patchwork)였다.

다소 심심한 취향, 그러나 의복뿐 아니라 취미·요리·인테리어 등 생활 전반으로 확장하고 있다. 지난 7월에는 뜨개질 브랜드 솜솜니트,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가구 회사 까사미아가 연 팝업 스토어 ‘소파 위의 하루, 시와 뜨개질’이 진행됐다. 그랜마 에라의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 유튜버 박막례(78)씨는 ‘좋은 것만 주고 싶은 할머니’를 콘셉트 삼아 쌀뜨물 등을 활용한 화장품 브랜드 ‘례례’를 론칭하기도 했다. 한 패션 업계 관계자는 “‘할머니 같은 취미’는 고루함이 아니라 따뜻하고 아늑한 기분 좋음의 표현이 돼가고 있다”고 했다.

◇내향형 청춘, 경제적 패배주의?

경제적 부담으로 대외 활동과 소비를 줄이고, 사적인 공간에서 안정을 추구하며, 스트레스 회피를 통해 건강에 몰두하는 Z세대의 이른 ‘할머니 라이프’는 심리적 생존 전략으로 풀이되곤 한다. 다만 사회 전반의 활력 저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제기된다. 한 국내 재테크 전문가는 “Z세대의 ‘그랜마 에라’는 문화 현상이 아니라 경제적 패배주의의 자화상”이라며 “새로운 아이디어와 자본은 부딪히고 충돌하며 생겨나는데 방 안에서 자수 놓고 있으면 세상은 결코 답을 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네트워크를 넓히고 밖으로 눈을 돌려 치열하게 기회를 노려야 할 시기에 ‘집콕’을 트렌드로 정당화하는 건 옳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활발한 도전이 발전의 전제 조건임은 분명하지만 불황 속에서 몸을 사리는 보호 본능이 발동하는 것 역시 당연한 현상”이라며 “이들이 에너지를 충분히 발산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려는 고민과 사회적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