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1881~1973)와 앙리 마티스(1869~1954).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 ‘입체파’와 ‘야수파’의 상징.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다. 여러 방면에서 너무나 달랐던 둘은 그 차이만큼 상대에게 강하게 이끌렸다. 질투와 존경, 반목과 도전이 얽힌 관계 속에서 결국은 서로를 멘토로 받아들였다. 적이자 친구, 경쟁자이자 협력자. 반세기에 걸친 두 거장의 불꽃 튀는 교류는 커다란 두 갈래 흐름으로 이어지며 20세기 현대미술의 역사를 바꿔놨다.

◇첫 만남, 팽팽한 기 싸움

마티스 자화상, 피카소 자화상(왼쪽부터). /덴마크 국립미술관·프라하 국립미술관

1906년 어느 토요일 저녁, 프랑스 파리 플뢰뤼스 거리 27번지. 미국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과 그녀의 오빠 레오 스타인이 살고 있는 이곳에서, 피카소와 마티스의 전설적인 첫 만남은 이뤄졌다. 파리에 살던 스타인 남매는 매주 토요일 저녁 그들의 아파트를 ‘살롱’으로 개방했다. 온갖 국적의 화가와 문인, 비평가가 모여 인생을 이야기하고 작품에 대한 열띤 논쟁을 벌였다. 거트루드는 훗날 살롱의 분위기를 이렇게 회고한다. “모두가 누군가를 데려왔고, 그들은 언제든 왔고, 골칫거리가 되고, 그렇게 토요일 저녁이 시작됐다.”

그날 저녁 식사의 주인공은 피카소와 마티스였다. 37세의 마티스는 야수파 선두 주자로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25세의 피카소는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신성이었다. 거트루드가 자서전에 “피카소와 마티스는 친구이자 동시에 적이 됐다”고 적었을 정도로 첫 만남부터 둘 사이에는 불꽃이 튀었다. 기 싸움에는 이유가 있었다. 스타인 남매는 세상이 두 예술가를 인정하기 이전부터 그들의 그림을 구매해 창작을 격려한 든든한 후원자였다.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두 사람은 후원자의 관심이 상대방에게 쏠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신경이 곤두섰던 것이다. 비좁은 응접실 벽은 남매가 수집한 그림으로 빼곡히 차 있었다. 그중 그들이 가장 아끼는 작품은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1905)과 피카소의 ‘꽃바구니를 든 소녀’(1905)였다.

◇충격과 충격의 충돌

1905년 제작된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벽에 나란히 걸린 두 사람의 그림. 마티스의 여인 초상화를 본 피카소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야수파 화풍의 특징인 대담한 색채 실험. 이미 ‘모자를 쓴 여인’은 1905년 파리 ‘살롱 도톤’ 전시회에서 처음 공개됐을 당시부터 격한 찬사와 조롱을 동시에 불러일으킨 문제작이었다. “야수가 그린 것 같다”는 비판에서 나온 명칭 야수파 역시 이때 처음 생겨났다. 누군가 전시장 입구에 “위험한 미치광이들의 갤러리, 입장 시 책임은 본인에게 있음”이라는 문구를 붙이기도 했다. 그림 속 모델은 마티스의 아내 아멜리다.

하지만 인물의 피부색이나 생김새는 실제와는 전혀 다르게 표현됐다. 마티스는 초록색과 주황색을 대담하게 얼굴에 얹고, 옷과 배경 역시 강렬한 원색으로 채웠다. 붓질은 거칠고 자유분방하고, 입체감은 무시됐다. 인물과 배경이 평면처럼 구성됐다. 기존 회화에서 요구되던 사실적 묘사를 완전히 거부한 것이다. “색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감정을 전하는 언어”라는 마티스의 철학이 담겨 있다. 피카소는 마티스가 자신보다 먼저 미술의 전통을 무너뜨리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이 순간부터 둘 사이에 서로의 약점과 장점을 파악하려는 치열한 탐색전이 벌어졌다.

1905년 완성된 피카소의 ‘꽃 바구니를 든 소녀’. /크리스티

1907년 피카소는 마티스가 포문을 연 혁명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반격에 나섰다. 그 결과 탄생한 작품이 ‘아비뇽의 처녀들’이다. 이 그림은 당시 누구도 본 적 없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그림 속 다섯 여인은 고대 이베리아 조각과 아프리카 마스크를 연상케 하는 뒤틀린 얼굴을 지녔고, 몸은 기하학적인 평면으로 단순화됐다. 기존 원근법, 해부학, 조화로운 미의 규범은 사라졌다. 무엇보다 한 인물을 정면·측면·후면 등 여러 시점에서 본 모습을 하나의 화면에 재구성해 담아냈다. 3차원을 2차원 화면에 입체적으로 표현하려는 혁명적인 시도였다.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지 않고 알고 있는 것을 그린다”는 피카소의 예술 철학은 20세기 미술사의 결정적 분기점이 됐다. 마티스가 ‘모자를 쓴 여인’을 통해 색채를 해방했다면,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로 형태를 해방한 것이다. 두 예술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현대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서로의 작품을 교환한 까닭?

