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가을 햇살을 받아 밝게 반짝이는 황금빛 술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사과·복숭아·파인애플을 연상케 하는 산뜻한 산미가 코를 사로잡더니, 은은한 단맛이 부드럽게 혀를 감싸안았다. 삼켜도 복합적인 후미가 오래 여운으로 남았다. 술을 빚은 전북 정읍 ‘한영석의 발효연구소’ 한영석(55) 대표는 “얼마 전 찾아온 프랑스 와인 생산자가 ‘진짜 포도 안 넣었느냐, 어떻게 쌀·누룩·물만으로 와인처럼 복합적인 맛과 과실향을 낼 수 있느냐’며 놀라워했다”고 했다.
고급 화이트와인을 연상케 하는 이 술은 청명주(淸明酒). 24절기 중 하나인 청명에 주로 빚어 마시던 술로, 조선 실학자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혹시나 잊어버릴까 양조 방법을 기록해둔다”며 최고로 꼽았던 전통주다. 한 대표가 2022년 봄 처음 출시한 ‘도한 청명주’는 애주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의 청명주는 요즘 잘 팔리는 전통주 트렌드를 보여준다.
이틀 앞으로 다가온 추석은 전통주가 연중 가장 많이 팔리는 때다. 차례상에서 술이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제사에 피우는 향은 하늘로 올라가 혼(魂)을 불러오고, 올리는 술은 땅으로 스며들어 백(魄)을 불러온다고 믿었다. 술을 무덤 주변에 뿌리거나 실내에서 땅을 상징하는 모사(茅沙) 그릇을 준비하고 그 옆 퇴주잔에 술을 따르는 이유다.
◇차례에 차 대신 술 올리는 이유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차례(茶禮)란 ‘차(茶)를 올리면서 드리는 예(禮)’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차 대신 술을 올리는 걸까.
과거에는 제사 때 차를 올리는 일이 흔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년) 때 가야 종묘 제사에 떡·밥·과일과 함께 차를 올렸는데, 차가 다른 제수보다 앞에 놓였다. 고려 성종(재위 981~997년)은 최승로 등 주요 관료가 상을 당했을 때 부의(부조)로 차를 하사했다.
차의 위상이 흔들린 건 성리학을 주된 정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이 들어서면서.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 소장은 “조선 건국 이후 차가 배제됐다”고 했다. 박 소장은 “태종 때 예조가 나라 제사에 차 대신 술을 올리자고 건의했다”며 “차가 불교를 상징할 뿐 아니라 민폐를 끼쳤다는 인식이 새 왕조 지배층 사이에 퍼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차를 올리는 풍습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진 않았다. 성종 5년(1474년)에 ‘왕이 예조에 전하기를, 봉선전 대소 제사에 차를 쓰라’는 기록이 있고, 왕과 왕후의 기제사와 묘제사 때 주로 다탕(茶湯·뜨거운 차와 과일 등)을 올렸다는 기록도 있다.
일반 가정집에서도 제사에 차를 올렸다. 집안에 며느리가 들어오면 가장 먼저 조상을 모시는 사당에 제사를 지내게 했는데, 이때 며느리가 달인 차를 올리게 했다. 제사가 끝나면 가족이 둘러앉아 차를 함께 마시는 ‘회음(會飮)’의 시간을 가졌다. 이는 훗날 제사에 사용한 술을 나눠 마시는 음복(飮福) 문화로 변했다.
이처럼 조선 전기까지는 제사상에 차를 올렸다. 하지만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을 거치며 나라 살림이 피폐해지고, 차로 인해 백성에게 부과된 세금과 공납 부담이 극심했다. 차 생산에 붙는 세금이 감당하기 버거운 수준으로 치솟기도 했다. 영조는 “귀하고 비싼 차 대신 술이나 뜨거운 물, 즉 숭늉을 쓰라”고 명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차례에 차 대신 술이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차례에 어울리는 술은 청주·탁주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앤소믈리에학과 명욱 교수는 “술은 예로부터 인간이 신과 통하는 접신(接神)의 매개체로 여겨져 왔다”고 말했다. 제사상에는 전통적으로 청주(약주)와 탁주(막걸리)가 올라갔다.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인 종묘제례에서는 이탁주, 청주 계열만 등장한다. 총 3번에 걸쳐 제주(祭酒)를 올리는데, 초헌례(初獻禮)에는 막걸리, 아헌례(亞獻禮)에는 동동주, 종헌례(終獻禮)에는 청주가 등장한다.
