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한상엽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한 분야에서만 줄곧 일해 오신 친척 어르신이 얼마 전 정년 퇴임을 하셨다. 겸사겸사 안부 인사를 전하자 어르신은 말씀하셨다. “39년간 해 온 일을 접으려 하니 멍하네.” 짧은 문장에 담긴 기나긴 세월에 절로 숙연해졌다. 어르신에게 퇴임은 후련함이 아닌 서운함과 막막함의 과정임이 느껴졌다.

어느덧 나도 퇴직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나이가 됐다. 만약 더 이상 일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한창 일을 배우며 업무에 치여 지낼 때는 일만 안 해도 살겠다 싶었지만 이제는 그날이 올까 봐 조금 두렵다. 좋은 모습으로 내려오고 싶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후련한 마음으로 이후의 인생을 준비하고 싶지만 계획처럼 될까. 끝까지 아등바등하며 ‘하루라도 더 일하고 싶어! 나, 돈 더 벌 수 있어!’를 부르짖는 건 아닐지.

20여 년 동안 프리랜서로 살아온 나의 업무 및 고용 형태는 들쑥날쑥하다. 일이 있으면 그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고, 일이 없으면 하루아침에 백수가 된다. 직장인처럼 ‘근속’ ‘고용 상태의 유지’라는 개념이 없다. 일하고 싶어도 못 하는 날들이 길었던 반면, 일을 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날들도 많다. 누군가가 끊임없이 나를 선택해 줘야 유지되는 직업인지라 하루하루 때우고 메우며 산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내 자리는 언제든 누군가로 대체될 수 있으며, 나 역시 누군가의 대체가 될 수 있다. 특별한 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세상에는 나보다 특별한 사람이 많았고, 그들 역시 더 특별한 누군가보다 덜 특별했다. 비단 프리랜서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 일하는 사람의 앞날은 아무도 모른다.

코미디언 송은이와 김숙은 코미디언으로서 미래가 불투명하던 시기에 누군가가 불러주지 않아도 스스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자며 회사를 차렸다. 직원 한두 명이 전부인 작은 사무실에서 팟캐스트를 녹음해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가내수공업 느낌으로(!) 야금야금 시작한 비보(VIVO)는 어느새 도심에 자사 빌딩을 올리며 업계가 주목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많은 사람이 그들의 성취에 주목하지만 같은 프리랜서인 나는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회사를 시작했을지를 여러 번 생각한다. 오늘은 과로로 허덕이다가도 내일은 퇴직자가 되는 프리랜서의 굴레를 스스로 끊어보기로 한 결심. 그 마음에 미래에 대한 부푼 기대가 있었을까. 이 창구라도 없다면 좋아하는 일을 영영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더 크지 않았을까. 어쩌면 자신들의 성공을 가장 예상하지 못한 사람은 그들 자신일지도 모른다.

비슷한 이유로 나 역시 몇 년 전, 1인 출판사를 시작했다. 누군가가 원고를 선택해줘야 책이 되는 방식에서 벗어나, 쓰고 싶은 글을 써 스스로 책을 만들고 싶었다.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안고 시작한 일이 아니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글 쓰는 일을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몰라서, 찾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일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아 시작한 일이다. 이제껏 글만 써온 사람이라 사업에 대한 재능은 전무해 출판사가 어떻게 굴러갈지 암담하지만 이 작은 기업으로 인해 작가로서의 퇴직을 늦추고 있다는 실감만큼은 든다. 언제든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두는 것, 가능한 한 끝까지 즐겁게 일하는 것이 목표다. 쓰고 나니 너무 거창한 것 같다.

며칠 전, 살고 있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공지글이 붙었다. -2025년 10월 2일부로 경비원 OOO 퇴직-. 몇 년 전 이사 와서 아무것도 몰랐던 나에게 이곳 생활에 대해 하나하나 가르쳐 주시던 분이다. 우리 개의 간식을 따로 사서 만날 때마다 챙겨주시던 분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요새 유난히 기운이 없어 보이셨는데 이 일 때문이었을까. 절로 섭섭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선생님의 빈자리는 곧 누군가로 채워지겠지. 아마도 나는 새로 오실 분과도 매일 활기차게 인사를 나누며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이 베풀어 주신 마음 덕분에 낯선 동네에 정착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매해 추석이면 선물 세트를 세 개 마련한다. 아파트 경비원 선생님들께 드리기 위해서다. 올해는 더 꼼꼼하게 아이템을 골랐다. 선물 세트를 들고 경비실 문을 두드리는 나를 보고 퇴직을 앞둔 선생님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셨다. “추석 잘 보내세요” 하며 내밀자 “가는 사람한테 뭘 이런 걸 줘요” 하셨다.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너무 서운해요” 하자 별일 아니라는 듯 “에이, 뭐가 서운해” 하셨다. 앞으로 뭘 하실 건지는 여쭙지 않았다. 이미 이곳에서 보여주신 헌신과 정성만큼 제2의 인생을 멋지게 꾸려나갈 분이라는 사실이 짐작 가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퇴직 후 선생님의 일상이 덜 적적하시도록, 앞으로도 건강하고 평안하시기를 기도했다. 그날은 평소보다 진지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