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오아르미술관 1층 로비, 고분군을 향해 놓인 의자에 앉은 김문호 관장. 그는 “왕릉 뷰는 언제 봐도 좋다”며 웃었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개관 6개월 만에 18만명이 찾으며 천년 고도 경주의 명소로 떠오른 미술관이 있다.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작품’을 소장했기 때문이다. 작품의 제목은 ‘왕릉 뷰(view)’. 미술관 정면 전체를 차지한 폭 29m, 높이 12m 통유리창 ‘프레임’ 속에 신라 왕릉이 겹겹이 포개진 풍경이 거대한 단색화 같다.

노서동 고분군 옆에 자리 잡은 오아르미술관은 천년 고분과 현대미술이 공존하는 독특한 미술관이다. 미술관을 세운 김문호(63) 관장은 경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광고 영상 제작 PD로 일하다 30대 중반 일본으로 건너가 전단을 인쇄·배달하는 포스팅(posting) 업계에서 성공을 일군 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아르바이트하던 전단 업체 인수

-고향에 미술관을 지을 생각은 어떻게 하셨나요.

“대학 졸업하고 광고 대행사에서 광고 영상 제작 PD로 일했습니다. 광고를 어떻게 찍을까 구상할 때 그림 조각 등 예술품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지요. ‘어릴 때부터 작품을 많이 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경주에 문화재는 많지만 예술을 영유하기는 쉽지 않았거든요. 사람들이 예술을 많이 접하면 나중에 뭘 하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수집한 미술품이 많아져 전시할 공간도 필요했고요.”

-원래는 영화를 하고 싶었다고.

“어렸을 때 과거 경주 노동동 대왕극장 앞에 살았어요. 영화를 엄청나게 좋아해서 몰래 극장에 들어가 많이 봤죠.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이 어려서부터 있었어요.”

-대학은 공대로 진학했습니다.

“주위 반대가 워낙 컸어요. 가정 형편도 어려웠고요. 당시 취업이 100% 보장되던 공대로 갔죠. 하지만 공부해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어요. 결국 두 달 다니다 그만두고 재수해서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광고 대행사에 취직했습니다.

“영화로는 밥 먹기가 힘들더라고요. 광고가 당시 유행했어요. 영화나 광고나 같은 영상이다 보니 이것도 괜찮겠다 싶었어요. 수백 대 일 경쟁을 뚫고 금강기획 영상제작부 PD로 입사했죠.”

-광고 회사에서 몇 년 일하다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제 능력이 부족하더군요. 열심히는 했지만, 크리에이티브(creative)가 안 되더라고요. 아내가 ‘당신은 이 계통(광고 업계)에서 1등을 할 수 없다. 공부하는 걸 좋아하니 광고학을 해보면 어떨까. 실무 경험은 있으니 박사 학위를 따와서 대학교수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더라고요.”

전단을 배달하는 K&파트너스 직원(오른쪽)과 GPS로 전단 배달 상황을 실시간 모니터링하는 모습. /K&파트너스

-전단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은 겁니까.

“일본에서는 배달·인쇄·디자인 등 전단과 관련된 모든 일을 아울러서 포스팅 업종이라고 부릅니다. 광고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에 앞서 일본어를 배울 때였어요. 생활비를 벌려고 아르바이트를 찾았는데, 일본말을 잘 못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전단 배달이었어요. 석 달 정도 일했을 때 포스팅 업체 사장이 ‘나는 곧 은퇴하는데 회사를 이어서 해볼 생각 있으면 해보라’ 하더라고요.”

-외국인 알바에게 회사 인수를 제안했다고요?

“전단 뒷면 백지에 배달을 몇 시 몇 분에 시작해 마쳤는지, 배달하면서 있었던 특이 사항 등을 적어뒀다가 사장에게 줬어요. 사장이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이라며 깜짝 놀라더라고요. ‘당신은 공부보다 사업이 더 어울릴 수 있다’고 했어요.”

김 관장은 자신이 아르바이트하던 포스팅 업체를 1993년 인수했고, 1999년 K&파트너스를 세웠다. 일본 조치(上智)대학, 도카이(東海)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면서도 회사를 꾸준히 키웠다.

-회사 규모가 얼마나 되나요.

“연 매출이 15억엔(약 150억원) 정도로 일본 전체 포스팅 업계에서는 2등, 도쿄 23구(區) 200만 가구를 대상으로 하는 업체 중에서는 1등입니다.”

-일본에서 외국인이 보수적 업종인 포스팅에서 성공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일본 사람들은 열심히 하면 믿어주는 게 있더라고요.”

-어떻게 신뢰를 얻었나요.

“일단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전단을 돌리지 않고 돌렸다고 하는 업체가 많죠. 저는 새벽 3시부터 돌렸어요. 다른 업체들은 오전 9~10시에 전단 배달을 시작했는데 훨씬 일찍 시작했죠. 이렇게 하면 전단을 조간신문과 같이 볼 수 있으니 주목도나 이미지가 좋아지죠. 클라이언트에게 효과를 확인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는 해결책을 제시했어요. 아파트 관리인이 전단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든가 하는 배달 중 있었던 일들을 메모해뒀다가 리포트로 작성해 클라이언트에게 제공했습니다. 모두 일본 포스팅 업계 최초의 시도였어요.”

