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케이팝 데몬헌터스 속 가상 걸그룹 헌트릭스. 진짜 본업은 수백년 간 대 이어 악령을 무찔러온 퇴마사다. /넷플릭스

이런 핵폭탄급일 줄이야. 먼저 세계를 뒤집어놨고, 한국은 뒤늦게 뒤집히는 중이다. 넷플릭스의 K팝 판타지 영어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이하 케데헌)’ 얘기다.

케데헌은 지난 6월 20일 190국에서 34개 언어로 공개된 지 3개월여 만에 누적 시청 수 3억3000만뷰를 돌파했다. 세계 최대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인 넷플릭스 28년 사상 ‘3억뷰’는 ‘오징어게임(2021년·2억6520만뷰)’과 ‘웬즈데이(2022년·2억5210만뷰)’도 가보지 못한 고지다.

넷플릭스가 한국에 상륙한 2016년 1월 “‘미드 공룡’이 한국 엔터테인먼트 생태계를 초토화하러 온다”고 우려했는데, 10년도 안 돼 한국계 제작진과 배우·가수가 대거 투입된 한국물이 세계 최대 흥행작이 됐다.

케데헌은 글로벌 대중음악계도 접수했다. 주제곡 ‘골든(Golden)’은 미국 빌보드 차트 핫100에서 6주째 1위, 영국 싱글 차트에선 7주째 1위를 달리고 있다. 빌보드·싱글 차트 동시 석권은 BTS나 블랙핑크 등 어떤 K팝 그룹도 달성 못 한 기록이다. 특히 전 연령 관람가의 만화 주제곡이 빌보드 1위에 오른 건 1993년 ‘알라딘’ 주제가(A Whole New World) 이후 32년 만이다. 케데헌 속 노래 네 곡이 한꺼번에 빌보드 탑10에 든 것도 영화 사상 전례 없던 일이다.

K팝 여전사 3인방을 내세운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데헌이 각종 신기록 행진 중이다. /그래픽=송윤혜 기자

세계인이 ‘골든’을 따라 부르거나 ‘소다팝’에 맞춰 춤추고, 케데헌 속 한국 전통문화와 음식이 ‘핫템’이 됐다. 외국 관광객이 케데헌의 배경인 서울로 몰려오고, 한국 기업과 지자체들은 케데헌 낙수 효과에 즐거운 비명이다.

넷플릭스는 벌써 후속작과 실사영화 제작 논의에 들어갔다. 외국 유력 매체들은 케데헌을 최고 권위 음악상인 그래미상과 영화상인 오스카상 유력 후보로 꼽고 있다.

예상 못 한 케데헌 현상. “뻔한 K팝 걸그룹 판타지” “유치한 애들 만화”라며 심드렁했던 어른들도, “한국이 만들어 한국이 돈 버는 것도 아닌데 왜 흥분하느냐”던 평론가들도 자세를 고쳐 앉고 있다. ‘케데헌 세계관’을 들여다본다는 건 기성세대가 이해 못 하던 젊은 세대의 고민과 꿈, 그리고 우리 스스로 평가절하했던 K 소프트 파워를 다시 보는 일이 될지 모른다.

케데헌 신드롬, 주인공들의 한국어 대사로 안내한다. “자, 가자 가자 가자!”

1. 빛과 어둠, 영웅의 희생… 보편적 서사의 힘

케데헌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은 세계적 인기를 누리는 한국의 3인조 걸그룹 ‘헌트릭스(Huntrix)’. 무대에선 화려한 아이돌 가수지만, 진짜 본업은 수백 년 대 이어 악령을 무찔러온 퇴마 사냥꾼(hunter)이다. 인간 영혼을 탐식하는 악마계 수장 귀마(鬼魔)는 헌트릭스를 무력화하려 5인조 꽃미남 보이그룹 ‘사자 보이즈(Saja Boys)’를 결성해 인간계에 투입한다.

