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검은 모자에 완전 반했다(That black hat blew me up).”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워(so hauntingly beautiful).”

KPOP DEMON HUNTERS - When they aren't selling out stadiums, Kpop superstars Rumi, Mira and Zoey use their secret identities as badass demon hunters to protect their fans from an ever-present supernatural threat. Together, they must face their biggest enemy yet – an irresistible rival boy band of demons in disguise. ©2025 Netflix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에서 보이그룹 ‘사자보이즈’가 쓴 흑립(黑笠·갓)에 해외 팬들이 보낸 반응이다.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에 세워진 김대건 신부 성상은 갓을 쓴 차림으로 주목받았고, 국립중앙박물관 뮷즈(뮤지엄+굿즈) ‘흑립 갓끈 볼펜’은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갓이 외국인의 관심을 끈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19세기 조선을 찾은 서양인들은 조선 사람들의 모자에 끌렸다. 고아한 형태와 기능적 완결성, 내재된 사회적 의미까지 미지의 나라 조선을 이해하는 통로가 됐던 것.

“갓은 서양에서 유행하는 실크 햇과 같은 등급을 매길 만한 훌륭한 발명품이다. 매우 잘게 쪼갠 대나무와 아주 가느다란 비단실이 재료로 쓰이는데 대나무가 비단실의 뼈대를 이룬다. 그러나 너무나도 섬세하게 짜기 때문에 어느 것이 대나무이고 어느 것이 비단실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펴낸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갓을 이렇게 평가했다. 프랑스 민속학자 샤를 바라는 조선을 ‘모자의 나라(Le pays des chapeaux)’라고 불렀다.

'케데헌' 인기에 새삼 주목을 받았던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의 김대건 신부 성상. 역시 갓을 쓴 차림이다. /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그랬던 갓은 이제 쓰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거의 없다. 전국 장인(匠人) 4명이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국가무형유산) 4호 갓일 입자장(笠子匠)으로 지정된 박창영(82) 선생은 4대째 140년간 계속된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갓 만드는 작업을 ‘갓일’이라고 한다. 컵을 엎어놓은 것 같은 봉긋 솟은 부분인 ‘총모자’, 레코드판 같은 차양 부분인 ‘양태’, 총모자와 양태를 연결하고 명주를 입히고 옻칠을 해 갓을 완성하는 ‘입자’로 분업화돼 있다. 현재 입자장이 2명, 총모자장과 양태장이 1명씩 있다.

“젊어서는 추석을 앞둔 이맘때는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할 정도였는데, 세상이 변한 걸 어쩌겠습니까. 그저 바르고 단정하게 갓을 완성해가는 일이 제 인생이 됐을 뿐이지요.”

1년에 한두 개 팔기도 어렵지만 장인은 매일 아침 작업장에 나와 대나무를 다듬어 죽사(竹絲)를 뽑고 갓을 만든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성실한 직장인 같다. 그는 말수가 많지 않았다. 진열장에 있는 갓 몇 개를 보여주고는 “양태의 둥그마한 곡선과 투명한 검은빛의 화사함을 느껴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검정도 투명하고 화사할 수 있었다.

갓일 명가는 4대째 박창영 선생에게서 5대째 박형박 이수자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부자 앞에 놓인 완성 단계인 갓 가격이 2000만원 정도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경북 예천군 돌티마을

박창영 선생은 경북 예천군 예천읍 청복리 816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 예천군 돌티마을은 갓의 명산지로 유명했다. 당시만 해도 80가구 중 절반 이상이 갓을 만들었다. 박 선생의 증조부 때 시작해 조부·부친과 백부·중부까지 모두 갓을 만들었고, 그의 외조부도 예천에서 대규모 갓방을 운영했다.

-갓일을 하는 건 숙명이었네요.

“중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부터 일을 배웠습니다. 그때만 해도 갓은 쓰는 사람이 꽤 많았고 가격은 비싸서 괜찮은 직업이었어요. 갓 하나 값이 쌀 다섯 가마니와 맞먹는 정도였거든요. 예천에서는 길거리의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였지요. 유림이 주요 고객인데 명절에는 바빠서 정신이 없었죠.”

-가족 사업이 번창했는데 왜 상경했나요.

“갓 수요는 점점 줄어들고 1970년대 새마을운동 이후로는 더 이상 비전이 보이지 않았어요. 저희뿐만 아니라 공예를 하는 장인들 대부분이 서울 인근으로 옮겨왔습니다.”

새로운 판로를 찾아 서울로 옮긴 게 1978년이었다. 박 선생은 TV 드라마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방송국을 찾아갔다. “무조건 윗사람을 찾아 ‘내가 만든 갓을 써달라’고 했어요. 전국을 뒤져도 저처럼 갓을 만드는 사람은 못 찾을 거잖아요. 자신이 있었죠. 그래서 영화 ‘스캔들’, 드라마 ‘거상 김만덕’ ‘명성황후’ ‘장희빈’ 같은 사극에 제가 만든 갓이 쓰였습니다.”

-요즘도 주요 고객인가요?

