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싸움이 ‘칼로 물 베기’에서 끝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다 헤어질 수는 없습니다. 박성덕 연리지가족부부연구소 소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 부부 갈등 문제를 상담해 드립니다. 상처받은 관계를 회복하고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방법을 알려드립니다. - 편집자 주

일러스트=유현호

Q. 40대 중반의 맞벌이 부부입니다. 우리는 한집에 살지만 서로를 ‘투명인간’처럼 대합니다. 한 사람이 거실에서 TV 리모컨을 잡으면, 다른 사람은 방으로 들어가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보는 것이 일상이 됐습니다. 가끔 말할 때도 있지만, 대화라고는 할 수 없어요. 아이 학원비나 경조사처럼 생활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에 대해서만 얘기하거든요. 상황이 이렇게 되는 데 뚜렷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문제가 있다는 건 서로 알지만, 그렇다고 이를 어떻게 할 건지 터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A. 부부가 맞벌이로 살아가느라 많이 지쳐 위로가 필요하지만, 오히려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네요. 한 울타리에 함께 살면서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살아가는 부부가 우리 사회에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들은 최소한의 소통만으로 일상을 유지하며, 관계를 개선할 방법을 찾지 못한 채 결국 회복할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집니다. 이러한 패턴은 서서히 굳어져 어느새 익숙해져 버립니다. 이를 전문가는 ‘부정 고리’에 갇혔다고 합니다. 부정 고리에서 보이는 반응은 지속적으로 부부에게 상처를 주며, 점점 강력해집니다. 이를 부정 고리의 ‘자기 강화적 속성’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첫째 부정 고리의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부부 관계에서 나타나는 부정 고리는 정서중심 부부치료 모델을 만든 캐나다 심리학자 수전 존슨 박사가 제시했습니다. 공격·공격형, 공격·회피형, 회피·회피형 등 세 유형이 있습니다. 공격·공격형은 주로 결혼 초기에 흔한데 부부가 서로를 향해 비난하고 공격하는 유형입니다. 한쪽이 공격을 시작하면, 다른 쪽은 즉각적으로 상대의 문제를 나열하며 맞받아칩니다.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자동 반응이어서 멈추기 어렵습니다. 패턴이 오래될수록 반발은 빨라집니다. 공격·공격형은 오래가지 못하며, 한 사람이 물러나면서 공격·회피형으로 진행됩니다. 한 배우자는 자신의 고통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공격하고, 다른 쪽은 입을 닫고 물러나 회피하는 방식으로 항의합니다. 이러한 패턴이 해결되지 않고 지속되면 결국 공격하던 사람도 지쳐 물러나 회피·회피형으로 전개됩니다. 이때 ‘쇼윈도’ 부부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의뢰한 부부는 전형적인 회피·회피형입니다.

부정 고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발생 원인에 대한 이해입니다. 정서신경과학 분야를 발전시킨 미국 신경과학자인 재크 팽크셉은 뇌에서 존재하는 7가지 정서 회로를 밝혔습니다. 그중 분리 고통으로 인한 원초적 공황을 유발하는 신경회로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소중한 사람(부모 혹은 배우자)이 무시하거나 받아주지 않을 때, 뇌의 신경회로가 작동해 고통을 겪는다고 합니다. 아동뿐 아니라 성인 역시 관계 단절로 인해 깊은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의뢰한 부부는 부부 관계에서 원하는 것이 있지만 다가갈 수 없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느끼면서 심각한 고통에 빠져 있습니다. 이를 풀기 위해 서로 공격하다가 점차 회피하는 식으로 전개됐을 것입니다. 고리에 갇힌 부부의 행동은 표면상 공격이나 회피로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배우자와 멀어지는 고통을 겪습니다. 공황 상태에 빠져드는 것과 같습니다. 부정 고리는 서로 분리되고 친밀감이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사랑과 존중을 받지 못했을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한 반응이 부정 고리의 원인이 됩니다.

가장 친밀해야 할 배우자와 분리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하지 못하는 생활 자체가 고통입니다. 싸움을 줄이기 위해 부부가 모두 회피하면서 겉으로는 쇼윈도 부부로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예민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마주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상대의 동선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예를 들면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에 오지 않는 잠을 청하거나 남편이 화장실 간 것을 감지해 짧은 순간에 냉장고로 달려가 물을 챙겨 안방으로 들어가는 식입니다.

회복을 위해 중요한 세 번째 요소는 부부가 부정 고리에 갇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부정 고리는 강화되지만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노력하면 모든 부부는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부정 고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고리 속에 있을 뿐임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설명했듯이 부정 고리는 인정받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부정 고리는 받지 못한 사랑을 다시 확보하기 위한 반응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부정 고리는 부부가 함께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한 배우자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내가 공격하면 공격할수록 남편은 물러나고, 남편이 회피하면 회피할수록 아내는 더 강하게 공격하게 됩니다.

회복을 위해 네 번째로 중요한 부분은 배우자를 공격하거나 비난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의 책임으로 돌리며 탓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비난과 회피 행동은 계속해서 상처를 남기며, 부부를 부정 고리에 갇히게 만듭니다. 부정적 패턴 속에 있는 부부는 상대를 탓하기보다, 자신의 고통을 부드럽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신이 피하면 나와 멀어지는 것 같아서 힘들어. 용기를 내서 다가와 주면 좋겠어.”

“당신이 공격하면 나는 싸움으로 갈까 두려워. 부드럽게 말해주면 좋겠어.”

부부가 부정 고리를 인정하고, 배우자가 화를 내고 있더라도 속으로는 내가 다가가길 원한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배우자를 비난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부드럽게 전달해야 합니다. 이때 감정이 누그러지면서 상대도 긍정적으로 반응하며 점차 부정 고리에서 벗어납니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부정 고리에 계속 빠져든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며 고리를 푸는 과정을 경험해야 합니다. 사랑을 주고받는 방법도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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