-GPS(위성 위치 확인 시스템) 등 디지털 혁신도 도입했습니다.

“우리 회사 직원들은 GPS 송수신기를 착용하고 배달합니다. 전단이 어떤 동선으로 어디에 배달되는지를 리얼 타임(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죠. 이렇게 노력하다 보니 ‘한국인 김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거짓말하지 않고 열정이 남다르다’고 소문나면서 일감이 밀려들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전단 등 인쇄 매체가 하향세입니다만.

“일본은 오히려 성장세입니다. 피자·스시 등 음식 배달뿐 아니라 선거 때도 정당 후보자들이 반드시 전단을 돌려요. 우리 회사도 올해부터 오사카·오키나와·홋카이도 등 도쿄 외 지역으로 확장하고 있어요. 곧 일본 포스팅 업계 전체 1등이 될 것으로 내다봅니다.”

오아르미술관의 ‘왕릉 뷰’는 미술관에 입장하기 전 유리벽에 비친 왕릉 감상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천년 고분과 현대미술의 조화

오아르미술관은 평일 오전 이른 시간임에도 북적댔다. 관람객들은 통유리창을 향해 놓인 의자에 앉거나 서서 왕릉을 감상하고 있었다.

-개관 6개월 만에 관람객 18만명이 넘었습니다.

“주말 등 많을 때는 하루 3000명도 옵니다. 입장권을 구매한 분들만 헤아려 그 정도이고, 1층 로비에서 왕릉 뷰만 감상하고 간 분들까지 합치면 1.5배 더 많을 거예요.”

-오아르(OAR)는 무슨 뜻인가요.

“‘오늘 만나는 아름다움’의 줄인말입니다. 브랜딩 업체에서 제안한 이름 중에서 직원 회의를 거쳐 결정했죠.”

-하필 고분군 옆에 미술관을 지은 까닭은.

“경주다운 곳에 짓고 싶었습니다. 우리 컬렉션은 다른 미술관보다 떨어집니다. 피카소·모네 등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작품은 없어요. 그럼에도 사람들이 찾게 하려면 경주다운 위치와 풍광이 있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경주답게 가면 세계적 작가들을 섭외해 전시하기도 쉬울 거라고 봤고요.”

-유현준 건축가가 자신의 첫 설계안을 스스로 뒤엎었다고요.

“원래는 화려하고 튀는 외관을 가진 미술관을 원했습니다. 기교가 있는 건물을 짓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유 건축가도 그런 설계를 해줬어요. 하지만 현장에 다시 와보더니 ‘이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하더군요. ‘이 미술관의 주인공은 고분이다. 고분이 살 수 있는 심플한 디자인으로 가자’고 하더라고요.”

-단순한 건물이 내키지 않았다고요.

“여기가 모텔이 있던 자리예요. 그때는 이런 뷰가 나오지 않았어요. 유 건축가는 뷰가 너무 좋다는데, 저는 모르겠더라고요. 준공 몇 달 전 커튼을 치우고 처음으로 2층에서 내다봤어요.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인 뷰였어요.”

오아르미술관 로비에서 왕릉 뷰를 감상하는 관람객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미술품 컬렉션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바빠서 골프 등 취미 생활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우연히 도쿄 백화점에서 조선 막사발을 봤어요. 일본에서는 이도다완(井戶茶碗)이라며 귀하게 여기죠. 막사발을 보는데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우리 막사발이 왜 여기 와 있어’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막사발을 찾아다녔어요. 종류별로 모아서 한국으로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죠.”

-현재 컬렉션 600여 점 대부분이 현대 작품이죠.

“우연히 로카쿠 아야코(六角彩子)의 작품을 접했습니다. 맨손가락으로 독특한 그림을 그리는 일본 유명 작가죠. 처음에는 별로였지만, 볼수록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천진한 매력에 빠졌어요. 그때부터 현대미술을 좋아하게 됐고, 모으게 됐습니다.”

-젊은 관람객이 대부분일 줄 알았는데 중장년층이 많습니다.

“예상 밖이었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도 현대미술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현대미술품과 신라 고분의 대비가 절묘합니다.

“전 세계에서 과거와 현대가 이보다 더 조화를 잘 이루는 미술관은 없을 겁니다.”

-언제 어디서 보는 왕릉 뷰가 최고인가요.

“개인적으로는 2층에서의 왕릉 뷰가 특히 감동적입니다. 하루 중에서는 오전 10시 30분~11시가 좋더라고요. 석양에 옥상에서 바라보는 뷰도 매력 있는데 그 시간대에는 관람객이 거의 없어요. 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가을이면 왕릉을 덮은 잔디가 황금빛으로 변해요. 비 내리는 날 잔디가 맑은 초록빛이 될 때는 정말 환상적이에요. 눈 내릴 때도 분위기 있고요. 왕릉 뷰는 언제라도 좋네요.”

-APEC을 맞아 소장품 기획전 ‘잠시 더 행복하다’를 오늘(18일)부터 선보이네요.

“미술관 소장 회화와 영상 작품 49점을 공개합니다. 이우환, 박서보, 이배, 하종현, 줄리안 오피, 쿠사마 야요이 등 작가 29명의 작품으로 한국 현대미술과 국제 미술을 조망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작품 앞에서 잠시 멈춰 숨 고르기 하듯, 마음의 여유와 위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미술을 모르는 분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전시를 많이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