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정치 사이에 있는 경계선을 정치가 침범하는 중이다. 근현대사, 특히 건국과 해방에 관한 논란은 전쟁에 가깝다. 무엇이 건국이고 무엇이 해방인가. 그 전쟁에 대해 오직 임시정부 사료만으로 알아봤다.
1945년 9월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
해방 후 나온 문건 하나를 본다. 발표 날짜는 1945년 9월 3일이다. 일본 도쿄만 해상 미국 항모 미주리호에서 벌어진 일본 항복 조인식 다음 날이다.
‘만일 허다한 우리 선열의 고귀한 열혈의 대가와 중·미·소·영 등 동맹군의 영용한 전공이 없었으면 어찌 조국의 해방이 있을 수 있었으랴. 우리가 처한 현 단계는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는 과도적 단계이다. 건국의 초기가 개시되려는 단계이다. 친애하는 우리 동포 자매 형제여, 우리 조국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민주 단결을 완성하며 국제 간의 안전과 인류의 평화를 증진하기 위하여 본정부의 당면 정책을 실행하기에 공동 노력하자.’
해방은 선열과 동맹군의 전공이 만든 결과였고, ‘지금은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는 과도기’라고 선포했다. 해방은 건국이 아니라고 규정했다. 현실을 그렇게 기록했고 과제를 그렇게 적시했다.
문서를 발표한 주체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다. 제목은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다. 이 문서는 9월 3일 중국 충칭에서 발표됐고 국내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 사무국’이 같은 내용으로 삐라를 만들어 살포했다. 오탈자를 빼면 원본과 동일했다. 그리고 임정 요원 귀국이 확정된 11월 초 임정 산하 ‘대한국군 준비 총사령부’가 각 언론사에 원본을 재배포했다.(1945년 11월 9일 ‘민중일보’, ‘중앙신문’) 이렇게 임정은 해방 직후 ‘건국이 개시됐다’고 선언했고 귀국 직전 ‘건국’을 하자고 또 한번 촉구했다.
1941년 임정의 ‘대한민국 건국강령’
이보다 4년 전인 1941년 11월 28일 임시정부 국무위원회는 국무위원 조소앙이 초안을 작성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채택했다. 국무위원회 주석은 김구다. 내용은 이렇다.
‘우리나라가 대외 주권이 상실되었을 때 순국한 선열은 우리 민족에게 한마음으로 국권을 회복할 것(同心復國‧동심복국)을 유언했다. 임시정부는 복국(復國‧국권 회복)과 건국(建國)을 통해 독립·민주·균치(均治)의 삼종 방식을 동시에 실시할 것이다.’
임정은 ‘국호를 정하고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세우고 임시약법을 반포하고 적에 포위된 국토와 인민을 완전히 탈환하는 단계’가 이 ‘국권 회복’ 즉 복국 단계라고 규정했다. 이 단계를 완성해야 비로소 ‘건국 단계’가 개시된다고 임정은 선언했다.(1941년 12월 8일 ‘임시정부 공보’ 72호)
강령에는 ‘건국’ 개념도 명확하다. ‘적의 일체 통치기구를 국내에서 완전히 박멸하고 국가의 수도를 정하고 중앙정부와 중앙의회의 정식 활동으로 주권을 행사하며 선거와 입법과 임관(任官)과 군사와 외교와 경제 등에 관한 국가의 정령이 자유로 행사되어 삼균제도의 강령과 정책을 국내에 시행하기 시작하는 과정을 건국의 제1기라 한다.’
일본 패전과 ‘임정 주도 건국’
‘백범일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1945년 8월 중순 시안에서 “왜적이 항복한다오!”라는 전갈을 들었다.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 간의 발언권이 박약하리라.”’(김구, 초판본 ‘백범일지’, p351, 백범일지 출판사무소, 1947)
복국, 국권 회복도 하지 못했는데 해방이 왔다, 라고 김구가 고백했다. 그래서 나온 포고문이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다. 김구가 선언했다. ‘복국(국권 회복)의 임무를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는 과도적 단계에 들어갔다. 친애하는 우리 동포 자매 형제여 본정부의 당면 정책을 실행하기에 공동 노력하자!’ 임시정부가 건국을 주도하겠다는 선언이다.