피카소의 예술 실험을 보여주는 대표작 ‘아비뇽의 처녀들’(1907). /뉴욕현대미술관

서로를 알게 된 지 1년이 지난 1907년 가을, 두 사람은 우정의 표시로 그림을 교환했다. 마티스는 피카소의 정물화 ‘주전자, 그릇, 레몬’(1907)을 가져갔고, 피카소는 마티스가 그의 딸을 그린 ‘마르그리트 마티스의 초상’(1907)을 골랐다. 이 ‘물물교환’을 직접 지켜본 거트루드가 남긴 말이 흥미롭다. “두 사람 모두 가장 흥미롭지 않은 작품을 골랐다…. 나중에 두 사람은 그 그림을 상대의 약점을 보여주는 예로 활용했다.” 피카소는 훗날 거트루드의 증언이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실제로는 상대의 독창적 화풍을 배울 수 있는 그림을 고르려 애썼다고.

재밌는 일화가 있다. 피카소의 작업실 벽에 걸려 있던 마티스의 딸 초상화는 고무 흡착 화살(다트)의 표적이 됐다. 피카소의 추종자들이 장난스레 “눈 맞췄다!” “이번엔 코야!” 웃고 소리치며 작품에 다트를 던진 것이다. 피카소는 나중에 자신이 그런 행동을 말리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고백했다. 마티스와 피카소는 북극과 남극처럼 성격, 삶의 태도, 작업 방식, 예술관이 정반대였다. 프랑스 북부 출신인 마티스는 자제심이 강했고, 사생활을 중요하게 여겼고, 항상 점잖은 말투와 단정한 옷차림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교수님’으로 불렸다. 그의 예술 철학은 “그림은 안락의자처럼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믿음이었다. 스페인 남부 출신인 피카소는 격식이나 사회적 규범을 의식하지 않는 도발적인 기질이 강했고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전위적인 예술가 집단 내에서 자유를 상징하는 존재였고 때로는 스스로를 어릿광대에 비유하기도 했다. 피카소의 예술관은 “예술은 사람을 불편하게 해야 하고 그것이 변화를 만든다”였다.

◇전설로 남은 합동 전시

피카소 ‘노란 머리의 여자’(1931). /구겐하임미술관

1918년 1월 23일, 프랑스의 유명 미술상 폴 기욤이 기획한 피카소와 마티스의 첫 합동 전시회가 파리의 폴 기욤 갤러리에서 열렸다. 이 2인전은 두 천재를 현대미술의 대표 주자로 일반 대중과 미술계에 알린 역사적인 데뷔 무대였다. 미술 평론가 기욤 아폴리네르는 전시 도록 서문에 이런 말을 남겼다. “1906년 이후 피카소와 마티스는 유럽 전위예술의 최전선에 있었고 서로의 움직임을 긴장 속에서 지켜봤다.”

피카소의 그림에 응답하듯 마티스가 새롭게 그려낸 ‘꿈’(1940). /개인 소장

두 사람은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같은 주제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을 주고받는 예술의 대화를 이어갔다. 대표적 예로 마티스는 피카소의 ‘노란 머리의 여자’(1931)를 떠올리며, 그에 응답하는 듯한 작품 ‘꿈’(1940)을 완성했다. ‘노란 머리의 여자’는 피카소의 연인 마리 테레즈를 모델로 한 초상화다. 부드럽게 웅크린 자세, 곡선으로 휘어진 형태, 부풀어진 볼과 둥근 이마는 관능적이면서도 평화로운 분위기로 가득하다. 얼굴은 옆모습과 정면이 함께 보이는 입체파 방식으로 표현됐다. 마티스의 ‘꿈’은 여성의 포즈는 그대로 가져왔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냈다. 형태보다 색의 순수한 감정 표현에 집중했다. 단순한 선과 빨강, 노랑, 검정, 흰색 면을 통해 여인의 꿈꾸는 듯한 평온한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완성된 거울 같은 작품이다.

◇함께 빛난 두 개의 별

그들은 서로를 두려워했고, 동시에 열렬히 사랑했다. 1954년 11월 3일 마티스는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고 소식을 들은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를 괴롭히던 마티스가 사라졌어. 내 그림의 뼈대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었는데.” 마티스 역시 생전에 고백한 적이 있다. “우리는 자주 만나야 해. 우리 중 한 명이 떠나면, 남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게 있기 때문이야.” 그들은 서로에게 최고의 멘토이자 멘티였고, 서로를 완성시킨 라이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