이에 대해 명 교수는 “어떤 술을 써야 한다는 규정은 없지만, 음복하기 알맞은 술이 사용된 듯하다”며 “음복은 가족 모두가 차례에 올린 술과 음식을 함께 나누는 건데 차례주로 알코올 함량이 높은 소주보다 탁주·청주 등 발효주를 선호한 이유”라고 말했다.
아쉬운 건 현재 국내에서 청주는 흔히 ‘사케’라 부르는 일본 청주 방식으로 만든 술을 의미하며, 전통 방식으로 빚은 맑은 술은 ‘약주’로 분류돼 혼란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주세법상 청주는 쌀을 주원료로 하고 누룩 사용량이 1% 미만이며, 맑고 부드러운 맛이 특징인 술을 의미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주세령에 의해 가양주(家釀酒) 등 전통적 방식의 술 빚기가 금지되고, 일본식 누룩(입국)과 정제된 쌀을 사용하는 술만이 청주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제 잔재가 이어져 누룩 사용량이 1% 이상이면 청주가 아닌 약주로 분류되고 있다. 전통주 전문가들이 주세법상 청주가 아닌 약주를 써야 차례주에 맞는다고 말하는 이유다. 약주라는 이름 때문에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세법상 약주는 구기자·인삼·산사 등 약재를 넣어도 되지만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주 시장에서 터진 혁명
전통주 시장에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오직 쌀과 누룩, 물로만 빚고 장기 숙성을 통해 맛과 향을 끌어낸 전통주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소믈리에 A씨는 “외국인 소비자는 술의 주 재료가 가진 맛을 극대화한 술을 고급으로 여기지, 이런저런 부재료, 특히 인공 감미료를 첨가한 술은 싸구려로 인식한다”며 “그동안 한국 전통주가 해외에서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 이유”라고 했다.
단맛은 훨씬 가벼워졌다. 새롭게 주목받는 전통주들은 과거보다 훨씬 덜 달다. 먹고살기 힘들었던 과거에는 단 술을 선호했다. 하지만 비만을 질병으로 여기는 현대 소비자는 드라이한 술로 돌아섰다. 단맛이 강한 술은 건강에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음식과의 페어링(궁합 맞추기)도 어렵다.
여기에 자연스러운 산미가 강조되고 있다. 음식에서 산미는 단맛·짠맛·쓴맛 등 다른 맛과 조화를 이뤄 음식 전체 맛의 균형을 좋게 한다. 적절한 산미는 풍미를 증폭하고 생동감과 신선한 느낌을 준다. 감칠맛을 높이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술에서도 산미는 술 자체의 맛을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음식과의 페어링에서 특히 중요하다. 기름진 음식의 느끼함을 상쇄하고, 음식의 풍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와인에서 산미가 중요한 골격 중 하나로 여겨지는 이유다.
새롭게 떠오르는 전통주는 전통 누룩을 쓰는 경우가 많다는 공통점도 있다. 청명주를 빚는 한 대표는 본래 누룩 명인이다. 전통 누룩을 양조장에 보급하는 일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양조장들은 쌀에 한 가지 누룩 곰팡이만 인공 배양한 일본식 입국(粒麴)을 선호했다. 입국은 단일 곰팡이라 술맛이 단조롭지만 값이 저렴하고 발효 시간도 짧다. 한 대표는 전통 누룩이 풍성한 풍미를 낼 수 있음을 입증하고 상업 양조에서도 충분히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한 대표는 “전통 누룩을 사용해 우리나라를 대표할 국주(國酒)를 생산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