“갓이 비싸요. 갈수록 제작비를 아끼려고 하니까 이제는 별로 찾지 않아요. KBS 의상실에 가면 예전에 납품한 갓이 꽤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한 번씩 수선 의뢰가 오는데, 재활용해서 새로운 드라마의 주인공 몫으로 쓰기도 합니다.”

이후로 ‘대량 공급’할 만한 수요처는 사실상 사라졌다. 국악인들이 더러 찾는 정도다. 하지만 그에게 갓일은 생계보다 예술, 사명으로서의 의미가 커졌다. “벌이가 안 된다고 내가 관두면 누가 합니까. 여기서 사라지는 거예요. 이제는 저만 할 수 있는 일이고, 제가 제일 잘하는 일이고요. 평생 선비 지조의 상징인 갓을 만들다 보니 제가 지조를 지키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는 전통 갓을 재현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궁중유물전시관에 소장된 ‘철종 어진’에 나오는 갓인 전립(氈笠)과 사대부들이 썼던 박쥐 문양 갓, 국상 때 주로 썼던 백립(白笠) 등을 재현했다.

-가장 아끼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철종 어진 전립이요. 전립은 왕이 군복에 착용하는 갓이에요. 1년 정도 씨름을 했나 봐요. 유물을 찾아다니면서 조선 시대 갓을 관찰하고 제작 방법을 연구하고 시행착오도 겪고요.”

-완벽히 재현했다고 생각하시나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고 평가해줍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선수라고 하지만 선조들의 솜씨가 훨씬 훌륭한 것 같아요. 섬세하고 기술적 완성도가 높아요. 따라 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박창영 선생이 재현한 ‘철종 어진’ 전립. /박형박씨 제공·서헌강 사진작가

◇5대째로 이어진 가업

갓일은 조선 시대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다. 그의 공방에 있는 인두나 창칼(대나무를 다듬을 때 쓰는 작은 칼) 같은 도구도 대장간에 일일이 주문 제작하는 방식. 모자 형태를 잡을 때 사용하는 틀인 ‘골댕이’도 크기별로 손에 익숙한 모양으로 제작한다. 예전엔 숯불에 인두를 달궜지만 지금은 전기레인지를 사용하는 정도만 달라졌을 뿐, 재료와 도구 모두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방식 그대로다.

-현대화할 수 없는 공정인가요.

“담양 시장에 가서 대나무를 사는 것부터 모두 직접 해야 하는 일이에요. 대나무를 불려 삶은 뒤 쪼개서 실을 뽑는데, 실 굵기도 다 손맛으로 결정됩니다. 미세한 차이지만 저는 죽사 굵기에 따라 용도를 달리 씁니다.”

장인은 쪼갠 대나무를 창칼로 긁어내 머리카락 굵기의 실을 뽑아냈다. 습기를 주기 위해 입술로 슥 훑어낸 죽사는 적절한 온도로 달궈진 인두를 이용해 골댕이에 하나씩 촘촘히 붙였다. 인두 온도가 조금이라도 올라가면 죽사는 홀랑 타버린다. 대부분 ‘감’의 영역인 것. 총모자는 말총으로 만드는데, 최상품의 갓을 만들 때는 죽사로 만든 ‘죽모자’를 쓴다. 총모자는 제주도의 장인에게 사 오지만, 죽모자는 박 선생이 직접 만든다.

대나무에서 뽑은 죽사를 인두를 이용해 골댕이에 하나씩 붙인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제자도 많을 것 같은데.

“배워보겠다고 찾아온 사람이 꽤 있었죠. 그런데 갓일은 끝이 없어요. 하루 몇 시간씩 배운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화로를 끼고 주야장천 앉아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 며칠 못 버티고 떠났습니다.”

-가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군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갓일 장인도 대부분 가업으로 이어가고 있어요. 다른 공예 분야도 마찬가지고요. 도제식으로 배울 수밖에 없는 성격이 있습니다.”

갓일 장인 4명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이유이기도 하다. 입자장은 양태장과 총모자장에게 주재료를 공급받아야 하는 것. 박 선생의 아들 박형박(50)씨는 기꺼이 5대째 이어지는 가업을 맡았다. 양태장과 총모자장도 자녀 세대가 가업을 이어가기로 했다고. 형박씨는 부친의 지근거리에 살며 따로 작업실을 두고 갓일을 한다. 그에게 물었다.

-가업을 잇는 건 선택하신 건가요.

“아버지는 사실 못 하게 하셨어요. 예전에 서울 독산동에 살 때 공방은 무척 허름하고 지저분했어요. 종일 불 앞에 앉아 있어야 하는 고행이고, 장래가 유망한 직업도 전혀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허락하신 건가요.

“대학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했고, 홍익대에서 의상디자인 석사 과정을 밟았어요. 단국대에서 전통복식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고요. 학업적 기초를 갖추고 나니 아버지가 본격적으로 갓일을 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석박사 때도 갓을 공부하셨나요.

