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시의 학부모 신모(45)씨는 최근 가슴을 쓸어내렸다. 초등학교 6학년인 딸이 “하굣길에 마주친 웬 아저씨가 ‘옛날에 같은 동네 살았는데 나 기억 안 나? 맛있는 거 사줄 테니 따라오라’고 해 ‘모르겠다, 싫다’ 하고 뛰어왔다”고 전했기 때문.
신씨는 “아이가 이번엔 안 넘어갔지만, 더 정교하게 유인하거나 물리력을 동원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고 말했다.
부모들이 난리다. 최근 전국에서 이어진 10여 건의 미성년자 유괴 시도 사건 때문이다.
지난달 28일 서울 서대문구에서 20대 남성들이 초등학생 3명을 “귀엽다, 집에 데려다 주겠다”며 차에 태우려 했고, 이달 8일에는 광명시의 고등학생이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초등생을 입 틀어막고 끌고 가려 했으며, 대구에선 60대가 “짜장면 먹으러 가자”며 초등생 팔을 잡아끌었다.
서울 서대문구 사건 초기 “혐의점이 없다”고 했다가 늑장 수사로 도마에 오른 경찰은 전국 초등학교 주변에 인력 5만여 명을 배치했다. 각 교육청도 초등 안심벨을 나눠주는 등 유괴 예방 조치에 돌입했다.
불안한 엄마·아빠들은 아이 등·하굣길을 나눠 맡거나 돌보미를 구한다. 위치 추적 장치와 호신용품 매출도 급증했다. 요즘 유괴는 왜 일어나는지,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들여다봤다.
아동 유괴, 왜 21세기에 부활했나
미성년자 약취·유인 범죄는 20세기 유물로 여겨졌다. 길거리에 아이는 많고 치안은 부실했다. 유괴는 1980~1990년대 절정에 달했다가, 2000년대 들어 CCTV와 과학 수사 기법이 발전하고 휴대폰이 보급되며 감소했다.
그러나 저출산이 심화된 최근 수년 새 되레 증가하는 추세다. 13세 미만 아동 유괴 범죄는 2013년 84건에서 2023년 204건으로 10년 새 2.5배로 증가했다.
과거 아동 유괴의 주요 동기는 ‘금전’ 또는 ‘양육’이었다. 부잣집 자녀를 납치해 돈을 요구하거나, 아이를 데려다 키우려고 납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1978년 부산 재벌의 외동딸 정효주양은 거액을 노린 범인에게 유괴됐다 생환했는데, 신원이 알려진 탓에 이듬해 또 다른 범인에게 유괴됐다. 워낙 큰 사건이라 영화 ‘극비수사’로도 만들어졌다.
반면 요즘은 성범죄 목적의 유괴(40%)가 가장 많다고 한다. 또 부모와의 원한·채무에 따른 보복 또는 협박의 수단, 장기 매매 등 국제 범죄에 이용하려는 유괴도 은밀히 늘고 있다.
최근 아동 유괴가 빈발한 데는 앞선 범죄를 모방하거나, 여론을 시험하고 유명해지고 싶은 심리도 작용했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본다.
선진국일수록 아동 납치·성폭력 범죄자만큼은 ‘인간 말종’ 취급한다. 한국에서도 아동 대상 범죄에 무기징역과 사형이 가능하지만, 미수에 대해선 관대한 경향이 있다.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유괴 미수범에 대해 1심에서 실형이 선고된 경우는 단 20%였다. 이번 서대문구 유괴 미수 용의자들도 구속 영장이 기각돼 논란이 일었다. 이런 솜방망이 처벌은 ‘유괴 장난 정도는 괜찮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형사정책연구원은 21세기 유괴 예방에 구멍이 뚫린 주요 배경으로 “맞벌이 부모와 한부모 증가, 유아 조기교육에 따른 가정과 지역사회의 아동 돌봄 기능 약화”를 꼽았다. 한국의 치안 자체는 좋아졌지만, 아이들이 집에 안전하게 머무는 시간이 급격히 줄었다는 것이다.
‘미성년자의 안전은 부모 책임’이란 인식이 강한 외국인들은 한국 아이들이 스마트폰만 들고 학원 셔틀로 오가거나 밖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며 저녁 식사까지 해결하는 것을 놀라워한다.
“낯선 사람 피하라” 과연 아이들은?
요즘 아이들은 어린이집에서부터 유괴 예방 교육을 받는다. “싫어요, 안 돼요, 도와주세요!”를 외우고, 위치 추적기와 호신용품으로 무장한다.
그런데 실제 유괴 사례에서 강제로 끌고 간 건 25%뿐. 아이의 환심을 사 스스로 따라나서게 한 경우가 75%라고 한다. 물론 어른들은 “낯선 사람 따라가지 마라”고 신신당부한다. 그런데 ‘낯선 사람’의 개념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다르다는 게 문제다.
