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미식 대전’이 벌어지고 있다. 미쉐린 2스타를 받은 이준 셰프의 ‘도우룸’, 용리단길(신용산·삼각지 일대) 줄 서는 식당의 원조 격인 ‘쌤쌤쌤(SAMSAMSAM)’, 미국 뉴욕의 대표 스테이크 하우스인 ‘울프강 스테이크하우스’의 국내 2호점까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내로라하는 식당이 최근 연이어 광화문에 문을 열고 있다. 대표적인 오피스 타운으로, 직장인들이 즐겨 찾는 노포가 많은 광화문은 어떻게 ‘신(新) 미식 시대’를 열게 됐을까.

그래픽=송윤혜

◇홍대는 어렵고, 성수는 너무 힙하다

미식 대전은 지난달 말 개장한 KT광화문빌딩 웨스트가 불을 붙였다. 광화문의 새 랜드마크를 표방하며 문을 연 이곳은 줄 서서 먹을 정도로 인기가 있는 식당이면서도, 그간 지점 내는 것에 소극적이었던 맛집들을 불러 모았다.

이번 식당가 구성을 담당한 김흥규(46) KT 에스테이트 팀장은 “서울에서 줄 서는 맛집 중 크게 유행 타지 않으면서도 매장 수가 5개 이하인 식당들을 찾았다”고 했다. “강남은 제외하고 강북에서 소비력 좋은 30~50대가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가 의외로 많이 없다. 홍대는 너무 10~20대 취향이라 어렵고, 성수는 지나치게 힙(트렌드에 민감)하다. 그런 이들에게 좋은 선택지를 주고 싶었다”고 했다.

광화문은 광장이 있는 데다 세종문화회관과 교보문고, 경복궁 등 편하게 나들이할 수 있는 공간이 많다. 김 팀장은 “이들은 객단가(고객 1인당 평균 지출 금액)는 좀 나가더라도, 강남 가지 않고도 만족스럽게 시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원한다”며 “그런 수요가 충분하다고 봤다”고 했다.

KT빌딩 2층에 들어선 ‘도우룸’이 대표적이다. 한식 파인다이닝 ‘스와니예’로 미쉐린 2스타를 받은 이준 셰프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올해 미쉐린 가이드 서울 셀렉션 부문(미쉐린의 추천 식당)에 오른 이 식당은 서래마을에 이어 처음으로 새 지점을 열었다.

같은 건물 지하의 레스토랑들도 대부분 비슷한 공식을 거쳐 입점했다. 중식 레스토랑인 ‘보보식당’과 퓨전 한식당 ‘난포’는 각각 압구정과 성수동에서 줄 서는 식당으로 유명했다. 2층의 ‘오츠 커피’도 ‘서울 3대 아인슈페너’로 불리며 연남동에서 이름 날리던 집이다.

KT 광화문빌딩 웨스트 2층에 자리한 '오츠 커피'의 말차 아인슈페너와 번. 창문 너머 광화문이 보인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주요 지역 맛집 속속 집결

앞서 광화문에 자리를 잡은 식당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미국 뉴욕의 대표 스테이크 하우스인 ‘울프강 스테이크하우스’는 지난달 2호점을 서울 광화문에 냈다. 2015년 청담동 1호점에 이어 10년 만에 낸 2호점이다. 울프강 스테이크하우스 코리아 이동훈(42) 대표는 “10년간 2호점을 어디에 내야 할지 고심하며 거의 서울 전역을 공부했다”고 했다.

KT 빌딩이 생기기 전 복합 오피스 타운의 대표 주자였던 디타워는 최근 용리단길 핫플 ‘쌤쌤쌤’을 1층에 새로 오픈하며 일격에 나섰다. 샌프란시스코 가정식을 콘셉트로 미국 스타일의 라자냐, 스테이크 등을 판매한다. 같은 건물 5층에는 도쿄 현지 레시피와 셰프 교육 시스템을 그대로 적용했다는 ‘이타마에 스시’가 새로 입점했다.

탈북자 출신 1호 박사인 이애란 대표가 운영하는 능라밥상은 올해 LG광화문빌딩 지하에 지점을 새로 냈다. 평양냉면 한 그릇이 1만8000원으로 평냉 중에서도 비싼 편에 속하지만, 여름 내내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온라인 식당 예약 플랫폼 캐치테이블에서 부산 웨이팅 맛집 상위권에 늘 꼽히는 장어덮밥 전문점 ‘해목’도 올 초 서촌에 직영점을 냈다. 삼성동 맛집 중앙해장도 광화문에 새로 열었다.

