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시내 한 편의점 매대에서 추석 도시락을 집어든 모습. 9칸 용기에 3가지 밥과 갈비, 너비아니, 잡채, 3색 나물, 모둠전과 떡 등이 들어있다. 1인 가구가 전체의 42%를 차지하면서, 이런 ‘혼추족’ 맞춤형 명절 도시락 매출이 매년 급증한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39세 싱글 남성 박모씨. 이번 추석 연휴엔 혼자 외국인 관광객처럼 ‘서울 여행’을 하기로 했다. 그는 “작년 추석엔 1인 호텔 패키지를 했는데 실내에만 있으니 지루하더라”며 “엿새간 서울을 권역별로 돌아보며 맛집 탐방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가족 모임엔 추석 당일 오전 잠시 얼굴을 비출 작정이다.

#경기도의 58세 전업주부 예모씨는 추석 당일을 포함해 3박 4일간 강원도 사찰에서 템플 스테이를 한다. 매년 명절 차례 지내고 일가친척 챙기느라 심신이 지쳤는데, 자녀가 큰 뒤로는 미리 어른들께 인사하고 한적한 곳에서 휴양하며 보낸다고. 그는 “추석은 이제 나 자신을 돌보는 가을 휴가”라고 말했다.

민족 최대 명절 추석의 풍경이 크게 바뀌고 있다. 농경 시대 일가친척이 모여 수확한 음식으로 성묘하고 차례를 지내며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던 전통적인 모습은 빛의 속도로 사라진다.

그 자리를 채우는 건 ‘혼추족’ 즉 혼자 추석을 보내는 도시인들이 이끄는 개인화한 연휴 문화다. 1인 가구가 전체의 42%를 차지하고 비혼·저출산이 확산하면서, 개인을 중심으로 한 경제활동인 ‘미코노미(Meconomy)’ 트렌드가 명절 풍조를 바꾸고 있다. 각양각색 혼추족의 추석을 살펴봤다.

사 먹고 쉬고 쇼핑 플렉스

혼추족과 1인 가구가 추석의 관심사와 풍경을 바꾸고 있다. /그래픽=송윤혜 기자

많은 이에게 추석은 ‘놀고 쉬고 쇼핑하는’ 시간이 됐다. 신한카드 빅데이터연구소의 2022~2025년 추석 연휴 소비 데이터와 소셜미디어상 키워드 변화 분석을 보자. 3년간 ‘차례상’ ‘차례 음식’에 대한 언급은 10.2% 줄어든 반면 외식(21.7%)과 배달 음식(8.4%) 언급은 급증했다. 카드 결제액도 여행과 외식, 미용·건강 분야에서 급증했다.

여러 설문조사에서 고향이나 부모 댁, 큰집에 간다는 답변은 절반을 밑돈다. SK텔레콤 설문에서 ‘고향에 간다’는 답은 42.7%로 절반을 밑돌았다. 반면 ‘집에서 쉰다’(40.3%) ‘국내외 여행을 한다’(17.2%) 등 자기 관심사나 필요에 집중하겠다는 답변이 많았다. 집에서 배달 음식 먹으며 OTT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거나, 못 읽었던 책을 읽고 친구들과 근거리 여행을 가는 식이다. 추석 해외여행지로는 일본이 압도적 1위로 나타났다.

업계 관계자는 “명절에 해외여행객이 늘어나는 만큼 국내에서도 고액 결제가 많아지는 추세”라고 전했다. 연휴 초 여행객으로 붐비는 공항 출국장 등을 뉴스로 접하면, 집에 있더라도 명품 쇼핑과 피부·성형 시술이나 호캉스, 골프 라운딩 등 자신을 위한 소비에 지갑이 열리는 ‘명절 플렉스’가 일어난다는 것.

추석 연휴를 하루 앞둔 2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면세구역이 여행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이번 추석연휴(10월2~12일)에 일평균 22만3000명의 여객이 인천공항을 이용할 전망이다./뉴스1

유통 업체들은 발 빠르게 움직인다. 신세계·롯데 등 아웃렛 쇼핑몰은 작년부터 추석 등 명절 당일에 문을 연다. 아웃렛은 혼추족이나 핵가족이 야외 나들이와 식사, 쇼핑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인기 명절 코스가 됐다. TV 홈쇼핑도 가전·식재료 같은 전통적 명절 용품보다는 여행과 미용·패션 상품을 전진 배치한다.

백화점과 식품 업체들은 갈비·과일·굴비 같은 대용량 제수용 신선 식품보다는 1~2인 가구에 맞는 소용량 반조리 간편식이나 와인·쿠키 세트처럼 유통기한이 긴 선물 세트를 늘렸다. 아이들 한복보다 강아지 한복이 많이 팔린다.

