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음식을 먹습니다. 그러다 음식 앞에서 문득 궁금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침과 저녁 식사 중에서 어떤 게 더 중요하지?’ ‘간식, 먹어서는 안 되는 건가’…. 정재훈 푸드라이터가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에 얽힌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약사이기도 한 그가 음식을 더 건강하게 즐기고 똑똑하게 먹는 방법을 알려드립니다. - 편집자 주

/게티이미지뱅크

가을 포도의 향기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오래된 약속처럼 다가온다. 진하게 퍼지는 향은 알알이 무르익었다는 속삭임이자, 지금이야말로 먹어도 좋다는 은근한 초대장이다. 아름답고 향기로우며 맛까지 뛰어난 과일이 고대 로마와 이집트 벽화부터 17세기 정물화까지 예술의 주 소재가 된 것도, 지금껏 명절 선물로 오가며 사랑받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과일은 본래부터 인간이 먹도록 설계된 자연의 선물이다. 과학자들은 수렵·채집 시절, 과일나무의 위치와 열매가 익는 시기를 기억하는 일이 인류 두뇌 발달의 원동력이 됐다고 추측한다.

요즘 과일을 두고 여러 의견이 오간다. 예전보다 너무 달아졌다는 말, 혈당 상승에 대한 경계, 살이 찐다는 우려까지, 어느새 과일은 걱정의 대상이 됐다. 1980년대만 해도 모든 귤이 달지는 않았다. 어쩌다 한 알 진짜 단 귤을 만나면 식구들과 나눠 먹으며 감탄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 달콤함이 기본 값이 됐다. 2018년 호주 멜버른 동물원에서는 동물들의 식단에서 과일을 뺐다. 재배 과일의 당도가 지나치게 높아 비만과 충치 문제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오늘날 과일 디저트 레시피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사과에 설탕을 넣어야 맛이 났던 스트루델(얇은 반죽에 사과를 채워 굽는 파이의 일종)이 이제는 사과만으로도 충분히 완성된다. 이렇게 당도가 강해진 배경에는 전 세계 소비자의 단맛 선호가 있다. 더 달콤한 맛을 찾는 입맛에 맞춰 농부들은 당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육종을 이어 왔다. 1930년대 미국에서 과일을 더 달고 더 크고 씨 없이 만들도록 장려하는 식물 특허법이 통과되면서 흐름은 본격화됐다. 일본에서 개발된 새로운 포도 품종 ‘로얄바인’은 당도가 콜라의 2배 수준이다.

과일의 단맛은 품종 개량 때문만은 아니다. 지구 온난화까지 더해졌다. 일조량이 풍부한 과일일수록 더 달다. 광합성을 통해 당분이 더 많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2013년 일본의 한 연구는 1970년대 기온 상승 이후 후지사과가 더 달고 부드러워졌다는 결과를 보여준다.

단맛이 강화된 만큼 우리가 놓치는 것도 있다. 항산화 물질이나 파이토케미컬(식물영양소) 같은 유익한 성분이 과거보다 줄었을 가능성이 높다. 과일의 당도를 우선시하는 품종으로 개량하는 과정에서 쓴맛이나 떫은맛을 많이 내는 항산화 물질과 파이토케미컬이 감소했을 수 있다. 또 식물이 온실처럼 스트레스가 적은 환경에서 자라게 된 것도 방어 물질(파이토케미컬)이 줄어든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과일을 멀리할 이유는 없다. 과일은 여전히 비타민C를 비롯해 다양한 비타민과 미네랄, 식이섬유, 미량이지만 건강에 도움을 주는 파이토케미컬을 담고 있다. 2022년 하버드대학 연구에 따르면, 하루 다섯 제공량(작은 접시 분량) 이상 과일과 채소를 섭취한 그룹은 전반적인 사망률이 13%, 심혈관 질환은 12%, 암은 10%, 호흡기 질환은 무려 35%까지 감소했다. 고혈압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사과와 같은 흔한 과일을 일주일에 3~6회 먹는 것으로도 한 달에 한 번 미만으로 먹는 사람에 비해 전체 사망 위험이 40% 낮았다.

세계보건기구(WHO)를 비롯해 미국과 유럽의 영양 가이드라인은 하루 400g, 우리나라 질병관리청은 500g의 과일·채소 섭취를 권장하고 있다. 어떻게 먹느냐도 중요하다. 과일 주스로는 과일을 대신할 수 없다. 주스를 많이 마신다고 해서 사망률 감소 같은 건강상 이익이 나타나지 않는다. 통과일로 먹어야 한다. 식전보다는 식후에 먹어야 혈당 관리에 유리하다. 공복에 섭취할 경우 과일의 당분이 빠르게 흡수되면서 혈당이 급격히 오르지만, 식사 후에는 다른 음식과 함께 천천히 소화돼 혈당 상승이 완만해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언제’보다는 ‘얼마나’ 먹느냐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당뇨를 걱정해 과일을 피할 이유는 없다. 2022년 유럽 영양학 저널에 실린 중국 연구에 따르면, 과일을 주 7회 이상 먹는 사람은 주 1회 미만인 사람보다 당뇨병 위험이 49% 낮았다. 단, 당뇨병 전 단계인 사람에게는 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몸에 좋은 과일이라도 한 번에 많은 양을 먹기보다는, 나눠서 즐기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향기와 단맛의 상관관계다. 과일이 달면 향이 더 강하게 느껴지고, 향이 짙으면 단맛도 덩달아 풍성하게 인식된다. 향은 미각과 함께 뇌에서 통합 처리되기 때문이다. 미국 플로리다대 린다 바토슈크 연구진은 당분 함량이 낮아도 향기 물질이 풍부한 토마토에서 더 높은 단맛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처럼 향기 물질은 단맛을 증폭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딸기는 30여 종의 향기 물질을 갖고 있어, 3종밖에 없는 블루베리보다 맛 평가에서 일관되게 더 단 것으로 여겨진다. 가을에 맛보는 머루포도가 일반 캠벨 포도보다 달게 느껴지는 것은 당도가 높아서이기도 하지만 진한 향기 덕분일 수도 있다. 이런 연구가 계속된다면 이제까지의 육종 방향과 달리 당도는 낮으면서도 향기를 강화하여 달게 느껴지는 신품종 개발이 가능해진다.

다행히 최근 과일 시장은 당도 경쟁에서 향기 경쟁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철마다 새로운 향의 신품종이 등장한다. 루비에스·알프스오토메 같은 미니 사과의 인기도 같은 맥락이다. 사과의 향기 물질은 껍질에 압도적으로 많다. 껍질째 먹을 수 있는 작은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면, 상큼한 향기가 입안 가득 퍼진다. 지금은 부사에 밀려났지만 과거 사과의 주류였던 홍옥 또한 향기가 유난히 풍부했다. 가을이면 사과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아마도 홍옥 덕분일 것이다.

향기가 짙은 과일은 단순히 맛으로 끝나지 않는다. 입안에서 사라진 뒤에도 기억 속에 오래 남는다. 후각은 감정을 다루는 편도체와 기억을 저장하는 해마에 바로 전달돼, 냄새 하나가 오래된 감정과 분위기까지 생생하게 불러낸다. 자라난 들판과 길러준 비, 지나온 새벽의 공기를 머금은 과일 한 조각이 다시금 우리의 미각과 후각, 그리고 마음까지 깨우는 계절이다. 온갖 향기를 품은 채 다가오는 그 한입, 자연의 약속을 기다린다.

정재훈 약사·푸드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