헌트릭스의 미라(오른쪽)가 가야곡도를 모티브로 한 검을, 루미(가운데)는 조선시대 사인검을, 조이(왼쪽)는 무구인 작은 신칼로 싸운다. 멤버들의 노리개와 검은 모두 철저한 고증을 거친 것. 넷플릭스

변수는 헌트릭스 리더 ‘루미’가 선대 헌터와 악령 사이에 태어난 반(半)악령이라는 출생의 비밀. 루미가 자신의 약점을 의식하는 순간 목소리를 잃고 공연을 망치면서 팀워크는 깨지고, 악령을 봉인해온 장치인 ‘혼문(魂門)’도 뚫린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내면의 힘을 되찾아 팬들과 세상을 구한다.

기본 뼈대는 역대 수퍼 히어로물을 통해 익숙한 서사 구조다. ‘슈퍼맨’부터 ‘배트맨’ ‘해리 포터’ ‘쿵푸 팬더’까지 메가 히트작엔 초자연적 힘을 지닌 영웅이 등장한다. 빛과 어둠의 싸움, 희생과 구원, 내면의 성찰과 깨달음을 주제로 한 영웅담은 주요 종교나 각국 설화·고전에서도 반복되는 서사다.

특히 영웅이 어떤 걸림돌 탓에 능력을 발휘 못 해 벌어지는 갈등과 극복의 과정은 스토리를 극적으로 만든다. 케데헌은 개성 강하고 인간미 풍기는 여전사 3인방을 내세워 이 공식을 착실히 따라간다.

2. 이중 정체성 고민하는 젊은층 위로

지난 14일 서울광장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소재로 열린 2025 서울 헌터스 페스티벌에서 국내외 K-POP 팬으로 구성된 댄스팀 선수들이 케데헌 속 안무를 선보이고 있다. /뉴시스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케데헌이 “대중문화의 시대정신(zeitgeist)을 사로잡은 영화”라고 짚었다. 기후변화와 저성장 등 거대 위기에서 자신감과 지향점을 잃은 2030 MZ세대와 10대 알파 세대의 고민을 정면으로 다뤘다는 것.

그중에서도 소셜미디어 범람 속 남에게 내보이는 가면 인격(페르소나)과 상처 입은 진짜 자아의 불일치로 방황하며 “대체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이중 정체성’ 문제가 핵심으로 떠올랐다.

케데헌은 이 난제를 대중문화의 영향력이 커진 21세기 감성에 맞게 풀어냈다. 주로 여성인 무당들이 퍼포먼스로 악귀를 쫓아냈다는 데 착안해 ‘걸그룹 헌터’라는 주인공을 만들고, 그들의 이중 정체성이 빚는 크고 작은 고민을 그렸다. 일제강점기 ‘저고리 시스터즈’부터 ‘S.E.S’까지 역대 인기 여성 그룹이 사실 은밀히 이어진 헌터 계보였다는 설정은 동서양 어디에도 없던 영웅 서사를 탄생시켰다.

특히 루미는 전통의 계승자이자 파괴자. 그는 “약점은 감추라”는 기성세대의 압박에 번민하지만, “깨진 조각도 빛나/더 이상 숨지 않아”라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기로 결단하고 우정과 신뢰, 연대의 힘으로 새로운 혼문을 세운다.

케데헌의 저승사자 모티브 아이돌 그룹 '사자 보이즈'. 걸그룹과 보이그룹의 선악 구도라는 초기 설정이 한국 젠더 갈등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넷플릭스

케데헌 속 걸그룹과 보이그룹이 선악 구도로 맞서는 설정이 한국의 극심한 젠더(gender·성별) 갈등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양측의 리더인 루미와 진우가 같은 반인반수로서 수치심·죄책감·자기혐오에 시달려왔다는 공통분모를 발견, 공감하고 위로하며 서로를 구원하는 장면은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3. K전통, K풍경, K정서… 한국 문화가 주는 신비로움

