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산이 고향인 신동주(61)씨. 3남 3녀 중 넷째. 중학교 때 공부를 곧잘 해 대전으로 유학 갔다. 아버지가 떡방앗간을 크게 해 유복했다. 대입 성적이 평소 실력보다 잘 나오는 바람에 지방에서의 교사 꿈을 접고 서울 명문대 신방과에 들어갔다.

졸업 후 S그룹 공채에 합격, 계열사 S호텔에 취직했다. 10년 넘게 홍보⸱마케팅⸱영업 쪽에서 일하며 한때는 예산 5억원을 굴리기도 했다. 직장 생활이 지루해질 무렵 소위 다단계 판매에 빠졌다. 친하게 지낸 선배의 꾐에 걸려든 것. 그 바닥에선 흔히 ‘돈 없이 돈 버는 일’이라 ‘돈교(敎)‘, ’머니(Money)교’라고 부른다. 4000만원 빚을 졌다. 설상가상 아버지가 65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장례식장에서 전 직장 동료가 강원도 원주에 퇴직자들 중심으로 관리용역회사가 들어선다고 귀띔해줘 일종의 재입사를 했다. 3년 성실히 근무하다 IMF 사태가 터져 해직됐다. 이후는 생각하기도 싫은 실패의 연속. 이걸 해도 망하고 저걸 해도 망했다. 그중엔 중저가 짜장⸱짬뽕⸱탕수육 브랜드도 있었다. 꽤나 기대를 건 체인점이었으나 본사가 자금난을 견디지 못했다. 회사 이름은 ‘웃기는 짜장’. 이럴 때 ‘웃프다’라고 해야 되나? 요즘 이런 업장이 그런대로 되는 거 보면 사업은 역시 타이밍이다.

신동주씨가 막 완성된 발효떡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강성곤 제공

이것저것 요식업 문을 줄기차게 두드렸지만 1억원쯤 또 손해만 봤다. 대인기피증이 왔다. 하늘을 못 쳐다봤다. 어스름 해 질 녘이면 마트 가서 소주 한 병씩 사와 들이켰다. 용량이 점점 1L 페트병으로 바뀌었다. 아내는 교회⸱기도원 가서 내내 빌었다. 그러구러 6개월쯤 지나자 누군가 필리핀 이주를 권했다. 여기보다 싼값에 안락하게 지낼 수 있다고. 2005년 짐을 쌌다. 영주권 비슷한 은퇴 비자로 마닐라 북쪽 도시 바기오에 정착했다. 주 수입원은 홈스테이. 영어 배우러 온 한국 중고생이 대상. 가디언(보호자⸱후견인) 역할을 해주며 돈도 벌고 보람도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도 적응을 잘했다.

아마도 가장 행복한 8년이었을 터. 미얀마로 떠나기 전까지는. 한국으로 그냥 왔어야 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귀가 얇은 걸 극복하지 못했다. 이번엔 다른 선배였다. “미얀마가 뜨고 있다. 건강에 관심이 많다. 한국 사람은 신뢰한다”라며 수도 양곤에 의료기기센터를 내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바글바글 매장 앞에 사람들이 줄 선 모습, 선배는 1호점 내서 모은 돈다발 사진을 보여줬다. 다 가짜였는데 그땐 몰랐다. 쫄딱 망했다. 필리핀서 번 돈 2억5000만원을 다 날렸다. 장본인은 지금도 동남아를 무대로 여전히 활개 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2016년 귀국.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놀았다. 아내는 전공을 살려 일본어 학원 강사로, 과외 교습으로 뛰어다녔다. 놀다 지칠 때쯤 간신히 보험회사 영업사원으로 재취업하고, 잘될 땐 월 1000만원도 벌었다. 그랬는데 코로나가 덮쳐 또 ‘짤렸다’. 어느 날 이른바 ‘현타’가 왔다. 좋아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자. 노래와 요리였다. 중학생 때 테너 엄정행의 노래 ‘목련화’를 듣고 감동한 이후 합창단 활동할 때가 기억났다. 군대에서 오락시간에 사회도 자주 봤었고, 트로트를 불러 환호를 받을 때 짜릿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호텔리어 경력에 힘입어 늘 기웃거리던 요리가 그다음. 노래는 돈이 안 될 것 같고 요리를 먼저 체계적으로 배워보기로 마음먹었다. 예전 직업훈련원이던 한국폴리텍대학 외식조리과정에 입학했다. 놀랍게도 교육비⸱실습재료비⸱식비 등이 전액 무료. 버스⸱전철로 왕복 4시간 거리지만 개의치 않았다. 4개월 과정을 마치고 시험 쳐서 한식조리사자격증을 땄다. 뛸 듯이 기뻤고 이제 다 된 줄 알았다.

그러나 다시 시작이었다. 처음이 양고기를 절단하고 포장하는 일. 힘에 부쳐 나자빠졌다. 다음은 샤부샤부집. 고기와 야채를 정량에 맞게 썰어야 하는데 역시 체력 고갈로 포기. 다음은 소위 전처리(前處理)공장. 식재료를 대량으로 준비⸱정리하는 작업장, 죽는 줄 알았다. 중장년 맞춤형 일자리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러다 우연히 푸드벤처기업 간판을 단 떡집에 취직했으나 젊은 사장은 열정이 없었다. 얼떨결에 매장을 인수해 오늘에 이른다. 떡방앗간집 아들이 몇십 년 만에 떡집 주인이 된 것. 그는 발효떡에 꽂혀 오직 그것 하나만 한다. 방부제 안 쓰고 3박 4일 숙성 원칙을 지켜 전문성을 유지하는 걸 긍지로 삼고 있다. 노래 얘기가 빠졌다. 없는 돈에 성악 레슨을 틈틈이 받아 가곡⸱아리아⸱트로트 등 멀티 레퍼토리를 자랑한다. 무대는 어떻게 마련하느냐고? 행사 주문이 힌트다. 노래 찬스를 주면 떡값 할인으로 보답한다. 개인용 앰프를 구비해 번듯한 반주 동반이라 제대로다. 술렁대던 교만⸱욕심과 작별하고 먼 길 돌아 마치 운명처럼 떡 빚고 노래하는 삶이 찾아왔다. 혼돈⸱방황과 마주할 일이 더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