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언 빙하에 도착한 2일 차(2024년 11월 7일)엔 종일 짐을 다시 분류했다. 허큘리스 인렛에서 출발해 남극점에서 한 번의 보급을 받고 레버렛 빙하로 이동할 계획이다. 먼저 남극점까지 무지원으로 이동하기 위해 연료 12L를 포함한 100kg의 짐을 썰매에 챙겼다. 그리고 남극점에서 보급받게 될 23kg의 식량과 연료를 남극 물류 항공사(ALE)에 전달했다. ALE에서 남극점까지 보급받을 짐을 비행기로 이동시켜 준다. 유니언 빙하에서 공급받은 연료는 ALE에 출국 90일 전 필요한 양을 미리 요청해 뒀다. 연료는 식량처럼 써서 없어지는 무게라 전체 일정의 10%의 여유를 더 챙겼다. 식량이 떨어져도 따뜻한 물은 마셔야 하니까!
2년 전엔 남극점까지 113kg의 짐으로 출발했다. 내 체중의 두 배에 조금 못 미치는 무게다. 이 중에서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한 전자 장비 무게가 약 11kg이었다. 카메라 4대 중 무거운 캠코더의 배터리를 충전할 큰 용량의 솔라 패널과 보조 배터리도 서너 개씩 더 챙겨야 했다. 하지만 캠코더는 결로가 심해 무용지물이었다. 먹을 걸 줄여 챙긴 캠코더는 끝날 때까지 ‘짐’이었다. 근육통으로 잠을 설칠 때마다 캠코더를 던져 부숴 버리고 싶었지만 쓰레기도 가져와야 하니 ‘차라리 황도 캔이나 가져올걸!’ 싶었다.
이번엔 출발할 때 짐을 100kg 이하로 만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쏟았다. 썰매를 다 챙기고 출발 준비가 마무리된 안도감 때문인지 출국 후 처음으로 8시간의 깊은 통잠을 잤다. 유니언 빙하엔 요리사가 준비한 신선한 음식을 테이블에서 먹을 수 있다. 구조를 위한 안전팀, 의료팀, 통신팀의 컨테이너와 다이닝룸과 화장실도 있다. 배설한 용변은 모두 육지로 싣고 나간다.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안락한 캠프다. 컨디션 회복을 위해 2~3일 더 쉬고 싶은데, 짐을 다 싸고 나니 다음 날 당장 허큘리스 인렛으로 출발이다.
인생에 두 번 다시 이곳에 올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다시 허큘리스 인렛을 향해 날아가는 게 꿈만 같다. 비행기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2023년 설원 위를 걷던 내 모습을 떠올리니 눈턱을 넘는 썰매의 덜컹임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원래의 내가 있던 야생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비행기는 허공에서 서너 번 큰 원을 돌더니 단단한 얼음 위로 스키가 미끄러지듯 착륙했다. 허큘리스 인렛은 위도 80도에 위치한 남극 내륙의 해안(inner coastal)과 바다가 얼어 설원을 형성한 빙붕의 접경지다. 푸른 바다는 남극점과 반대 방향으로 약 500km쯤 가야 나온다.
비행기의 엔진이 멈추자 드넓은 빙하의 적막한 기운에 쿵쾅거리던 심장이 ‘철커덩’ 하고 같이 꺼지는 것만 같다. 서울부터 여기까지 얼마나 멀리 왔나! 이제야 진짜 시작이다. 100kg의 썰매를 끌고 혼자 70일 동안 마라톤 풀코스를 42.3회는 달려야 종착지다. 파일럿 리치가 증인이 돼 유니언 빙하의 통신팀에 GPS로 위치 보내고, 출발 전화 통화를 오후 2시 42분(11월 8일/출국 14일 차)에 했다. 부기장 하이디에게 작은 소형 카메라를 하나 건넸다. 이 넓은 설원 위에 혼자 남겨진 아주 작은 내 모습을 하늘에서 찍어 줄 수 있겠는지 물어봤다. 그녀는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고 내가 출발하고 20여 분 후 시동을 걸었다. 돌아오겠단 약속을 지켰고 여러 번 선회했다.
세 번째로 비행기가 돌아왔을 때 반가움에 손을 흔들다 썰매에 연결된 줄에 엉켜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기계음은 멀리 사라져 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너무 고요해 내 숨소리만 크게 들렸다. 한번 더 비행기가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계속 두리번거렸다. 아무것도 없다. 드넓은 설원에 나만 혼자 남겨졌다.
※한국인 최초로 남극 대륙을 단독 횡단한 산악인 김영미의 ‘남극, 끝까지 한 걸음’을 격주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