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누군가의 진심 어린 말 한마디가 인생의 방향을 바꾸고, 닫혀 있던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기도 한다. 인상주의 창시자 클로드 모네(1840~1926)에게도 그런 값진 조언자가 있었다. 노르망디 출신의 풍경화가 외젠 부댕(1824~1898).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인 야외 사생(寫生)의 세계로 모네를 처음 이끈 사람이었다. 부댕의 권유와 격려는 젊은 모네의 운명을 바꾸며 19세기 미술 혁명, 인상주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캐리커처에서 풍경화로
이야기는 1856년 봄, 모네가 소년 시절을 보낸 프랑스 항구 도시 르아브르(Le Havre)에서 시작된다. 열여섯 살의 모네는 잡지 삽화가의 꿈을 품고 지역 명사들의 얼굴을 익살스레 풍자한 캐리커처를 그리며 제법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빠른 손놀림, 인물의 특징을 포착하고 과장하는 소년의 재능은 분명 뛰어났다. 모네가 그린 당시 캐리커처는 그의 예리한 관찰력과 순간 포착 능력을 잘 보여준다. 그 시기 모네는 무려 800여 점의 캐리커처를 그렸고 판매도 잘돼 벌이가 꽤 좋았다고 전해진다. 다만 그의 관심사는 인물과 풍속에 머물러 있었고 미래는 흐릿한 안갯속 같았다.
어느 날, 모네의 그림을 팔던 화구점 주인이 32세의 한 화가를 모네에게 소개한다. 외젠 부댕. 노르망디의 바다와 하늘을 그리는 외광파(外光派) 대표 화가로 지역 화단에서 명성을 쌓은 인물이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발생한 외광파는 말 그대로 태양 광선에 의한 빛과 색채의 변화를 포착하기 위해 야외에서 그린 그림을 일컫는다. 그 시대의 풍경화 작법은 야외에서는 간단히 스케치만 한 뒤 스튜디오로 돌아와 기억을 떠올리며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부댕은 이런 관행을 거부하고 “자연에서 얻은 세 번의 붓놀림은 스튜디오에서 보낸 이틀의 시간과 같다”며 이젤을 들고 해변이나 항구로 나가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어색하기만 했다. 모네는 부댕의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화풍을 끔찍하다고 느꼈다. 작업실에서 공들여 완성한 작품에 비하면 너무 거칠고 덜 완성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반면 부댕은 자신보다 열여섯 살이나 어린 모네의 그림에서 재능을 발견하고 따뜻한 조언을 건넨다. “젊은이, 자네의 캐리커처는 재미있지만 예술은 아니네. 바깥으로 나가 바람과 빛을 느끼며 그림을 그려보지 않겠나.” 이 말 한마디가 모네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된다. 망설이던 모네는 노르망디 바닷가를 따라 야외 사생에 나선다.
◇“그가 내 눈을 열어줬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과 안개, 바다의 반사광까지 놓치지 말고 그려내야 한다고 부댕은 모네에게 가르쳤다. 처음엔 낯설기만 했던 야외 사생이었지만 모네는 하늘과 바다가 섞이며 자아내는 색의 변화를 몸으로 익히게 된다. 회화의 주제가 바뀐 것은 물론, 세상을 보는 그의 시선이 완전히 달라진 순간이었다. 모네는 훗날 이렇게 회상한다. “부댕이 내 눈을 열어줘 마치 눈앞에서 베일이 갑자기 걷히는 것 같았다. 처음 하늘의 아름다움을 알게 돼 바다와 빛, 공기를 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 순간 나는 화가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모네의 그림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 질문에 답이 되는 작품이 모네가 부댕을 만나고 2년 후 그린 ‘루엘 근처의 풍경’이다. 르아브르 근처 루엘(Rouelles)의 마을 풍경을 그린 부댕과 모네의 작품을 나란히 비교해 보면 모네가 부댕의 외광파 스타일을 얼마나 빠르게 받아들였는지 금세 알 수 있다.
