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감독·프로듀서·주연 성우·가수 전원, 그리고 제작진 대부분이 한국계 미국인·캐나다인으로 구성돼 있다. 한국적 뿌리와 글로벌 감각을 두루 갖춘 교포가 K컬처의 재생산과 글로벌 확산을 주도하며 ‘하이브리드 파워’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다섯 살 때 이민을 떠난 매기 강(강민지) 감독은 “내 여권은 캐나다지만 마음속으로는 100% 한국인”이라며 “한국 문화의 세계화를 진지하게 추진하려면 한국과 동시에 다른 문화도 깊이 이해하는 창작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건 우리밖에 못 만든다”
메가 히트 주제곡 ‘골든’의 작곡·가창을 맡은 이재(김은재·34)는 미국에서 건너와 SM엔터테인먼트 연습생으로 12년간 활동했다. 데뷔에는 실패했지만 이 좌절의 경험은 훗날 ‘골든’의 자양분이 됐다. 그는 미국 포브스 인터뷰에서 “나는 아이돌 연습생이었고 한국 관용어를 잘 알고 한국 드라마도 많이 본 데다 모국어는 영어”라며 “이런 배경이 노래를 만들 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한때 약점으로 여겨진 교포들의 이중 정체성이 ‘K’의 비약적 확산으로 강점이 된 것이다. 이재는 “초록조차도 노랑과 파랑이 섞인 아름다운 색”이라며 “내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걸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유창한 영어 실력과 친밀한 한국적 감수성을 겸비해 ‘케데헌’ 남자 주인공 성우에 캐스팅된 안효섭(폴 안·30)처럼 글로벌 콘텐츠가 늘어날수록 양쪽 능력을 발휘할 기회는 커지고 있다. ‘케데헌’에서 한의사 캐릭터 성우로 참여한 미 배우 대니얼 대 킴(김대현·57)은 “교포가 된다는 것은 다른 두 문화의 ‘수혜자’가 된다는 의미”라고 했다.
◇지금이 절호의 찬스였다
‘경계인’이라는 정체성은 그러나 양날의 검이었다. 헌터와 데몬의 경계에서 갈등하는 영화 속 주인공 ‘루미’의 모습에도 이같은 내적 혼란이 투영돼있다. 매기 강 감독은 “초등학생 시절 선생님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기에 ‘사우스 코리아’라고 알려줬는데도 지도에서 못 찾았다”며 “그때부터 우리나라를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이 열망은 한국 문화를 알리려는 구체적 노력으로 이어졌다. 매기 강은 “할리우드에서 10여 년 일하면서도 좀처럼 기회가 없었는데 한국 노래와 영화·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된 지금이 기회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헌트릭스 ‘미라’의 노래를 담당한 래퍼 오드리 누나(추해원·26)는 팟캐스트에 출연해 루미의 김밥 먹방에 쏟아지는 환호에 격세지감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그는 “어릴 적 냄새 나는 김밥과 도시락을 숨기면서 자랐다”며 “이렇게 성장한 한국 문화를 보는 건 정말 북받치는 일”이라고 했다. “내가 여기 있을 수 있기까지 조상들이 겪어야 했던 험난함을 생각하면 이 사실을 당연시할 수 없다”며 “이건 K팝의 부상만이 아니라 매우 역사적인 여정”이라고도 했다. 어려서 잦은 인종차별에 시달렸던 텍사스 출신 아덴 조(40·루미 성우)는 “한국인으로서 멋진 걸 다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코리안이라는 ‘원팀’
그러나 거리가 멀면 오차는 발생할 수밖에 없는 법. 간극은 ‘현장’에서 채워야했다. 철저한 고증을 위해 프로듀서 아그네스 리(이정아)는 한국인 스태프들과 전국을 누볐다. 태권도장을 운영했던 부친의 소개로 정확한 액션 신을 구현하려 제작진과 국기원을 찾아 태권도 기술을 참관하기도 했다. 소파가 있는데 굳이 땅바닥에 앉아 컵라면을 먹는 주인공, 수저를 놓기 전 식탁에 깔아둔 냅킨, 주차 금지 표지판 앞에 불법 주차된 자동차 같은 한국적 디테일은 이런 노력 덕에 가능했다. 루미가 갓 나온 뜨거운 국밥 뚝배기를 맨손으로 잡고, 심지어 젓가락으로 먹는 오류도 걸러낼 수 있었다.
K팝 열풍의 산실인 한국 연예 기획사와의 협업으로 제작은 탄력을 받았다. 빅뱅·블랙핑크 등을 키워낸 더블랙레이블 프로듀서 테디, 안무가 리정 등과 긴밀히 손발을 맞췄다. 이 같은 시너지는 한국 가수들에게도 기회가 되고 있다. 극중 사자 보이즈가 부른 ‘유어 아이돌’과 ‘소다팝’을 만든 한국 가수 빈스(이준석·36)는 “요즘 해외 작곡가들한테 연락이 많이 온다”며 “선망의 대상이었던 아티스트와 프로듀서들이 한국을 자주 찾는 것을 보면서 K팝이 니치(Niche·틈새) 장르가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외곽에서 중심으로
교포의 활약은 전방위에서 계속되고 있다. 영화로 제작된 소설 ‘파친코’ 작가 이민진, 지난해 에미상 8관왕에 빛나는 영화 ‘성난 사람들’의 감독 이성진, 역시 지난해 전미 비평가협회상 등을 쓸어담은 영화 ‘패스트 라이브스’의 감독 셀린 송(송하영) 등 한국적 색채가 크게 부각되는 작품들이 잇딴 성공을 거두면서 ‘K’의 국제화는 거세지는 중이다. ‘케데헌’도 시즌2를 둘러싼 힌트가 쏟아져나오고 있다. ‘데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스토리’라는 제목의 단편 애니메이션도 제작 단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영화사 패러마운트픽처스는 ‘케데헌’ 주연 성우 중 한 명인 한국계 미국 배우 유지영과 한국계 미국 가수 에릭 남을 앞세운 K팝 영화 제작에 돌입했다. K팝 걸그룹이 되기 위해 TV 오디션에 참가하는 한국계 미국 소녀의 이야기. 협업 파트너 하이브 아메리카 측은 “할리우드 주요 영화 제작사 중 모든 촬영을 한국에서 하는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연출을 맡은 재미교포 벤슨 리(이경수·56) 감독은 “이 영화는 에너지, 열정, 마법, 이를 지지하는 엄청난 커뮤니티를 지닌 K팝에 대한 나의 러브레터”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