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풍운아, ‘건달 할배’ 채현국(1935~2021)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88년 가을이다. 그땐 채 선생이 어떤 분인지 전혀 몰랐다. 학위를 받고 갓 귀국한 내가 김상기 교수의 서울대 대학원 세미나를 청강할 때다. 헤겔 ‘정신현상학’에 대해 김 교수와 가장 격렬한 논쟁을 벌인 이는 철학 교수나 대학원생들이 아니라 허름한 차림의 채 선생이었다. ‘저분이 대체 누구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뜨거운 논전이 이어졌다.
강의 뒤풀이 자리에서 채 선생의 사자후(獅子吼)는 충격이었다. 채현국 선생은 백면서생이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열정의 인간이었으며 장터의 철학자였다. 탑골공원 근처에서 저렴한 국밥을 사주면서 활짝 웃던 모습이 호탕했다. 그해 겨울 채 선생과 여러 곳을 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책에선 배울 수 없는 절절한 경험이었다. 작은 체구의 채 선생은 돈과 권세, 명예라는 세상 문법을 초월한 자유인이었다.
채현국 선생은 철학도 출신이면서도 탄광 운영으로 1960~1970년대 전국 개인소득세 납부 순위 10위 안에 든 성공한 경영자였다.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 그는 탄광 노동자 처우를 파격적으로 개선해 노동자들의 주인 의식을 높였다. 쫓기는 민주화 운동 인사들도 아낌없이 후원했다. 마지막엔 ‘재산은 내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이라며 회사 자산을 정리해 직원들에게 나누었다. 채 선생은 운영하던 중고교에서도 학생과 학교를 중심에 세웠고 모든 걸 사회에 환원한 후 빈손으로 돌아갔다.
다큐 영화 ‘어른 김장하’로 만난 김장하 선생도 신선한 충격을 준다. 김 선생은 한약방으로 쌓은 수백억 재산을 교육과 지역 문화 사업에 평생 쾌척해 왔다. 홀가분하게 은퇴할 때까지 자신을 알리지 않은 채 묵묵히 선행을 이어온 김 선생의 삶은 그만큼 울림이 크다.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자신의 삶을 증명해 온 멘토의 모습이다. 독침 같은 언어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김장하 선생의 온유하고 선한 일상이 맑은 가을바람처럼 상쾌하다.
한 계절 스쳐 지나간 타인에게조차 최선을 다해 진력하던 채현국 선생과의 ‘그해 겨울’이 생생하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채 선생 같은 분은 만난 적이 없다. 자아의 철벽에 갇힌 책상물림에겐 파격적인 개안(開眼)의 경험이었다. 그 몇 년 후 인사동 길에서 우연히 만난 선생은 여전히 호방하고 따뜻했건만 무심한 나는 경의를 담아 졸저 몇 권만 보내드렸을 뿐이다.
채현국 선생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선생의 별세 몇 년 전 국제 학술회의 자리였다. 학회 쉬는 시간에 백발노인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큰 소리로 ‘윤 형!’ 하고 부르는 것이다. 채 선생이었다. ‘윤 형을 만나려고 왔다’는 게 그분 말씀이었다. 까마득한 후학에게 ‘윤 형’이라 부른 것도 놀라웠고 그동안 한 번도 연락드리지 못한 터에 멀리까지 찾아오신 것이 고맙고도 송구했다.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다.
채현국 선생은 공허한 말을 넘어 이론과 실천을 통합해 낸 진정한 철학자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따뜻한 인간이었다. 김장하 선생도 소탈하고 부드럽다. 채 선생과 김 선생은 인간의 선의와 이상을 삶으로 실천한 ‘우리 시대의 현자(賢者)’들이다. 두 분은 자신을 ‘위인’으로 떠받들려는 세간의 평가를 단호하게 뿌리친 겸허함에서도 닮았다.
어른 없는 사회는 불행하다. 모두가 존경할 수 있는 멘토가 부재한 시대는 쓸쓸하다. 부와 권력, 나이와 자리만을 앞세우는 ‘꼰대’들이 득세하는 세상 저 반대편엔 ‘어른 채현국’과 ‘어른 김장하’가 우뚝 서 있다. 말로만 정의와 진리를 외치는 지금의 세태를 꾸짖는 침묵의 웅변이다. 황폐한 세상에서도 어른 김장하가 있어 마음이 치유된다. 어른 채현국을 만난 그해 겨울은 밤하늘을 밝힌 불꽃 같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