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서울 월드케이팝센터 크레스트72에서 열린 서울시니어모델페스티벌. 가운데 참가자가 최고령인 80세였다./ 장련성 기자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신규 재건축 아파트 단지. 주민 공동 시설 한 코너에 ‘아너스 클럽(Honors Club·명예로운 이들의 모임)’이란 간판이 달렸다. 입주민들이 “도대체 뭐하는 데냐?”며 술렁였다.

아너스 클럽은 통상 성적 우수자, 고액 후원자나 우수 고객 등을 가리키기 때문에, “큰 평수에 사는 조합원 혹은 특별한 경력을 가진 부유층의 사교 클럽 아니냐”는 억측이 나왔다고. 알고 보니 이 시설은 어느 동네에나 있는 평범한 ‘경로당’이었다.

나이가 들어 늙은 사람, 노인(老人)을 노인이라 부르지 않는 풍조가 거세다. 65세 이상을 통칭하는 노인이란 용어는 법적·행정적 개념으로만 남아 있을 뿐, 경멸과 폄하로 느껴진다는 이유로 민간에서 기피 언어가 된 지 오래다.

서울 강남의 한 재건축 아파트 단지에 등장한 ‘아너스 클럽(명예의 전당)’. 사실은 평범한 경로당이라고 한다. /정시행 기자

1998년 사회복지협의회가 제안한 ‘어르신’을 시작으로 ‘시니어’ ‘실버’ 같은 각종 노인 완곡어(euphemism)가 퍼졌지만, 이 역시 피로감이 커져 사용을 꺼리는 추세다.

베이비부머가 대거 60대로 접어들며 한국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인 초고령사회로 진입했다. 70대 인구가 20대 인구보다 많다. ‘늙음’의 기준이나 노인에 대한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이에 따라 노인 대상 서비스인데도 노인을 암시하는 표현을 빼는 게 새로운 예의가 됐다. 이는 연령에 따른 구분 자체를 없애려는 시도로도 이어진다.

최근 강원도의 한 노인복지관에서 “내 호칭은 내가 정한다”는 슬로건 아래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직원들에게 어떻게 불리기를 원하는지 묻는 설문 투표를 했다. 그 결과 ‘회원님’이 49% 찬성을 얻어 선정됐다. ‘어르신’과 ‘어머님/아버님’ ‘선생님’은 각각 10%대로 그 뒤를 이었다.

올봄 한 노인복지관이 실시한 호칭 선호도 조사에서 ‘어르신’이나 ‘아버님/어머님’을 제치고 ‘회원님’이 1위 득표로 선정됐다. /춘천남부노인복지관

전국 공공·민간 노인 시설에서 이런 호칭 설문이 유행인데, 2~3년 전까지도 ‘어르신’이 약간 우세했다면 지금은 나이 요소를 배제한 ‘회원님’ ‘고객님’ ‘선생님’ 선호가 압도적이라고 한다.

한 노인 전문 병원 관계자는 “요즘 분들은 ‘어르신’이란 말조차 싫어하신다. 70세 환자가 ‘내가 왜 그쪽 어르신이에요?’라고 반문한 적도 있다”면서 “그냥 ‘환자분’이 가장 안전하고, ‘교장선생님’ ‘지점장님’ ‘대표님’ 등 왕년의 직함을 불러 드리면 좋아하신다”고 전했다.

수영장에선 할머니뻘도 ‘언니’라 부르는 게 국룰이다. ‘여사님’은 나이 지긋한 여성 근로자를 이르는 표현처럼 돼 금물이라고. 자식 없는 비혼·딩크족이 나이 들어가며 ‘어머님/아버님’도 함부로 쓸 수 없게 됐다.

1998년 한국사회복지협의회가 공식 법정 용어인 '노인' 대신 존경의 마음을 담은 유화어(완곡어)인 '어르신'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20여년 지난 지금은 '어르신' 역시 퇴조하는 추세다. /조선일보DB

노인을 아름답게 지칭하기 위한 각종 시도, 특히 관(官) 주도 캠페인은 실패하기 십상이다. 2023년 경기도에서 노인은 복지 수혜의 대상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끌어나가는 경륜 있는 존재라는 의미를 담아 ‘선배 시민’으로 부르자는 조례가 통과돼 전국에 퍼졌지만 현장에 뿌리내리지 못했다. “뭔가 해달라는 기대가 풍겨 부담스럽다”는 말이 많았다. 다소 억지스러운 ‘신중년’이나 ‘장청년(청년과 장년 사이)’도, 서울시가 제안한 ‘현인’도, 대한노인회의 ‘혜인’도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20여 년간 유행한 시니어·실버·그레이도 영어를 아는 고학력 노인이 늘면서 찬밥 신세다. 고급 노인 요양 시설은 수년 전부터 ‘△△시니어 레지던스’ ‘○○실버타운’에서 시니어와 실버를 들어낸 그냥 ‘레지던스’ ‘타운’ ‘하우징’이 되고 있다. 이젠 ‘더클래식500’ ‘VL르웨스트’ ‘노블카운티’처럼 노인 시설이란 암시조차 없이 고가 아파트·레지던스 같은 느낌만 줘야 각광받는다.

부산에 들어선 '오시리아 메디타운'. 이름이나 외양만 봐선 짐작하기 힘들지만 시니어 하우스, 노인 요양시설이다. /땅집고

공식 용어인 경로당 역시 당초 노인정을 대체한 완곡어였는데, 10여 년 전부터 ‘시니어센터’ ‘효의집’ ‘신중년전당’ 등으로 바뀌더니, 이제 ‘아너스 클럽’처럼 부와 영향력을 강조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빅데이터 전문가인 송길영 전 다음소프트 부사장은 “장수 사회에서는 기술·문화적으로 연령대별 차이가 작아져 시니어들도 지나친 배려를 원하지 않는다. 70~80대에도 여전히 젊기 때문에 시니어 같은 표현 자체가 적합하지 않아졌다”며 “굳이 말하면 ‘건강에 신경 쓰시는 분’ 정도가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