전국의 24시간 편의점은 혼추족의 핵심 인프라다. 연휴 내내 명절 음식도, 약이나 생필품도, 각종 금융·물류 서비스도 집 앞 편의점에서 해결할 수 있기 때문. “추석에 집에 못 가 명절 음식 못 먹었다”는 건 옛말이다. GS25와 CU 등 편의점 4사는 전과 나물, 송편과 갈비찜 등을 포함한 추석 한정 도시락 매출이 매년 급증하자 올해 라인업을 크게 늘렸다.

공부하고 일해서 돈 벌고

서울의 유명 어학원은 10여년 전부터 명절 연휴마다 전국의 학원 시설을 개방하는 '명절 대피소'를 운영한다. 진학이나 취업을 준비하는 청춘들은 이런 곳에서 공부도 하고 OTT도 보는 게 마음 편하다고./연합뉴스

긴 명절, 혼추족은 자기 계발에 집중할 절호의 기회다. 한 교육 업체가 20~40대 성인 625명에게 추석 계획을 물었더니, ‘집콕 휴식’(30.2%) ‘자격증·취업 준비’(28.4%) ‘아르바이트 등 근무’(10.5%) 순으로 나타났다.

직장에 다니며 공인 중개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40대 여성 송모씨는 “성묘는 미리 다녀온 뒤 스터디 카페 등에서 열흘간 집중적으로 공부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1학년생 엄마인 박모씨는 “연휴가 너무 길어 아이의 공부 리듬이 깨지기 쉽다”며 서울 대치동 학원의 ‘추석 특강’을 예약했다.

추석 공부 열풍은 취업·편입 준비생이나 대입 수험생은 물론 초등학생까지 내려왔다. 초등 4학년 아들을 둔 이모씨는 “대입 경쟁이 일찍 시작되다 보니, 초등학생인데도 추석 때 아무 데도 안 가고 각종 레벨 테스트 준비 등에 집중한다는 집이 많더라”며 “우리도 올해까지만 놀기로 했다”고 말했다.

추석 연휴에 일부러 일하는 혼추족, 정말 많다. 폭등하는 물가에 시급이 평소보다 50% 이상 높은 추석 단기 아르바이트나 연휴 근무를 자청하는 것이다. 백화점이나 마트, 시장의 조리·포장·판매 인력부터 배송 기사들의 보조 인력, 공공기관이나 놀이 시설 추석 행사 진행 요원, 반려동물 돌봄 등 단기 알바 시장이 대거 열린다. 여기에는 대학생이나 무직자는 물론 직장인도 뛰어든다.

지난 설 서울 서대문구의 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생이 물건을 정리하는 모습. 추석 연휴 높은 수당을 보고 일부러 '반짝 알바'에 뛰어드는는 이들이 많다. /이태경 기자

두 자녀를 둔 가장인 40대 공기업 직원은 “아파트 청약에 당첨됐는데 잔금이 걱정돼 추석 연휴에 사흘간 편의점 알바를 뛴다”며 “하루 30만원 이상 벌 것”이라고 했다. 혼자 살면서 학원 차량을 운전하는 60대 남성은 “연휴에 쉬는 아파트 경비원 자리에 들어가 며칠씩 단기 경비 알바를 뛴다. 놀면 뭐 하냐”고 했다.

그래도 사람 온기는 그리워

갈수록 명절 분위기가 안 난다고 느낀다면, 맞다. 다들 명절 음식이나 선물, 명절 경험을 나누는 데 시큰둥해졌다. 평소에도 맛있는 것, 재미있는 것 많은 데다 평준화된 명절 아이템만으로는 각자의 필요를 충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당근마켓 등 중고 거래 플랫폼엔 추석 선물로 받은 참치나 홍삼 세트부터 과일·고기 상자가 되팔이용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혼자 쓸 데가 없다” “혈당 높아질까 봐 안 먹는다” “팔아서 여비에나 보태겠다”면서.

지자체별로 명절 때마다 1인 가구의 외로움이나 생활고를 경감하기 위한 요리 교실이나 음식 나눔 행사가 벌어진다. 사진은 서울 구로구청의 1인 가구 명절 음식 행사. /구로구청 제공

그런데 신기한 건 많은 혼추족이 자의나 타의로 추석을 혼자 보내면서도 ‘함께할 친구’를 찾는다는 점이다. 인터넷 커뮤니티마다 “추석 연휴 제주도 혼자 가는 분, 밥 한 끼 같이하실래요?” “10월 5~7일 동유럽(혹은 일본 후쿠오카)에 계실 분들 만납시다” 등등 여행 일부를 함께할 동반자를 구하는 글이 넘쳐난다.

“○○동에서 혼추하는 사람들 저녁 번개” “추석에 쿠팡 물류센터 알바 같이할 언니 구합니다” “△△역 카페에서 추석날 같이 공부할 분?”처럼 고단한 일상을 함께하며 외로움을 달랠 또 다른 혼추족을 찾기도 한다.

시대는 변했어도 사람에 대한 그리움만큼은, 풍성한 한가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