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술자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칵테일은 단연 증류주와 탄산수를 섞어 마시는 하이볼이다. 그런데 50년 전 이미 하이볼을 제안한 술이 있었다. 바로 해태주조의 ‘나폴레옹’이다.

1976년 출시 당시 언론 광고는 “진저에일과 나폴레옹을 1대3으로 섞고, 얼음을 넣어 즐기라”는 레시피를 내세웠다. 지금은 흔하지만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제안이었다. 출시 시기로만 본다면 1980년 등장한 캡틴큐보다 앞섰으니, 나폴레옹은 하이볼 마케팅의 선구자인 셈이다.

‘나폴레옹’의 초기 제품명은 ‘나폴레온’이었다. 프랑스 황제 이름만 빌린 게 아니라 프랑스 대표 증류주 코냑을 지향했다. /명욱 제공

이 제품은 단순히 프랑스 황제의 이름만 빌린 게 아니었다. 프랑스 대표 증류주인 코냑을 지향했다. 코냑은 청포도로 만든 와인을 증류해 최소 2년 이상 오크 통에서 숙성한 알코올 도수 40% 이상의 포도 증류주다. 나폴레옹이란 명칭은 당시 코냑의 최고 등급을 의미했다. 6년 이상 숙성한 코냑을 XO(Extra Old)라 했고, 나폴레옹은 XO와 동급으로 취급됐다.

초기 제품명은 ‘나폴레온’이었다. 프랑스어 ‘Napoléon’이 N으로 끝나기도 했고 일본식 발음도 그에 가까웠다. 그러나 1986년 외래어표기법 개정으로 표준 표기가 ‘나폴레옹’으로 정리되면서 이 제품의 이름도 따라갔다.

다만 코냑과 황제 나폴레옹 1세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는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해 영국에 의해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됐고, 코냑을 즐겼다는 기록은 없다. 유배길에 코냑을 챙겼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는 후대 코냑 생산자들의 마케팅에 가깝다.

코냑이 황제와 연결된 건 그의 조카 나폴레옹 3세 덕분이다. 1860년 나폴레옹 3세는 영국과의 조약으로 와인과 코냑 수출길을 열었고, 1869년 코냑 업체 쿠르부아지에를 황실 공식 공급자로 지정했다. 이를 계기로 코냑은 황제의 술이라는 이미지를 얻고 세계적 명성을 쌓았다.

해태는 이러한 이미지를 빌려 나폴레옹을 만들었다. 초기에는 프랑스 헤네시사에서 코냑 원액을 공급받았고, 1980년대 들어서는 약 20%를 국내산 청포도로 자체 증류해 오크 통 숙성을 거친 뒤 사용했다. 프랑스 기준처럼 2년 이상 숙성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소비자에게는 충분히 고급으로 인식됐다. 나머지 80%는 소주에 쓰이는 주정이 차지했다. 알코올 도수는 출시 초기 40%였으나 1980년대부터 35%로 낮아져 캡틴큐와 같아졌다.

출시 초기 언론은 이를 ‘나폴레옹 코냑’이라 부르며 프리미엄 이미지를 덧씌웠다. 그러나 코냑이라는 명칭 사용은 국제 규범에 맞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는 이미 1936년 AOC(원산지 호칭 제한 제도)를 통해 프랑스 코냑 지방에서 생산된 포도 증류주만 코냑이라 부를 수 있도록 했고, 한국도 1995년 WTO(세계무역기구) 가입 후 코냑 사용을 금지했다. 게다가 알코올 35도는 코냑 기준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이라는 등급 역시 변화를 겪었다. 2018년 프랑스는 XO 기준을 기존 6년에서 10년 숙성으로 강화했고, 14년 숙성의 XXO(Extra Extra Old) 등급을 신설했다. 더 이상 나폴레옹이 코냑의 최고 등급을 의미하지 않게 된 것이다. 희소성을 높여 부가가치를 끌어올리려는 전략이자 우리 업계가 참고할 만한 사례다.

대중 양주 나폴레옹의 현실은 황제의 말년처럼 순탄치 않았다. 1997년 IMF 외환 위기로 해태가 흔들리며 브랜드는 국순당에 인수됐다. 리뉴얼 제품이 나오긴 했지만 이미 소비자 기호는 고급 위스키와 새로운 증류주로 옮겨 가고 있었다. 결국 나폴레옹은 캡틴큐와 비슷한 시기인 2017년 전후로 사실상 단종됐다. 대신 오미자 와인을 증류한 ‘고운달’, 사과 와인을 증류한 ‘추사’ 등 원액 100% 증류주가 인기를 끌며 나폴레옹의 뒤를 잇고 있다.

비록 시장에서는 사라졌지만, 나폴레옹은 캡틴큐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한 양주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무엇보다 시대를 앞서 하이볼을 마케팅한 점에서 여전히 독보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도 그 카피를 기억한다. “고급 원액 20%, 해태 나폴레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