익숙한 전개에도 세계가 “독창적”이라며 열광하는 건 케데헌이 ‘한국’을 전례 없는 방식으로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라면과 김밥, 한국어, 서울이 소품으로 등장하는 수준이 아니다. 한국 전통과 현대, 한국인의 무의식이 핵심 플롯이 돼 99분간 러닝타임을 쉴 틈 없이 지배한다. 가히 ‘K의, K에 의한, K를 위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한 전통문화 산업 종사자는 “그간 외국이 만든 영화에 한국이 나오면 ‘이번엔 뭘 또 어설프게 끼워넣었을까’ 조마조마했는데, 케데헌 첫 장면부터 조선 시대 건축과 의복이 완벽히 고증돼 있어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케데헌 속 헌트릭스가 '골든'을 부르며 화려한 무대를 펼칠 때 조선 왕이 썼던 일월오봉도가 배경으로 등장했다. /넷플릭스

민화 호작도에서 튀어나온 호랑이와 까치, 도깨비·물귀신과 저승사자, 액션 신에 등장하는 사인검과 월도·곡도, 제주 신칼과 방울종 등 무구(巫具), 무대 배경인 일월오봉도와 단청을 실물과 비교한 전문가들도 감탄한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헌트릭스 멤버들이 당초무늬 매듭 등 서로 다른 오방색 노리개를 달았더라”라며 “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효과에도 실제 전통 문양을 환상적으로 적용했다”고 했다.

현대 한국의 풍경과 생활상 역시 몇 번을 돌려봐도 새로운 게 보일 정도로 깨알 같다. 남산타워와 낙산공원, 잠실종합경기장, 명동거리와 청담대교 등 서울의 명소는 물론 지하철의 분홍색 임신부석과 차 없는 거리, 공중목욕탕의 초록 때수건, 어묵 볶음 위 부추 두 줄기, 국밥 먹을 때 수저 밑에 깐 냅킨, 한국 여성들의 선캡과 수면 바지, 심지어 데뷔 순서에 따라 선·후배 따져가며 90도 인사를 하는 K팝 군기 문화까지 생생히 살려냈다.

케데헌 속 진우(왼쪽)와 루미가 낙산공원 성곽길을 걸으며 일종의 데이트를 하는 모습. 한국 현대 생활상과 한국인의 정서가 세심하게 포착된다. /넷플릭스

특히 케데헌 속 한국 젊은이들이 “남들 앞에선 완벽해야 한다” “난 자랑스럽지 않은 존재”라거나 “혼자 잘 살려고 가족을 배신했다”는 지극히 ‘한국적인’ 자기 검열과 죄책감으로 번민하는 모습은 폐부를 찌른다. 귀마는 바로 그 수치심을 이용해 인간과 악령을 조종한다.

4. 중독성 강한 K팝의 향연

케데헌의 또 다른 주인공은 음악이다. 총 8개의 노래는 단순한 배경음악을 넘어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주역이다. 이 곡들이 동시에 빌보드에 진입하자 싱어롱(sing-along·함께 부르기) 버전이 제작됐고, 각국 영화관에서 싱어롱 상영회가 열리고 있다.

밖에서도 “완성도 있는 음악이 문화적 특이성 속에서도 보편성에 대한 신뢰를 높였다”(타임), “K팝이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는 초자연적 무기가 돼 영화의 감동을 증폭시킨다”(BBC)는 호평이 나온다.

헌트릭스와 사자 보이즈가 선보인 노래들은 K팝 댄스곡의 전형적인 요소들을 고루 섞은 덕에 처음 들어도 익숙하다. 귀에 꽂히는 팝 비트와 멜로디, 치밀하게 짜인 노래와 랩, 중독성 있는 후렴구 등이 그것. 루미의 고뇌와 열망을 담은 노래 ‘골든’은 고난도 고음을 웅장하게 배치, 고양감과 해방감마저 느끼게 한다.

