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큘리스 인렛에 도착한 것은 2024년 11월 8일. 나를 내려주고 떠나는 비행기를 향해 손을 흔들다가 그만 넘어져 버렸다. 시작부터 혼자 넘어져 놓고는, 아무도 없는데 누가 봤을까 봐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넘어진 걸 혹시 비행기에서도 봤을까?’
끝없이 펼쳐진 설원에 혼자 남은 내 모습을 하늘에서 찍어달라고 부기장 하이디에게 부탁해 뒀는데, ‘촬영 장면이 철퍼덕 넘어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면 어쩌지?’ 하며 시작부터 체면을 구겼다는 부질없는 걱정을 했다.
바닥에서 일어서려고 먼저 스키를 발에서 떼 냈다. 조심스레 발목을 좌우로 까딱거리며 한 번씩 끄떡여 봤다. 다행히 발목은 강했다. 넘어졌다가 일어나서 그러는지 몸에서 후끈한 열이 난다.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위해 제일 겉에 입은 노란색 윈드 재킷을 벗었다. 오후라 태양이 오른쪽 어깨를 비추고 있다. 바람 한 점 없이 적막한 공기가 너무 차가워 그늘진 왼쪽 어깨와 목둘레의 옷깃엔 입김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생각보다 춥고 왼쪽 어깨가 시려서 한 시간 만에 다시 윈드 재킷을 꺼내 입었다. 눈에 보이는 풍경은 맑고 포근한데 영하 20도쯤 되는 것 같다. 추위에 적응되지 않은 손가락이 아려와 이번엔 두꺼운 장갑으로 바꿔 끼었다. 출발한 지 한 시간 조금 넘었는데 장갑도 바꿔 끼고 옷을 벗었다 입었다 하는 데 시간을 쓰느라 속도가 더디다.
진행 방향으로 산의 정수리가 솟아 있는 주변 언덕길이 제법 경사져 보인다. 언덕의 빙하 지대가 햇빛에 반사돼 반짝였다. 비탈진 경사면에는 눈이 바람에 쓸려 갔는지 청빙 구간처럼 보인다. 비행기를 타고 오며 내려다보니 폭이 상당히 넓어 보였다. 절벽 구간은 아니지만 완만한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형태로 꽤 길고 거대한 크레바스였다. 공기가 깨끗해 멀리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산을 이정표 삼을 수 있을 만큼 시야가 좋아 나침반조차 필요 없었다. 확실한 진행 방향을 파악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덕분에 출발 첫날의 긴장감이 말랑해지며 마음의 여유를 얻었다. 이곳에 돌아와 다시 걷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2023년 남극을 걷던 기억을 꿈꾸고 있는 것만 같다.
두 번째 휴식 때 물을 마시려고 썰매 커버를 열었더니 유니언 빙하 캠프에서 챙겨 온 바나나가 보인다. 비행기를 타고 올 때 먹고 껍질은 실어 보내려고 했는데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저녁때까지 썰매에 싣고 갔다가는 냉동 바나나가 될 것 같았다. 이게 마지막 신선 식품이라고 생각하니 목구멍으로 넘기기 아깝다. 입안에서 최대한 오물거리며 과즙의 달콤한 맛을 즐겼다. 바나나를 먹고 남은 껍질은 남극점까지 최소50일 싣고 가야 한다. 무게 1g을 옷에서 도려내던 일이 바나나 껍질 하나로 헛수고가 돼버렸으니 허무함에 ‘피식’ 하는 웃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운행 첫날은 4시간 47분을 걸어 10.7km나 왔는데 GPS의 좌표가 위도 80도를 넘지 못했다. 파일럿이 단단하고 좋은 착륙지를 찾느라 나를 해안선에서 꽤 먼 곳에 내려줬나 보다. 혼자 잠드는 첫날 밤! 아직 시차 적응도 덜 된 기분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빙하 위에서 썰매를 끌고 있다. 저녁을 먹고 축배 시간을 가졌다. 바나나를 챙기며 함께 들고 온 콜라 한 캔을 마셨다. 첫째 날은 오후 반나절만 걷게 될 거라 이 정도 무게는 가져올 수 있어 약간 사치를 누리고 싶었다. 이것도 밤이 지나면 얼어서 터져버리기 때문에 유통기한은 오늘 저녁이다. 남극에 들어온 지 겨우 사흘 만에 운행을 시작했다. 적응할 틈도 없이 운행 1일 차! 꿈길을 걷는 횡단 여정이 시작됐다.
※한국인 최초로 남극 대륙을 단독 횡단한 산악인 김영미의 ‘남극, 끝까지 한 걸음’을 격주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