수년 전 모 방송사가 유괴 특집을 제작하며 유아와 초등학생들에게 “낯선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만화·영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악당의 모습을 묘사했다.
얼굴에 칼자국이 있거나 우락부락 생긴 사람, 요란하거나 더러운 차림, 무서운 표정의 남성을 지목했다. 웃고 있거나 착하고 불쌍해 보이는 사람, 밝고 깨끗한 복장을 한 사람, 젊고 예쁜 여성 등은 ‘낯선 사람’이라고 보지 않았다.
이어진 유괴 모의 실험에서 아이들이 그저 한두 번 본 적 있는 사람, 특히 자신의 이름을 알고 부르는 사람에겐 경계를 풀고 순순히 따라가는 걸 보고 부모와 시청자들은 할 말을 잃었다.
실제 아동 유괴의 60%가 이웃이나 집 근처 상점·학원 종사자 등 면식범의 소행이고, 유괴범의 35%가 여성으로 다른 강력 범죄에 비해 여성 비율이 몇 배 높다.
“애완동물 잃어버렸는데 같이 찾아줄래?”라며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너 참 예쁘고 착하구나. 이 짐 옮기는 것(또는 길 찾는 것) 좀 도와줄래?” 같은 동기 부여식 유괴 수법은 언제 어디서나 먹힌다. 부모로부터 ‘하지 마라’는 소리만 듣거나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 못 받던 아이들을 우쭐하게 만들기 때문.
한 유괴범은 “차 밑(또는 트렁크 속)에 햄스터가 들어갔는데 내가 허리를 다쳐 꺼낼 수가 없네. 네가 똘똘해 보이니 한번 봐줄래?”라고 부탁한 뒤 차에 밀어 넣는 수법으로 세 번이나 어린이 유괴에 성공했다고 한다.
미국 어린이유괴예방기구 통계에 따르면 아동 유괴에 걸리는 시간은 ‘단 35초’라고 한다. 호감을 표시한 뒤 동정심이나 호기심을 유발하며 ‘착한 아이 신드롬’까지 자극하면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것.
특히 상습범들은 “놀이터에 여러 아이가 있어도 범행 대상을 본능적으로 알아본다”고 한다. 자존감 낮아 보이는 아이, 친구들과 잘 못 어울리는 아이, 애정이 결핍돼 보이는 아이들이 표적이라는 것이다.
진화하는 유괴 수법, 아이 지키려면
1997년 전국을 충격에 빠뜨린 박초롱초롱빛나리양 유괴 사건도 순진하고 호기심 많은 어린이 심리를 악용한 경우다. 28세의 임신부였던 전현주는 강남의 영어 학원에 다녀오던 만 8세 박양을 “재미있는 것 보여주겠다”며 남편의 아동극 소품 제작실로 유인했다.
전현주는 납치 당일 밤 겁이 나 울며 도망치려는 박양을 살해했다. ‘우발적 살인’으로 판단돼 무기징역이 나왔다. 아동 유괴의 시작은 손쉬울지 모르지만, 이후엔 유괴범이 통제하기 힘든 상황이 돼 단시간에 비극으로 치닫곤 한다.
영화 ‘그놈 목소리’로 만들어진 영구 미제 사건인 1991년 9세 이형호군 유괴 사건. 이군 역시 당일 살해된 것으로 추정됐다.
요즘 여아들에겐 유명 연예인 매니저를 사칭하며 길거리 캐스팅하는 척하거나 유행하는 굿즈로 유혹하고, 남아에겐 최신 장난감과 게임기, 경쟁심을 자극하는 놀이로 유인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배척하라고 가르칠 순 없다. 그래도 아동·범죄 심리학자들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이유 없는 호의나 선물 공세엔 대가가 따른다.
‘어른은 아이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는 점도 주지시키자. 어른은 진짜 응급 상황이라면 어른을 찾는다. 아파서 못 걷는다거나, 길을 모르니 같이 가달라는 이에겐 “도와줄 다른 사람을 찾을게요”라고 대응하도록 교육한다.
미성년자를 상대로 메신저·게임·소셜미디어를 통해 친분을 쌓는 온라인 그루밍(grooming·길들이기)을 거쳐 오프라인 만남을 유도하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다. ‘만난 적 없는 온라인 지인=실제로는 모르는 사람’이다. 부모들은 소셜미디어에 자녀의 신원과 등하교 패턴 등을 공개하지 않도록 하고, 아이의 온라인 활동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AI 딥페이크로 부모의 음성·영상을 흉내 내 아이를 특정 장소로 유인하는 수법도 해외에서 생기고 있다. 가족끼리만 아는 비상 암호를 정하는 것도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