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와 화목의 상징인 추석이 누군가에게는 때로 갈등과 스트레스의 무대가 되곤 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란 말이 예전만큼 와닿지 않는 요즘이다. 최장 열흘에 이르는 이번 연휴, 어떻게 하면 덜 불편하고 좀 더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까.
◇달라진 시대, 명절 에티켓도 변해야
명절 스트레스는 더 이상 며느리의 전유물이 아니다. 남편도, 아내도, 시어머니도, 막내 조카도 저마다의 이유로 괴로움을 호소한다. 1993~2016년 신문 기사를 분석한 김미동·김해란의 연구도 이런 변화를 보여준다. 과거 기혼 여성(며느리)에게 집중됐던 스트레스가 점차 기혼 남성, 시어머니, 취업준비생·수험생 등 미혼자녀 등으로 넓어졌다는 것이다.
추석만 되면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하소연이 쏟아진다. “남편은 역시 남의 편”이라는 아내, “아내가 이해가 안 된다”는 남편, “수십 년쨰 혼자 하는 명절 준비에 지친다”는 시어머니…. “결혼은 언제 해?” “취직했어?” “성적은 어때?” 같은 잔소리를 듣는 나머지 가족들 역시 고달프긴 매한가지다.
명절 갈등의 뿌리는 ‘과거와 현재의 간극’에 있다. 대표적인 것이 고부 갈등이다.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활발해진 오늘날, 가부장제 전통이 남은 명절 의례 때문에 ‘아들은 부엌에 들어오지 말라’는 시어머니와 ‘왜 안 되냐’는 며느리의 충돌이 빚어진다는 것이다.
박한선 서울대 교수(인류학)는 “시대가 바뀐 만큼 새로운 명절 에티켓이 필요하다”며 “과거와 달리 지금은 일년에 한두 번 친척들을 만나는데, 이런 자리에서 결혼이나 취업 같은 사적 질문은 갈등의 뇌관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헌주 연세대 연구교수(심리학)도 “같이 살지 않는 부모나 친척에게 느끼는 심리적 거리감이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명절 노동 줄이고, 자나깨나 말조심
갈등을 줄이려면 무엇보다 명절이 편안해야 한다.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는 2022년 추석과 2023년 설 두 차례에 걸쳐 차례상 간소화 표준안을 내놓았다. 차례상 음식 가짓수는 송편(떡국)·나물·구이·김치·과일·술 등 9가지면 족하다는 것. 최영갑 당시 성균관 위원장은 “가족 갈 갈등을 없애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김순종 박사의 명절 스트레스에 관한 연구도 비슷한 맥락이다. ▲차례상은 현실에 맞게 ▲성묘는 여유 있는 날에 ▲집안일은 남녀가 함께 등이 해법으로 제시됐다.
말조심은 기본 중의 기본. 이모(75)씨는 작년 설부터 손주들에게 “갈수록 더 잘생겨지는구나(예뻐지는구나)” “네 엄마가 네 자랑만 하더라” “저번에 전화해 줘서 고마웠다”는 말만 건넨다. 이씨는 “예전엔 취직이나 결혼 같은 근황을 물어보곤 했는데, 아이들이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며 “작은 칭찬 한마디가 분위기를 훨씬 좋게 한다는 걸 몸소 느꼈다”고 했다.
전문가들도 비슷한 조언을 내놓았다. ①비교나 비난의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②공감할 수 있거나 ③가벼운 주제의 대화를 나누라는 것. 이헌주 교수는 “‘야, 너’ ‘도대체’ ‘누구는’ 같은 말은 삼가야 한다”며 “예컨대 ‘야, 너는 도대체 뭐 하는 애냐, 누구는 벌써 취직했다더라’ 같은 말은 관계를 산산조각 내는 지름길”이라고 했다. 또 “‘돌아가면서 각자 불만을 얘기해보자’는 제안 역시 최악”이라며 “명절을 계기로 쌓인 감정을 털어내려는 시도는 갈등만 키운다”고 말했다. 박한선 교수는 조카의 근황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박 교수는 “형제 사이에는 경쟁심(sibling rivalry)이 있어 내 자녀와 조카를 비교하려는 심리가 있는데, 공개된 자리에서 조카에게 ‘장가는 언제 가냐’ ‘취직은 언제 하냐’ 같은 질문은 금물”이라고 했다. 두 교수는 공통적으로 ‘누가 집을 샀다더라’ 같은 얘기보단, ‘돌아가신 할머니·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다’ 같은 얘기를 하는 게 좋다고 했다.
술잔이 길어지면 말실수도 잦아진다. 정치 얘기는 밥맛을 떨어뜨리기 딱 좋다. 음식이나 TV프로그램, 지역 소식처럼 가볍고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는 것, ‘오후 3~5시는 개인 시간’ 같은 합의를 미리 해두는 것도 갈등을 줄이는 방법이다.
가족 유대를 다지는 명절의 본래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좋다. 박한선 교수는 “시댁·처가 어디를 먼저 가느냐를 두고 다투는 것은 부부 간 의미 없는 자존심 싸움”이라며 “양보가 현명하다”고 했다. 이어 “명절을 가족이 함께 전통을 체험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불편함도 새로움으로 바뀔 수 있다”고 했다.
바로 실천할 수 있는 팁도 있다. 이헌주 교수는 이번 추석에 가족에게 “미안해” “고마워” “바뀔게”란 말을 건네보길 권했다. 마음 속 응어리가 “연락 자주 못 드려 죄송해요” “네가 있어줘서 정말 고맙다”는 한마디로 풀릴 수 있고, 특히 어른이 먼저 “내가 달라져 볼게”라고 하면 한층 효과가 크다고 했다. 박한선 교수는 물질적 교류도 중요하다고 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는 ‘포틀래치(potlatch)’라는 전통이 있었는데, 행사 집전자가 많은 선물을 베풀어 존경과 권위를 얻었다”며 “정서적 나눔과 함께 작은 선물이나 용돈과 같은 물질적 교류가 관계를 원활히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