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다가옴을 알려주는 들깨꽃.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시골 밭에서 찍었다. 고소하고 그윽한 향기가 그 어느 해보다 반 갑다. /고혜련 제공

직장에서 오래전 친분을 가졌던 동료·선후배와 가끔 통화할 때가 있다. 첫인사가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다. 그냥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겠지만 나는 굳이 “자유가 구속이며 족쇄입니다. 하하!”라고 말문을 연다. 그냥 웃고 넘길 때도 있지만 상대 역시 대충 동감한다는 투다.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못 알아챌 수도 있겠다. 동년배로 한때 같은 역할로 함께 고민했던 그들 존재가 고맙기조차 하다. 요즘 별말 없이도 상통하는 사람 찾기가 어디 쉽던가.

‘자유가 곧 구속’이라는 말이 떠오를 때마다 함께 생각나는 문장이 있다.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아주 오래전 어느 천재 시인이 일갈한 명언을 내 방황의 변명용으로 쓰고 있다. “엄마 나이가 몇인데 이제 새삼 무슨 방황이냐?”고 내 아들이 비웃을 것 같아서다. 그 문장에 기대고 안심하면서 나는 여전히 방황 중이다.

족히 몇 년은 더 됐다. 자유로운 시간이 넘치는 인생 후반전, 그 연장전인 종반전을 대비해 또 다른 ‘지향점’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 나는 또 변명한다. 오랜 세월, 마감 시간에 쫓기며 그 성과를 즐겼던 언론인 출신의 ‘가성비 강박증’ 때문이라고. 타인이 차려준 직장 생활을 오래전 벗어나 내 주도의 일을 해 왔지만 인생 중반기에 이미 길든 강박증은 벗어나기 힘들다. “좀 느긋하게 놀면 좀 좋아. 그만하면 먹을 것 걱정은 안 해도 되는데….” 친구들이 타박하지만 그게 안 되는 걸 어찌하리. 나는 또 다른 변명을 들이민다. “인간은 생명불식(生命不息)의 존재라잖냐”다. 그래서 노상 종종걸음인 거다.

퇴직 전후 자주 했던 일이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것이 국내외 이 구석 저 구석 여행이다. 먼 지구촌을 수시로 어슬렁거리고 돌아오는 것도 그중 한 가지. 말만 어슬렁이지 여행 마니아인 나는 누구보다 바쁘다. 현역 ‘글쟁이’라도 되는 듯 받아 적고 사진 찍고 자료 찾고 아주 바쁘다. 마치 현장에 급파된 듯 군다. 그 현장의 느낌과 모습을 그냥 날려보내기 아까워서다. 그 낯섦과 설렘은 결국 글로 남는다. 나 원 참, 강박증이다!

평소 주말에는 내가 그토록 진심인 자연 속에 머문다. 주말 도시 농부 흉내 내기다. 이 역시 시간상 이력이 꽤 길지만 아직 초보자 수준으로 매년 실패 연속이다. 다시 신발끈을 동여매리라. 뭐든 프로급으로 달려들지 않으면 되는 게 없으니 반성하는 마음으로 ‘구조조정’할 참이다. 온 마당을 뒤덮는 칡·환삼덩굴과 식물들을 까맣게 태우는 마름병에 진저리를 치지만 내 인생 여정을 바꿔준 자연은 잊을 수 없다. 묵직한 나이에 제 역할은 못 해도 여전히 자연 속 조물주의 위대한 예술혼은 사랑하련다.

최근에는 자제했던 주변인들과의 모임도 열심히 다니려고 다시 발동을 걸었다. 직업상 매일 부지기수의 사람들을 겪어야 했던 온갖 기억이 이제 점차 사라져가는 덕분일까. 잡념 없이 장시간 몰입 속으로 몰아넣었던 도서관 속 시간은 그사이 여러 권의 책으로 자리 잡았다. 책 내고 싶은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영세한 출판사도 하나 차렸다.

이제 사람 속으로 열심히 진입 중이다. 그동안 진일보한 반성과 깨달음, 선한 행위와 사랑으로 인생 종반전의 허무를 좀 달래려 한다. 나는 행복한 것인가? 물으면서 누구나 외쳐대는 단어, ‘행복’의 정의를 새삼 찾아본다. ‘일상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껴 흐뭇한 상태’란다. 행복은 기필코 인간이 풀어야 하는 해묵은 숙제인가?

“인간은 선한 행위를 할 때 비로소 행복하고 그 행복이 오래간다”는 것을 오랜 시행착오 끝에 깨우쳤다면 행운이다. 인간을 만든 조물주가 그러라며 유전자 속에 설계한 동물이라고 믿고 더 이상 의심하지 않을 생각이다. 거기서 나 같은 사람이 감히 무용지용(無用之用)의 기회를 찾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