1946년 임정이 재천명한 ‘건국’
식민 시대 내내 국내에서 활동하던 운동가들은 이들과 무관하게 건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운형이 만든 좌익 계열 ‘건국준비위원회’는 8월 28일 이렇게 선언했다. ‘전후 문제의 국제 해결에 따라 조선은 제국주의 일본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새 국가의 건설을 위한 중대한 과업은 우리의 앞에 놓여 있다.’(국사편찬위원회, ‘사료로 본 한국사’,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선언‧강령‘) 9월 6일 여운형과 박헌영은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설립을 선언했다.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했다. 11월 23일 임정 요인들이 귀국했다. 1945년 12월 중순 서울 국일관에서 열린 임정 요인 환영연에는 임정 요인 전원이 참석했다. 술이 돌고 신익희가 이렇게 내뱉었다.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다.” 장덕수가 말했다. “그러면 나는 어김없이 숙청감이군?” 신익희가 대답했다. “어디 설산(장덕수)뿐인가!”(이경남,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1981, pp.329~332) 임정이 국내 활동가에게 보인 이 같은 적대감은 분열을 불렀다. 여운형은 ‘국내외 혁명세력을 분열시키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이만규, ‘여운형선생투쟁사’, 민주문화사, 1946, p226)
해가 바뀌고 1946년 2월 1일 임시정부 선전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관한 참고문건 제1집’을 비매품으로 출간했다. 임정은 이 문건에 1941년 건국강령과 1945년 ‘동포에게 고함’ 포고문을 다시 실었다.(‘자료대한민국사’ 1권, ‘1946년 1월 8일 임정 대한민국건국강령 발표’) 동일한 자료를 만 4년 2개월 사이 네 번 반복해서 공개했다.
1948년 8월 수도, 의회, 정부
그렇다면 임정과 김구가 계획한 건국 1기, 중앙정부와 중앙의회가 정식 활동을 하고 수도가 정해진 시기는 언제인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 의해 국회의원 198명이 선출됐다. 3주 뒤인 5월 31일 중앙청 국회의사당에서 제헌의회가 개원했다. ‘중앙의회’다. 이들이 헌법을 만들었고, 헌법에 따라 ‘중앙정부’가 수립됐고 관습에 따라 서울이 자연스럽게 대한민국 ‘수도’가 됐다.
그때가 1948년 8월 15일이다. ‘임정 건국강령’ 논리에 따르면 이 1948년 8월 15일이 대한민국이 건국된 날이다. 임시정부 그리고 김구 본인은 국권 회복과 해방, 건국을 별도 단계로 규정했다.이날이 건국 1기가 끝나고 2기가 시작된 날이다.
김구와 임정은 복국과 건국을 분리했고, 건국 전 단계를 ‘복국’이라 불렀다. ‘정부로서 적과 혈전을 계속한 뒤, 당‧정‧군 기구의 국내 이전과 국제적 지위를 확보해 완전 탈환 후 조약을 체결해서’ 복국을 완성하는 단계론을 천명했다.
임정이 거듭해서 제시한 건국 로드맵에서 주체는 철저하게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였다. 모든 문서에 나오는 복국과 건국은 한국독립당의 일당 통치와 이를 통한 임정을 계승한 정식 정부에 의해 진행돼야 한다고 적혀 있다.(김인식, ‘삼균주의‧대한민국 건국강령과 임시정부 절대옹호론’,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6,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
1947년 건국실천원양성소
1947년 3월 ‘건국실천원양성소’라는 교육기관이 설립됐다. 소장은 김구였고 명예소장은 이승만이었다. 설립 목표는 ‘건국을 실천할 인력을 양성하고 지도하는 실천원 양성’이었다.(이홍구, ‘해방 후 백범 김구의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과 운영’, 단국대 사학과 석사논문, 2008)
1948년 이 기관의 이념 교육 자료로 ‘한국민족의 당면진로’(김석길, 건국실천원양성소지도부, 1948)가 출간됐다. 북한은 물론 국내 사회주의 계열에 맞서서 민주주의 이념을 교육하려는 이론서다. 소장인 김구가 서문에 이렇게 썼다.
‘아직 완전한 자주독립을 찾지 못한 우리 민족은 먼저 자주독립할 것이요 독립정부는 반드시 균등한 사회정책을 실시할 것이다.’
저자인 언론인 김석길은 본문에 이렇게 적었다. ‘과거 4년간의 건국운동 그 자체가 얼마나 파란곡절이 심했던 것인가. 우선 우리 강토와 주권부터 찾은 후 진정한 세계 평화를 건설해야 할 것이다.’(김석길, 앞 책, pp.225, 226)
이 책이 공식적으로 발행된 날짜는 1948년 5월 10일이다. 바로 총선거가 벌어진 날이다. 김구와 임정 세력은 총선에 불참했다.
그리고 의회가 탄생했다. 그리고 정부가 탄생했다. 수도가 정해졌다. 대한민국이 건국됐다. 임정의 건국강령에 따른 로드맵으로도 그렇다.
건국실천원양성소는 건국 1년 뒤인 1949년 8월 23일 해체되고 한 달 뒤 홍익대에 인수됐다.(1949년 9월 25일 ‘경향신문’. 이홍구, 앞 논문 재인용)
대한민국 헌법에 따르면 1919년은 임정 법통(法統)의 기원이다. 법통을 이으려면 임정이 규정한 ‘복국과 건국’ 단계론도 이어야 한다. 1941년 임정이 선언한 대한민국 건국강령 로드맵에 따라, 건국은 1948년 8월 15일 개시됐다. 매국노나 역사 내란범이 아니라 임정과 임정 주석 김구가 그렇게 선언했다. 이 사료들은 모두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와 국립중앙도서관과 임정기념관에 공개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