그림 속 드넓게 펼쳐진 하늘, 지평선을 따라 구성된 수평 구도, 구름과 빛의 움직임을 쫓는 자유로운 붓질까지 두 사람의 그림은 무척이나 닮아 있다. 스승의 조언을 실천에 옮긴 첫 결과물이자, 새로운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증거. 1859년 모네는 파리로 향한다. 캐리커처를 팔아 모은 돈으로 스위스 아카데미에 입학해 본격적인 미술 교육을 받게 된다. 파리의 화실에서도 모네는 자주 바다를 그리워했다. 그는 종종 르아브르로 돌아가 부댕과 교류를 이어갔다. “저는 당신을 무척 만나고 싶어 하는 풍경화가들의 작은 모임에 들어갔어요. 그들은 진정한 화가들입니다.” 1860년 모네가 부댕에게 보낸 편지에는 예술적 동지를 향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
◇해돋이처럼 떠오른 모네
1874년 4월 15일. 파리의 나다르 사진관 2층에서 미술계를 뒤흔든 전시가 열렸다. 주류 살롱전(展)에서 외면당한 젊은 화가들이 ‘독립 작가전’을 기치로 내걸고 작품 발표 무대를 자체적으로 마련한 것이다. 훗날 인상주의 출발점으로 불리게 된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다. 당시 살롱전은 화가가 되는 절대적 관문이었지만, 그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성경이나 신화, 역사 같은 전통적 주제와 아카데미 회화 기법이었다. 모네와 동료들의 새 화법은 미완성이라는 비난 속에 보수적인 살롱전의 문턱에서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러자 이들은 심사도 수상도 없는 예술의 장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미술의 자유를 선언한 이 전시회에 모네는 부댕을 참여 작가로 초대했다. 스승이자 선배에게 바치는 존경의 표현이었다. 부댕은 흔쾌히 작품을 출품했지만 자신의 작품 세계를 특정 사조로 규정짓는 데는 거리를 뒀다. 그는 인상주의 그룹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후배들의 실험을 조용히 응원했다. 오늘날 부댕이 인상주의 정신을 세상에 심어준 씨앗으로 불리는 이유다.
이 전시회에 모네가 출품한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인상, 해돋이’다. 대상을 정확하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대신 안개 자욱한 항구 위로 지금 막 떠오른 태양이 만들어낸 순간적 인상을 거친 붓질로 담아낸 그림. “나는 해돋이를 그린 게 아니라 그 인상을 그렸을 뿐”이라는 모네의 선언이자 도전. 관람객은 충격에 휩싸였고, 이 작품은 즉각 논쟁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비평가 루이 르루아는 “벽지보다 수준 낮은 그림”이라며 신문에 조롱조의 글을 실었다. 그는 작품 제목인 ‘인상’이라는 단어를 비꼬며 전시에 참여한 화가들을 싸잡아 ‘인상주의자’라 불렀다. 모네와 그의 동료들은 그 조롱을 오히려 새 미술 운동의 공식 명칭으로 받아들이며 기존 미술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인상주의는 이제 혁신의 상징이 됐다.
◇스승과 제자의 실험
1892년, 모네는 인상주의 거장이 된 이후에도 안주하지 않고 ‘루앙 대성당’ 연작에 도전하며 더 넓은 회화의 지평을 열게 된다. 그는 풍경을 넘어 시간을 그리기 시작한다. 모네가 시간을 다루는 이 발상은 오래전 부댕에게서 싹튼 것이다. 부댕은 노르망디 해안의 같은 장소를 다른 시간, 다른 날씨 속에서 수백 번 관찰하며 빛과 공기의 변화가 대상의 색을 어떻게 바꾸는지 집요하게 화폭에 옮겼다. 그의 실험은 당시로선 상상조차 하기 힘든 도전이었지만 200점에 달하는 트루빌(Trouville) 해변 연작은 회화가 시간을 담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부댕의 실험 정신은 모네에게로 이어졌다.
‘루앙 대성당’ 연작은 고딕 성당 서쪽 정면을 관찰하며 특정 순간의 빛과 대기 효과를 표현한 그림이다. 같은 건물, 같은 구도여도 아침에는 분홍빛, 흐린 날엔 회색빛, 석양 속에서는 황금빛으로 변모한다. 모네는 매일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임시 스튜디오를 마련하고 동시에 여러 캔버스를 오가며 그림을 그렸다. 빛이 바뀌는 순간 다음 캔버스로 옮겨 가며 대성당을 감싸는 빛과 대기의 찰나를 담아냈다. 1895년 모네가 ‘루앙 대성당’ 연작 20점을 뒤랑뤼엘 화랑에 나란히 배치했을 때 관람객들은 숨을 멈췄다. 정지된 한 점 한 점의 그림이 시간의 경과와 광학적 변화 과정 전체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언, 미래를 여는 첫걸음
1898년 외젠 부댕이 74세로 눈을 감았다. 모네는 스승의 유고전을 직접 조직하며 마지막 예우를 다했다. 생의 끝자락에서 그는 전기 작가 귀스타브 제프루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모든 것을 부댕에게 빚지고 있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모네는 비평가 마르크 엘더와 한 인터뷰에서 가장 속 깊은 고백을 남긴다. “부댕은 나를 발견하게 해주고 바른길로 이끌었다. 첫걸음은 얼마나 중요한가.” 모네와 부댕의 관계는 우리에게 말해준다. 누군가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건넨 멘토링이 그 안의 잠재력을 일깨우고 새 인생을 여는 첫걸음이 될 수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