최근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케데헌 음반이 깔린 모습. '골든'은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 1위에 6주째 올라있다. 사자보이즈가 부른 '유어 아이돌'과 '소다 팝'은 각각 4위와 5위에 올랐다. /뉴스1

영미권 팝을 한국화한 K팝은 글로벌 음악계에서 별도의 장르가 됐다. 오랜 연습생 생활과 합숙, 살인적인 투어 일정, 실력파 보컬·섹시·큐트·반항아 등 멤버 간 역할 분담, 고된 훈련으로 완성된 칼군무, 엄격한 사생활 관리, 팬의 부모들도 좋아할 반듯한 이미지와 ‘선한 영향력’ 등 K팝 특유의 문화가 케데헌에 세밀하게 고증돼 몰입감을 높인다.

5. 팬들의 경험을 섬세하게 포착

기성세대가 ‘케데헌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최대 난관은 1020세대의 팬덤(fandom) 문화일지 모른다. 21세기 팬 집단 문화를 모르거나 얕잡아보면 그 감정선을 따라가기 어렵다.

케데헌 속 K팝 팬들은 단체 티셔츠에 야광봉을 들고 공연과 팬 사인회에 몰려들고, 실시간 댓글로 응원하며, 스타의 희로애락과 세계관에 동화된다. 이 ‘고강도 덕질’은 BTS 팬클럽 ‘아미’ 등의 실제 모습과 다르지 않다.

헌트릭스도 “팬들을 위해”를 외치며 휴식과 사생활을 포기하고, 팬들의 사랑에 감동해 눈물 흘리며, 팬을 위협하는 악령들을 무찌른다. 걸그룹이 그저 무대 위 소비 상품이 아니라 팬들의 또 다른 가족이자 수호자인 셈. 팬들의 열정은 인류를 위해 ‘혼문’을 지키는 에너지원이 된다.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가 이달 초 미국 뉴욕에서 열린 US오픈 남자 단식 4강 진출을 확정하고 케데헌 속 '소다팝' 안무를 추고 있다. 그는 "딸에게 배웠다"고 했다./US오픈 유튜브

뉴욕타임스는 “케데헌의 간과하기 쉬운 미덕은 팬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이라며 “팬들의 경험을 매우 섬세하게 포착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무는 데 성공했다”고 분석했다. 또 자아를 잃은 덕질은 귀마에게 잡아먹히는 독성을 띤다는 점도 시사한다.

6. 전략적인 알고리즘 폭격

케데헌 인기엔 넷플릭스의 자본 집약적 제작·유통 환경, 소셜미디어 알고리즘 폭격 전략 등 기술적 측면도 작용했다. 수십억이 보는 넷플릭스를 통한 동시 공개는 감동이 세계에 시차 없이 공유되며 실시간 글로벌 팬덤을 형성하게 했다.

OST는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과 숏폼을 겨냥해 만들어졌다. 제작사 소니는 ‘골든’ 안무 영상을 먼저 공개해 온라인 바이럴(viral·소문)을 만들었다. 뒤이어 본편이 공개되자 폭발적인 영화·음원 동시 스트리밍으로 이어졌다.

요즘 사람들이 “내 유튜브·인스타가 케데헌으로 도배됐다”고 하는데, 이는 영화와 노래, 사용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영상까지 한꺼번에 쏟아지며 ‘지금 가장 핫한 콘텐츠’로 검색 알고리즘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해외 팬들이 케데헌 속 루미가 김밥을 통째로 베어 무는 장면을 패러디해 온라인에 올라고 있다. /틱톡

7.가상을 현실로... 체험형 콘텐츠 양산

케데헌은 애니메이션이지만 노래·배경·음식·소품 등 거의 모든 것을 현실에서 구현하고 체험하도록 설계됐다.

가상 아이돌이 부른 노래는 실제 가수·셀럽들의 커버 챌린지를 낳고, 박물관에선 케데헌 속 전통문화 뮷즈를 손에 넣을 수 있으며, 배경이 된 서울의 명소를 돌며 비싸지 않은 음식을 먹어보는 등 가상과 현실을 오가는 ‘몰입형 체험’을 가능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