◇고연봉 직장인에 전통적 부촌 수요도

광화문이 미식 1번지로 떠오르는 건, 이를 떠받치는 ‘지갑’이 두둑하기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IT 개발자들의 집합지가 판교, 금융인의 집결지가 여의도라면, 광화문 일대는 일명 ‘문과들의 땅’으로 불린다. 하나은행·신한은행 본점, SK나 한화 같은 대기업 본사,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외국계 기업, 김앤장·세종 등 대형 로펌, 미국·영국·일본 등 주요 대사관이 밀집해 있기 때문이다.

서울 평균 연봉(4797만원·지난해 12월 국세청 자료)은 물론이고, 웬만한 지역의 직장인보다 높은 연봉을 받는 경우가 많다. 아파트 종합 정보 플랫폼 호갱노노에 따르면 을지로 1가 소재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의 평균 연봉은 9900만원으로 여의도동 평균 7450만원보다 높았다. 호갱노노는 각 기업 본사 소재지 기준 국민연금 납부 금액을 추산해 동별로 연봉을 추정한다. 신한은행과 삼성물산 등이 있는 태평로 2가는 8550만원, SK텔레콤이 자리한 을지로2가 8080만원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스스로도 구매력이 있을 뿐 아니라, 비즈니스 미팅이 많은 직업군이기도 하다. 한 외식업 관계자는 “광화문에선 ‘낮엔 자기 카드, 밤엔 법인 카드’란 말이 있다”며 “이런 특성 때문에 가격대가 조금 높더라도 분위기가 깔끔하고 조용한 식당, 코스가 나오는 룸이 있는 식당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우마카세’(셰프가 그날의 좋은 한우 부위를 코스 형태로 제공하는 레스토랑)도 광화문에서 유행이 시작됐다. 한 정육 식당 관계자는 “비즈니스 미팅 자리에서 ‘1인분만 더 추가해 달라’ 같은 말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소고기 구이를 메인으로 하되 음식이 알아서 끊기지 않고 나오는 ‘우마카세’ 식당들이 나온 것”이라고 했다.

광화문은 전통의 부호들이 더 가까이 산다는 점에서도 플러스 요인이 된다. 울프강에는 클래식 버거(2만8000원) 등 단품 메뉴도 있지만, 스테이크가 메인으로 나오는 점심 코스가 1인 11만원 정도로 가격대가 높은 편이다. 아무리 고소득 직장인이라도 점심에 쉽게 가기는 어려운 가격. 이동훈 대표는 “10년 동안 청담동 매장을 운영해보니, 다니는 고객 중 상당수가 성북동이나 평창동 등 전통적 부촌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더라”고 했다.

울프강 스테이크하우스의 '포터하우스 스테이크'.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광화문 인근에 포시즌스호텔이나 조선호텔·롯데호텔 등 5성급 호텔이 많다는 것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이 대표는 “코로나 이후 광화문 인근 특급 호텔 F&B 매출이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했다”며 “평일에 직장인 손님이 없더라도 주말에 이 호텔에 묵는 외국인 손님들이 오는 경우를 고려했다”고 말했다.

◇집회 시위 등은 변수로 작용

다만 매주 정례 행사처럼 진행되는 집회 시위 등은 광화문 상권의 감점 요인이다. 한 식당 관계자는 “주말이면 상견례 수요가 많은데, 과격한 시위 예고가 나올 때마다 취소율도 따라간다”고 했다. 실제 예비 신랑 신부들이 모인 커뮤니티에선 ‘이번 주 광화문 시위 있다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 ‘집회 때문에 결국 옮겼다’는 고민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광화문 인근에서 식당 네 곳을 운영하다 지금은 모두 접었다는 A씨는 “광화문에서 10년 버티기가 정말 어렵더라”며 “주말 시위는 물론이고, 코로나 때 광화문 일대는 강남보다 더 큰 타격을 받았는데 관공서나 대기업 등이 많아 정부 지침에 바로바로 예민하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고 했다.

회식을 기피하는 문화가 확산된 것도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A씨는 “예전에는 오후 9시나 10시까지 회식을 했다면 요즘엔 저녁 8시 반이면 다 작전이라도 짠 듯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며 “‘부어라 마셔라’ 하는 문화가 없어지면서 술 판매량이 크게 줄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A씨는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에서 매장을 운영한다는 건 매출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고 했다. “광화문에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눈과 귀가 모여 있다. 그중 입을 담당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게 좋아서 차기 사업 구상도 광화문에서 다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