“보고 자란 게 갓일이라 그런지 이쪽으로 흘러가더라고요. 평생 갓일을 해온 아버지가 기술적으로 장인의 반열에 오르셨으니, 저는 학문적으로 뒷받침해서 더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박창영 선생(오른쪽)과 아들 박형박씨가 작업장에서 갓을 만들고 있다. 부자의 앞에 놓인 도구도 모두 옛 방식 그대로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갓일 명가는 5대에 들어 기예에 이론까지 갖춘 셈. 조선 시대 갓을 재현하는 작업도 아들의 연구가 뒷받침됐다. 형박씨는 2010년 대한민국 전승 공예 대전에서 흑립으로 국무총리상을 받았고, 여러 박물관에서 유물 복원·보전 처리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유물 복원 작업은 그 자체로도 의미 있지만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갓을 직접 보고 연구할 기회이니 반가운 일”이라며 “재현해 보고 싶은 작품이 많다”고 말했다.

◇케데헌 인기에 문의 이어지지만

부자(父子)는 세계에 갓을 알리는 일에도 열심이다. 연간 수차례씩 국내외 전시에 참가하고 있다. 지난주 상주 세계 모자 페스티벌에는 박창영 선생이 직접 갓을 만드는 시범을 보였고, 이달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기념 전시에도 출품한 상태다.

-해외 전시에 가면 반응이 어떤가요?

“지난해 유럽 최대 규모 공예 전시회 ‘호모 파베르’에서 현지 기자단이 뽑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습니다. 재미있는 게 갓은 다들 써보고 싶어 해요. 다른 공예품은 보고 만져보는 수준인데 저희한테는 꼭 와서 ‘이거 써보면 안 되느냐’고 묻습니다.”

-외국에도 모자는 많잖아요.

“돗자리를 엮는 식으로 만든 ‘패랭이’ 같은 건 중국·일본에도 있어요. 챙이 있는 모자는 서양에서 펠트나 토끼털, 앙고라를 압축해 만들었고요. 갓은 투명한 소재와 수직과 완만한 곡선이 어우러진 모양이 특징인데, 이런 모자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어요.”

케데헌과 K컬처의 폭발적 인기, 한국 문화가 힙하게 떠오른 덕도 있을 것. ‘조선 시대 좀비물’인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이 인기를 끌었을 때에도 해외 사이트에서 기성품 갓이 팔리는 등 관심이 커졌다.

-갓에 대한 관심을 실감하십니까?

“케데헌이 유행하면서 더러 갓을 사고 싶다는 문의가 오는데요. 가격을 듣고는 깜짝 놀라요. 판매까지 이어진 건 없습니다.”

-얼마예요?

“명주실로 싸개를 한 ‘사립(絲笠)’은 2000만원부터 시작해요. 작품 수준으로 재현한 갓은 3000만~4000만원에 팔리기도 했고요. 양태 가격만 200만~300만원쯤 합니다. 수지타산을 따진다면 할 수 없는 일이죠.”

-1년에 몇 개쯤 팔리나요.

“그것도 정해진 게 없어요. 2~3개 팔릴 때도 있지만 아예 안 팔리기도 하고요. 국악인들이 주요 고객인데, 단골이라고 해도 한두 개 살까 말까예요. 조선 시대 선비들도 아껴가면서 평생 한 개의 갓을 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부자는 그럼에도 전시 출품용 등으로 부지런히 차근차근 갓을 만들어낸다. 1년에 5개쯤. 형박씨는 “한 달에 한두 개만 팔려도 이 일에만 완전히 집중하면서 할 수 있을 텐데 현실적으로 투잡, 스리잡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시간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자녀들도 계승하길 바라시나요.

“고등학생인 큰딸과 22세 조카가 조금씩 배우고 있어요. 제 딸은 무조건 하는 걸로 결정했고요. 유치원 때부터 배워서 천개(모자 보강과 장식을 위해 쓰는 부속품) 붙이는 작업은 곧잘 합니다. 우리 가족만 할 수 있는 일이니 계속 이어 가야죠.”

-다음 목표가 있으신가요.

“개인적으로는 함부르크 민속 박물관에 있는 갓을 재현하는 작업을 꼭 해보고 싶어요. 갓은 얹어 쓰는 건데, 그건 독특하게 눌러 쓰는 형태예요. 찰리 채플린 모자와 비슷하죠. 그걸 재현해 명품으로 상용화하는 방법을 찾고 싶습니다.”

-상용화라면, 다시 갓의 전성기가 올 수도 있다고 보시나요.

“대중화할 방법이 있을 것 같아요. 한복 체험하는 관광객들이 쓰는 출렁거리는 나일론 모자가 제일 보기 싫어요. 탄탄하고 견고한 형태감을 가진 갓의 원형을 살리되, 현대화할 방법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70년 가까이 우직하게 일궈낸 기예의 정점을 새로이 도약시키겠다는 것. 갓은 본래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백의(白衣)와 대비돼 조선 시대 선비의 기개와 아량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갓일 명가가 5대, 6대째로 이어지면서 K컬처의 도약을 상징하는 새로운 갓의 탄생과 유행이 찾아올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