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혼집으로 경기도 20평대 아파트를 전세로 구한 30대 회사원 강모씨는 난감해졌다. 집주인이 “벽과 천장, 싱크대 등에 구멍을 뚫지 마라”고 했기 때문이다. 입주해보니 시계·거울부터 정수기와 블라인드도 달아야 하고 곳곳에 수납 선반도 아쉬운 상황.
임대차 계약 관행상 ‘꼭 필요한 곳엔 주인 허락을 받고 못을 박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일일이 물어보는 게 눈치 보이는 데다 “자칫 집이 손상되면 전세 보증금을 떼일 수도 있다”고 들어 겁이 났다.
비슷한 고민, 전국의 수많은 세입자들이 안고 있다. 지난달 통계청은 약 2300만 가구 중 자기 소유 집 없이 전·월세로 사는 세입 가구가 962만 가구라고 밝혔다. 이 중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몰려 있으며, 서울은 무주택자 비율이 17개 시·도 중 유일하게 과반(51.7%)을 차지한다. 무주택자 증가는 집값 폭등에 수도권 집중, 1인 가구 증가가 맞물려 빚어진 현상이다.
좁고 수납 공간이 부족한 한국의 주택. 그러나 세입자는 구멍 하나 마음대로 못 뚫는다. 그 고충을 해결해주는 시장이 등장했다. 바로 ‘무(無)타공 인테리어’다.
생활 소품부터 무거운 전자 제품까지 붙이고 끼우고 걸고 매다는 신박한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하도 신박해 자기 집에 사는 이들도 무타공 인테리어에 눈을 돌린다. 저가숍 ‘다이소’ 등에서 무타공 상품 매출이 늘고, ‘무타공 마켓’ 같은 전문 온라인 몰과 시공 업체들도 성업 중이다. 대기업까지 뛰어든 무타공 시장은 매년 급성장한다.
망치와 못, 나사를 쓰지 않는 인테리어 노하우를 엿보자. 선반과 거울, 액자는 양면테이프 또는 특수 접착제로 붙이고, 창틀에 꽂거나 문에 건다. 현관문 도어록과 도어 스토퍼(속칭 말발굽), 세면대, 장식장과 화분장까지 별의별 것들이 딱 붙일 수 있게 나온다.
무타공 접착 기술은 웬만한 하중과 충격도 버틸 수 있게 진화했다. 단돈 750원짜리 에폭시 본드 ‘XXX픽스’는 욕실 거울과 드라이어 거치대, 주방 식기건조대까지 붙였다가 칼로 말끔히 떼어낼 수 있다고 소문났다.
커튼과 블라인드도 천장 안 뚫고 달 수 있다. 일명 ‘안 뚫어 고리’를 커튼 박스에 눌러 붙여 레일을 걸거나, 암막 블라인드를 창틀에 붙이는 것. 긴 지지대를 바닥부터 천장까지 압착해 시스템 옷장도 만든다.
현관과 주방 등에 무타공 가벽 또는 중문을 세워 아늑한 공간을 만들고, 깊은 붙박이장이나 싱크대 하부장에 무타공 레일을 깔고 드르륵 미끄러지는 서랍을 얹는 살림 고수들을 보면 물개 박수가 터져 나온다.
도배와 바닥 공사도 ‘포스트잇’ 붙이듯 한다. 20대 공무원 장모씨는 서울 원룸 오피스텔에 월세로 들어가 필름·시트지와 각종 무타공·무시공 제품으로 직접 인테리어를 했다. 곰팡이 핀 벽에 ‘붙이는 페인트’를, 칙칙한 바닥 장판엔 ‘붙이는 타일’을 덧댔다. 퇴거할 땐 드라이어로 뜨거운 바람을 쐬며 살살 떼면 된다고. 그는 무타공 선반과 거울에, 천장 전기 공사가 필요 없는 펜던트 LED 조명까지 달았다.
전자 제품도 무타공 열풍이다. 싱크대 상판 안 뚫고 배수관을 연결하는 무타공 정수기와 식기세척기가 인기.
무타공 세계의 정점은 ‘무타공 벽걸이 TV’다. 무게 30~50kg의 TV를 어떻게 붙이는 걸까. 업체에 문의하니 “콘센트 단자 안에 지지대를 넣어 TV를 거는 원리로, 대리석 아트월에도 금 하나 안 가게 시공할 수 있다”며 20만~30만원이 든다고 했다. 요즘은 좁은 거실에 TV장을 두기보다는, 모니터를 벽에 붙이거나 ‘스탠바이미’ 같은 날씬한 거치대에 올리는 추세다.
방 빼줄 때가 된 이들을 위해 훼손된 벽지·타일·마루를 보수하는 제품과 전문가도 대기 중이다. 구멍을 필러로 메우고 스티커를 붙이거나, 벽지가 찢어졌다면 안 보이는 구석에서 조금 떼와 ‘이식’하고, 깨진 대리석도 감쪽같이 복구한다.
자, 구멍 따위는 간단히 해결되니 걱정 마시라. 이제 집값 폭등과 대출 규제, 멀어진 내 집 마련의 꿈만 걱정하면 되나니.